<김상범 칼럼> 탁아불황이 주는 교훈
<김상범 칼럼> 탁아불황이 주는 교훈
  • 성광일보
  • 승인 2016.07.23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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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범/세종사이버대 자산관리학부 교수/국민경제정책연구소 소장

▲ 김상범/세종사이버대 자산관리학부 교수/국민경제정책연구소 소장
1950년대에 작은 탁아조합이 워싱턴 D.C.의 캐피톨힐에서 생겨났다. 일명 캐피톨힐 탁아협동조합이다. 이 탁아조합은 부모들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유아원이다. 부모들은 워싱턴 D.C. 인근의 직장에 다니는 직원들이 대부분이어서 공동으로 자신들의 아이들을 돌보고자 했다. 시작할 때는 참여하는 가정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한 명의 행정담당을 돌아가면서 맡고, 그가 탁아를 요청하는 부모와 맡고자하는 부모를 서로 연결하는 장부를 관리함으로써 탁아의 기능은 충분히 유지가 되었다.

1970년대 이르러서 아이들을 맡기는 부모들이 200여 가정에 이르자, 행정담당이 혼자 맡아서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조합은 장부대신 화폐의 기능을 하는 '증서(scrip)'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조합에 가입하는 가정에는 20시간 탁아를 할 수 있는 증서를 주고 조합을 떠나게 되면 동일한 양의 증서를 반환하는 조건이었다. 조합원들은 아이들을 돌봐주는 대가로 이 증서를 사용했다. 증서 한 장으로 30분 동안 아이를 맡길 수 있었다. 그러니까 조합의 가정은 40장의 증서를 처음에 받았고 총 20시간 사용할 수 있었다. 증서가 더 필요하면 다른 가정으로부터 증서를 받아야 하기에 아이 돌보는 일을 해야 했다.

40장의 증서를 받아든 조합원들은 한결같이 20시간의 탁아시간 할당이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돌발상황이 발생하는 직장생활, 매주 찾아오는 주말, 떠나고 싶은 여행 등을 생각하면 증서를 쓰기보다는 더 많이 확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너도나도 그런 생각을 하니 아이를 맡기려는 가정은 별로 없고 아이를 돌보겠다고 나서는 부모들만 있었다. 모든 가정에게 증서를 나누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들은 아이를 맡기는 소비를 하지 않고 아이들 돌보겠다는 생산활동만 하겠다는 것이다. 탁아조합에 아이들을 볼 수 없는 희한한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로서 탁아조합은 '불황'에 빠지고 말았다.

현실의 경제상황과 대비해본다면 탁아조합은 국가경제, 증서는 화폐, 아이를 맡기려는 행동은 소비, 아이를 돌보겠다는 것은 생산에 비견된다. 시장에서 소비활동을 하지 않고 돈이 돌지 않는 현재의 경제상황과 흡사한 것이다.

탁아조합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으니 조합운영위원회는 해결책을 내놓아야 했다. 타개책으로서 운영위원회는 하나의 규칙을 정했다. 조합원은 6개월마다 한번은 반드시 외출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제도 조합원들의 탁아수요를 창출하지 못하고, 별 효과를 보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갔다. 불황타개는 규제강화로서는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불황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새로 들어오는 조합원들에게 60장의 증서를 지급하고, 탈퇴할 때는 40장의 증서만을 반환하도록 한 것이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해진 조합원들은 그제야 아이들을 맡기기 시작했고 증서는 유통되기 시작했다. 증서, 즉 새로운 화폐의 공급이 조합경제를 살린 것이다. 탁아불황은 수요부족의 경제상황에서 케인즈식 접근 방법인 화폐의 공급이 바람직한 정책임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문제가 여기서 완전히 끝난 게 아니었다. 몇 년이 지나 새로운 가정이 많이 들어오고 증서의 유통도 더욱 많이 되자 증서가 넉넉해지자 아이를 돌보겠다는 조합원은 없게 되었다. 증서가 유통되지 않는 상황이 다시 발생한 것이다. 증서, 즉 너무 많은 화폐의 공급이 조합경제를 망쳐버린 것이다.

최근 조선과 해운업의 구조조정을 놓고 한국은행의 발권력 동원에 대해 말이 많다. 정부는 기업 구조조정에 한국판 양적완화가 필요하며 한은이 국책은행의 채권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한은은 사회적 합의가 도출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작정 돈을 찍어낼 수는 없다고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

탁아불황에서 보듯이 수요(아이를 맡기려는 행동)부족에는 화폐의 추가공급(증서의 공급)이 제대로 된 해결책임을 보여준다. 발권력을 동원한 것이든, 자본확충펀드에 대출하는 것이든 한국은행의 역할은 필수적이다. 현대 경제학에서 중앙은행의 역할은 물가의 안정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실업률을 일정수준 이하로 유지하여 국민경제의 안정을 기하는 것도 물가안정에 못지않은 중요한 역할이다. 1990년대 일본 중앙은행이 물가안정만을 목표로 삼은 것은 대표적 실수의 예로서 꼽힌다. 당시 일본은 디플레이션을 겪고 물가도 안정하향세를 띠자 경제불황에 대처하는 것은 중앙은행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했었던 것이다.

미국에서도 중앙은행격인 연방준비위원회의 주요 임무는 공식적으로는 물가안정 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경제성장, 고용유지도 포함되어 있다. 한국은행은 불황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이것이 2007년 금융위기 이후 나타난 전 세계의 주요 중앙은행들의 정책들이기도하다. 경제위기의 불확실성에 대한 최악의 대응은 '잘못된 행동'이 아니라 '행동 안 하는 것'이라는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의 경고를 되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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