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치형 교수의 <중국을 말하다> 중국의 군중동원정치(Ⅰ)
소치형 교수의 <중국을 말하다> 중국의 군중동원정치(Ⅰ)
  • 성광일보
  • 승인 2016.09.27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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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치형 교수 / 건국대학교 정치학 박사

▲ 소치형 교수/건국대학교 정치학 박사 (국제정치전공), ·건국대·호남대 교수 역임, ·현 동북아 연구원 원장
중국공산당은 그들이 결정한 정책에 대해 국민의 지지를 얻고 그 정책을 원활히 추진하기 위한 방편으로 인민군중을 동원하는 공산주의식의 군중운동을 전개해 왔다. 공산당이 이러한 중요하고 어려운 정책이나 계획을 순수하게 인민의 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추진한 것도 있으나 그 대부분이 인민을 정치적으로 통제하고 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아왔다. 특히 반대세력이나 인물을 제거하거나 숙청하는데 있어 성공을 거두려면 필연적으로 인민의 지지와 동의가 필요했고,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인민군중의 강제적 참여로 이뤄지는 군중운동으로 발전되어 갔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정부 수립 이전부터 민족자산계급을 근본적으로 불신하였다. 그리하여 정권 장악 이후 자산계급을 발본색원하여 숙청하는 광범위한 군중운동을 전개하였다. 토지개혁운동, 반혁명진압운동으로 200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고, 그 이상의 인민이 투옥되거나 강제노동에 처해졌다.

▲ 반우파투쟁
1950년 5월 마오는 사상개조운동을 광범하게 전개할 것을 지시하였다. 1950년 12월 '무훈전'(武訓傳)이라는 영화가 상영되자 지주계급에 대한 농민의 투쟁의지를 저하시키는 개량주의라는 이유로 마오는 비판 지시를 내리면서 “사상개조는 무엇보다도 먼저 지식분자의 사상부터 개조해야 하며 이것이 민주개혁을 실현하고 공업화를 실현할 수 있는 중요한 조건 중의 하나”라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상개조운동의 주요 내용은, 첫째 마르크스-레닌주의, 모택동사상, 그리고 소련의 경험을 학습하는 것, 둘째 사회활동과 정치투쟁에 참여하는 것, 셋째 자아비판, 넷째 자본주의 및 유심주의(唯心主義)를 비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이때부터 '모택동사상'에 대한 개인숭배 사조가 전국적 차원에서 동원체제 형식으로 전개되었던 점이다.

그리하여 1952년 1월 마오는 전국의 모든 인민과 공공기관 근무자들이 일제히 독직(瀆職)반대, 낭비반대, 관료주의를 반대하는 대규모 투쟁을 전개하도록 조치하였다. 이것이 소위 '3반5반(三反五反)운동'이며 전국적 범위에서 전개된 결과 희생자의 숫자는 400만 명이 넘었고, 기타 파악되지 않는 희생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마오의 지시에 따라 당은 지식계층(지식분자) 사상개조운동도 전국적 군중운동으로 전개하였다. 이 운동의 주요 대상은 지식층이었다. 왜냐하면 대체로 지식인들은 지주계급 출신은 아니더라도 자산계급이나 또는 소자산계급 출신이었으며 이들이 받은 교육은 주로 봉건적이거나 자본주의적 교육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의식을 개조하지 않고서는 사회주의 사회건설에 커다란 차질을 가져온다는 것이 당시 공산당의 명분이었다. 그리하여 당 주도로 교육계, 문학계, 종교계, 전 사회계층을 대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사상 및 마오(毛)사상 학습과 '단결, 교육, 개조'를 핵심으로 하는 사상개조운동이 전국의 각단위에서 강제적으로 전개되었다.

▲ 삼반오반 운동
사회주의 건설과 사회의 재구성이 시급했던 마오는 자신과 당의 지도에 반대하거나 소극적인 분자들을 솎아낼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전국 범위에서 '반우파투쟁'을 군중운동 형식으로 추진하였다. 지식인 집단은 대체로 급격한 사회변화에 대해서는 보수 성향을 띠게 마련이다 당시 중국에서도 혁명정권 수립 역사가 일천했고, 또한 공산주의 이념과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분위기가 성숙되지 못한 상태였다. 마오는 자신과 당의 지도에 대한 비판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술책을 모색하게 되었다. 즉 모든 비판적 견해와 이견을 당이 수렴하겠다는 일종의 유인정책이 '백가쟁명(百家爭鳴', '백화제방(百花齊放)'이었다. 계급의 적, 인민의 적, 반혁명분자를 색출하려는 '인사출동(引蛇出洞)' 방침에 걸려들어 결과적으로 전국에서 50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다. 매 군중운동 때마다 희생당한 이들의 숫자는 개인별이지만 그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숫자는 실로 통계조차도 낼 수 없을 정도였다.

이 모두는 인민군중을 대상으로 강제적인 정치동원의 형태로 전개된 것이다. 중국공산당과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군중노선을 통하여 개인적인 정치적 야망 실현과 공산당의 정통성을 과시하는 가운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인민의 희생을 강요해 왔다. 이러한 형식과 방법은 특히 마오의 집권기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물론 마오 사망 이후에도 이러한 통치 패턴은 오늘 날까지 잔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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