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치형 교수의 <중국을 말하다>
소치형 교수의 <중국을 말하다>
  • 성광일보
  • 승인 2016.11.28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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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과 권력투쟁: '작은 거인(鄧小平)'의 좌절(3)

▲ 소치형/·건국대학교 정치학 박사 (국제정치전공), ·건국대·호남대 교수 역임, ·현 동북아 연구원 원장
마오쩌둥과 문혁파 그리고 저우언라이(周恩來)와 원로 보수파는 린뱌오(林彪) 사태를 경험한 후 당을 정상적인 상태로 재건하고, 당 우위의 원칙을 견지하기 위해서 노·중·청의 3결합원칙을 10전대(1973. 8.24-28)의 당장에 반영하였다.

이것은 향후 중국을 이끌어 나갈 지도부는 혁명노선에 투철해야 하고, 혁명경험이 풍부한 노간부 및 중년간부와, 그리고 당의 활성화를 기할 수 있는 청년층 간부 등의 3자결합의 조건을 충족시켜야한다는 방침때문이었다.

이 원칙에 따라서 인사 개편이 있었는데, 첫째는 노간부에 대한 배려로서 문혁 때 실각되었던 덩샤오핑(鄧小平)을 비롯한 구 간부들(王稼祥, 譚震林, 烏蘭夫, 寥承志) 등이 복권되었다. 둘째는 청년층을 대표하는 왕홍원(王洪文)이 정치국 상무위원 겸 부주석으로 전격 기용됨으로써 당내 서열 3위를 점하였다. 이로써 린뱌오 사건 이후 쇄락일로를 걷고 있는 군부의 대거 탈락과는 대조적으로 상해파 '4인방'이 당의 주요직을 맡게 되었다.

덩샤오핑의 복권 및 복직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그는 1974년 10월 4일 마오의 지시에 의해서 국무원 제1부총리에 임명되었다. 당시 덩을 강력하게 천거했던 저우 의 덕분이었다. 때문에 덩은 저우를 대신하여 중앙 정무를 관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덩은 다시 마오의 지시에 따라서 1975년 1월 5일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겸 총참모장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뒤이어 정치국상무위원으로 승진함과 아울러 당 부주석직에 올랐다. 덩은 행정부 방면에서 저우와 더불어 '4개 현대화'를 적극 추진할 수 있는 기회와 직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당의 부주석이자 총참모장으로서 당·군 부문에서도 문혁 때 이상으로의 권한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당의 최고실력자로서의 입지를 닦을 수 있게 되었다. 고령과 신병으로 정상적인 당·정 업무를 보지 못하고 있던 마오와 저우의 입장에서 보아 덩은 분명 “업무처리에 과단성이 있고”, “얻기 힘든 인재이며”, “정치사상이 강한 자”로서 인식되었다.

한편 덩은 조정정책을 전면 추진하면서 본격적으로 '4인방'의 극좌노선을 비판하면서 '4인방'을 세 뿌리의 대독초(三株大毒草)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첨예하게된 양측의 갈등은 보다 심각한 권력투쟁으로 비화되어 갔다.

덩은 정책추진 과정에서 '4인방'과 타협하거나 협상하지 않고 과단성 있게 자신의 구상을 추진해 나갔기 때문에 '4인방'을 비롯한 극좌파의 견제 및 공격을 모면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자신이 복권되는 데 있어 결정적 역할을 맡아 주었던 저우가 회복 불가능한 정도로 와병중에 있었으므로 덩은 점차 당·정·군으로부터의 고립을 면할 수 없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복권의 기회를 허용해 주었던 마오가 그 측근의 덩 비판 입장에 동조함으로써 마오의 덩에 대한 신뢰감이 동요되었던 사실이다. 그럼에도 덩은 이들 경쟁적인 파벌세력의 압력과 공격에 저항하면서 현대화를 위한 '전가치소'(專家治所)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4인방'은 마오의 변심을 등에 업고 새로운 정치적 강자로서 재기한 '작은 거인'을 집요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4인방'의 극좌적 정치노선은 철저하게 홍(紅)에 바탕하고 있었다. 그들은 문혁을 통해서 형성되었고, 마오의 후원으로 중앙정치무대에 진출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항상 마오의 노선에 충실했을 뿐만 아니라 때때로 마오보다 훨씬 더한 극좌노선을 선호하였다.

그들은 계속혁명론과 계급투쟁론 그리고 자력갱생의 경제원칙에 근거하여 중국을 통치하고자 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에 반하는 사상 및 정책은 모두 수정주의이고 우경적인 것이며 또한 주자파(走資派)에 속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덩을 상대로 대적하기 위해서는 군중운동이 불가피했다. 이들 주장의 요지는 수정주의를 반대하고, 철저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정치를 실시해야 하며, 계속혁명을 견제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서 1976년 1월 8일 저우의 사망은 사실상 덩의 실각을 예고해 주었다. 마오의 측근, 즉 '4인방'의 덩 견제와 저우의 사망은 '작은 거인' 덩에게 다시 한 번 권력 정상에의 도전 기회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4인방'이 주도했던 덩을 반대하는 정치동원은 저우 사후 더욱 본격화되었다. 예를 들면, 덩을 겨냥하여 '착취자산계급', '매판자산계급', '대내적 수정주의 및 대외적 투항주의' 등으로 묘사하여 각지에서 수 개월간 지속되었다. 마오의 공식적인 덩 비판은 3월 전국적인 규모로서의 정치동원으로 확산되게 되었고, '4인방'이 주도하는 덩 숙청 계획이 구체적인 형태로 전개될 수 있게 되었다. 4월 당 중앙은 마오의 제의에 따라서, 공식적인 절차를 생략한 채 화궈펑(華國鋒)을 당 제1부주석 겸 총리에 임명하였다. 동시에 덩을 부총리, 당 부주석, 총참모장 등 모든 직책에서 해임하되 단지 당적만을 유보한다는 결정을 발표하였다.

'작은 거인' 덩샤오핑의 정치적 좌절은 마오 최후의 정치적 선택이었다. 그리고 문혁파의 승리였다. 마오와 '4인방'은 차기 후계자로서의 덩을 거부하였다. 그 주된 이유는 중국 혁명의 역사를 재평가하고, 공산주의 교리를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재해석하려는 거시적인 안목을 지닌 덩의 도전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저우의 사망은 '작은 거인'의 저항감을 무력화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따라서 마오 생전 최후의 정치동원 목표는 최대의 정치적 혼란기에 즈음하여 마오와 그 추종파벌이 계속 권력을 배타적으로 장악하기 위해 정치적 경쟁자 덩샤오핑을 숙청하는 것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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