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치형 교수의 <중국을 말하다>
소치형 교수의 <중국을 말하다>
  • 성광일보
  • 승인 2016.10.14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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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군중동원정치(2)

▲ 소치형/·건국대학교 정치학 박사(국제정치전공),·건국대·호남대 교수 역임, ·현 동북아 연구원 원장
중국공산당은 집권 이래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수많은 군중운동을 전개하였다. 혁명 이후 안전보장이나 사회주의 개조 또는 정치적 경쟁자 제거라는 차원에서 인민대중을 대상으로 하든 당의 숙당 명분으로 '정풍운동'을 추진하기도 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이 한국전쟁에 개입할 것을 결정한 다음인 1950년 10월 1일 이후부터 전국에서는 공산당의 지도하에 '항미원조,보가위국'(抗美援朝,保家衛國)의 이름하에 대규모 군중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중국인민지원군으로 구성된 '인민해방군'이 한국 전선에 투입되었던 10월 26일 '항미원조총회'(抗美援朝總會)를 조직하여 국내외에서 '항미원조' 운동을 전개하였다. 1951년 5월 1일 중국정부는 중국 전역에서의 '항미원조, 일본재무장반대' 군중시위대회에 참가한 총인원은 약 1억 8,643만명이라고 발표하였다.

 
중국공산당은 '항미원조총회'의 조직을 통해서 전국적으로 애국공약운동을 전개하였다. 화북지역의 경우, 애국공약에 서명한 사람은 농촌 인구의 약 70%이고 도시는 약 90%에 달하였다. 애국의 뜻을 위하여 수 많은 청년 학생은 지원군에 입대하였고 군에 입대할 수 없는 사람들은 후방에서 무기헌납운동, 위문품헌납운동 또는 애국증산운동 등에 참여하였다. 중국은 이러한 운동을 통하여 중국인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동시에 신생 중국 정부에 대한 인민의 지지도를 크게 높이는 데 성공하였다. '항미원조'의 이름으로 전개된 대대적인 군중운동은 먼저 한국전에 파견하는 지원군을 손쉽게 모집하고, 한국전 참전 결정에 대한 인민의 지지를 확대하고 이러한 운동을 통하여 국민적 일체감을 갖게 하는 다목적 군중운동이었다.

중국은 경제적 난국을 타개하고 자력갱생의 길을 걷기 위해 1958년 5월 공산당 제8기 2중전회를 소집했다. 여기서 중국의 경제정책노선에는 중대한 전환이 일어났고 '대약진운동', '인민공사' '사회주의건설총노선' 즉 '3면홍기운동'이 시작되었다. 당시 중국은 경제적 난국을 군중운동 방식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이 운동의 일환으로 1957년 9월 공산당 8기 3중전회에서는 전체 농촌에서 수리개발과 퇴비증산을 위한 군중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계획을 채택했고 이어서 공업과 농업생산을 위한 군중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마오의 급진적 좌경노선은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전 인민과 전 가정을 총동원한 최대 규모의 군중노선은 결과적으로 수 천만 명의 아사자와 희생자를 낳고 말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책임은 아무도 지지 않았다. 이유는 마오에 대한 비판은 고작 당내에서만 이루어졌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파벌간의 투쟁에 있어서도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가능하기만 하면 인민군중을 동원하는 군중운동을 전개한다. 이것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서 1966년의 '프롤레타리아문화대혁명'(문혁)을 들 수 있다. 마오의 설명에 의하면, 문혁의 주요 목적은 투쟁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주자파(走資派)' 및 당권파(當權派)를 타도하는 권력투쟁이었다. 동시에 문혁은 무산계급전정(無産階級專政)을 공고히 하여 사회주의 노선을 견지함에 있어 수정주의 사조의 부활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정치혁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문혁은 두 개의 계급 그리고 두 개의 노선 간에 '네가 죽고 내가 사는 투쟁'이기도 했다. 실제로 문혁은 당내에서 실권을 상실하여 소수파로 전락한 마오 세력이 합법적인 투쟁방법으로는 그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실권을 되찾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폭력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장악하려는 권력투쟁이었다.

마오는 탈권 목적을 위해 어린 학생들과 청소년 중심으로 조직된 홍위병(紅衛兵)을 동원하여 군중운동을 전개하고 동시에 반대파인 류샤오치(劉少奇) 등의 타도운동을 주도하였다. 홍위병은 1966년 8월 18일 북경에서 열린 '문화대혁명 경축을 위한 백만군중대회'에서 최초로 그 모습이 공개되었다. 이 자리에서 마오는 홍위병 대표들을 접견하고 이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 후 홍위병들은 전국의 규모에서 공식·비공식으로 혁명에 필요한 교육을 받고 문혁에 참가하였다. 실제로 문혁 기간에 홍위병들의 선전선동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강제 및 반강제로 문혁에 참여하게 되어 인민의 동원 범위와 조직은 전국 최대집단으로 확대되었다. 마오는 군중운동을 전개하여 자신의 반대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다시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처럼 중국의 군중운동은 정권의 탈취과정에서도 가능한 수단으로 기능하기도 했다.

중국공산당의 정책을 지지받기 위해서이건 지지하기 위해 전개되는 인민군중운동은 인민에게는 정치참여가 되고 공산당 당국에게는 정치동원의 성격을 띠게 된다. 마오시대 중국의 정치과정은 인민군중운동으로부터 시작하여 인민군중운동으로 끝나는 사례가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중국의 정치과정은 중국공산당의 유산으로서 인치(人治)가 우위를 누리는 한 여전히 깊은 뿌리를 내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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