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치형 교수의 <중국을 말하다>
소치형 교수의 <중국을 말하다>
  • 성광일보
  • 승인 2016.10.29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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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과 권력투쟁: 당내 친소파 제거(1)

▲ 소치형 고수/·건국대학교 정치학 박사(국제정치전공),·건국대·호남대 교수 역임, ·현 동북아 연구원 원
당의 단결, 당권의 강화, 마오쩌둥 지도체제확립 등은 중국의 통치 메카니즘 확립에 있어 불가피한 요소들이다. 당의 권위 확립과 당에 의한 권력의 총괄적 수렴은 정치분야는 물론 사회주의 경제 기반을 닦는 데도 예외없이 요청되었다.

사회 전반에 대한 사회주의적 개조와 경제의 하부구조를 건설함에 있어 모든 공산주의체제는 한결같이 계획경제 및 중앙집중적 관리체제의 확립에 몰두하였다.

따라서 경제발전을 위한 일체의 기획이나 정책결정 역시 당 중앙의 절대적인 우위성 아래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마오가 정권 초기 강조했던 '과도기의 총노선'은 당 중앙의 독자적인 권위 및 지위 보장을 위한 중차대한 정책결정이었다. 이러한 시각에서 까오깡(高崗)과의 정치권력을 둘러싼 충돌은 당시의 정국에 있어 심각한 반향을 불러오게 되었다.

까오는 스탈린의 적극적 지지를 받았던 자이다. 그는 중국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기 이전부터 만주지역에서 상당한 정도의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왔다. 그는 1950년대 초반부터 당내에서 자신의 독자성을 표방해 왔으며, 때때로 당 중앙의 권력구조에 도전하는 호전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그 자신이 당 중앙의 지도에 저항하면서 스스로가 당의 총서기나 부주석 아니면 국무원 총리직을 맡아야 한다는 견해를 공개적으로 밝힘으로써 당 중앙과 마오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치적 행태는 그 배경이나 동기를 차치하고서라도 분명한 해당행위에 속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마오가 강조했던 '과도기의 총노선'이 이미 당론으로 공식화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까오의 도전적 행위는 묵과될 수 없었다.

마오는 까오의 시도를 '독립왕국'을 지향하는 지역 할거주의로 지목하였고, 당 권력의 분권을 요구하는 경향을 비판, 그와 그에 동조하던 상해지역 주요 지도자였던 소련유학파 야오수서(饒漱石)도 비판하고 나섰다.

이후 마오는 당 중앙의 차원에서 이들을 공식적으로 응징하기 위해서 전국의 각급 당원을 중심으로 하는 비판운동을 전개하였다. 당내의 정풍운동의 일환으로 당내의 개인주의·분산주의·개인숭배 등을 적극 반대한다는 결정을 공식화하였다.

▲ 까오깡
한편 이 사건과 관련지어 또 다른 이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이들이 소위 '독립왕국' 건설을 시도했다는 비판은 특히 까오깡과 스탈린 양자 관계를 규명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당시 만주를 중심으로 하는 동북구와 상해 중심의 화동구는 과거부터 주요 산업 및 상업지구로서 외국투자가 가장 많이 이루어졌던 선진 지역이었다.

이와 같은 조건과 환경을 지닌 지역이 당 중앙의 지도와 결정을 무시한다는 것은 당시의 국내정치 상황을 감안할 때, 극심한 지방적 분열과 그에 따른 할거주의의 부활이 예상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오가 만주지역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인식 또한 이들의 숙청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마오는 만주를 중국 땅에 존재했던 이전 제국주의 러시아의 식민지로 간주하고 있었다.

사실 중국인들은 역사적 경험을 통해 만주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익히 알고 있었다. 마오는 까오와 스탈린의 돈독한 관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까오를 쉽게 비판 대상으로 지목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의 사망은 마오에게 절호의 공격 기회를 제공한 셈이 되었다. 앞서의 지적처럼 마오가 까오깡 집단을 겨냥하여 비판하기 시작했던 시기가 같은 해 6월부터였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마오의 의도는 소련내에서의 후계자 문제가 해결되기 이전에 중국공산당 내에서 자신을 견제하려고 했던 친소파를 숙청하고, 만주지역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완전히 구축하려는 데 있었다. 마오의 지적에 따르면, “스탈린은 까오깡을 좋아했고, 그에게 자동차를 선물했다. 까오깡은 매년 8월 15일 스탈린에게 축전을 보냈다”고 한다.

마오는 1955년 3월 결국 까오와 그 측근 세력을 반당파벌주의로 당에서 영구 축출할 수 있었고, 정권 수립 이후 그가 직면했던 최초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당내 자신의 위상을 공공히 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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