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치형 교수의 <중국을 말하다>
소치형 교수의 <중국을 말하다>
  • 성광일보
  • 승인 2016.12.14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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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과 당내 마오쩌둥파와의 권력투쟁
▲ 소치형 교수/·건국대학교 정치학 박사(국제정치전공),·건국대·호남대 교수 역임, ·현 동북아 연구원 원장

마오쩌둥의 사망과 뒤이어 일어난 '4인방'의 체포는 중국 정치의 앞날을 한층 불확실하게 만들었다. '범시파(凡是派: 마오쩌둥의 지시를 무조건 따르는 세력)'로 분류되는 화꿔펑(華國鋒)이 중국을 대표하는 지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권위와 지도력 그리고 당·정·군에서의 위치는 불안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취약하고 미약했다. 비록 마오가 그를 후계자로 지목했다고는 하지만 권력의 정통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불투명한 정국에서 당시 당 부주석이자 국방장관이던 예젠잉(葉劍英)을 비롯한 원로들은 이미 실각했던 덩샤오핑이 복권될 수 있는 일련의 조치들을 취했으며, 그 결과 덩은 제10기 3중전회(1977. 7.16-21)에서 본래의 지위를 회복할 수 있었다.

덩샤오핑의 국정목표는 개혁과 개방의 현대화노선을 제도화하는 데 있었다. 이에 따라 그가 구체적으로 설정했던 정국 구상은 구 원로 간부들을 복권시키고, '4화(四化: 농업, 공업, 과학기술, 국방에서의 현대화)' 실천에 요청되는 신진 간부들을 등용하며, 사상해방을 각 부문에서 실천함으로써 마오쩌둥 사상평가(評毛)를 추진한 후 마오쩌둥주의자들인 '범시파'를 당으로부터 축출하는 것이었다.

'부도옹(不倒翁)' 덩샤오핑의 권좌로의 복귀는 현대화를 더욱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1978년 12월 당 제11기 3중전회는 마오 사후의 중국 정치를 전망하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띤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현대화로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마침내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주도자 덩은 마오가 그러했던 것처럼, 인민군중으로부터의 정통성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구상이 실현 불가능한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현대화 추진과 관련하여 전국적인 범위의 정치동원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자 했다.

덩샤오핑은 사상노선에 있어서 '실사구시'의 관점에서 마오쩌둥 평가운동을 공개적으로 광범위하게 제기하였다. 덩은 마오쩌둥 사상의 과학적 체계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진리'의 기준에 관한 공식적인 토론을 언론매체를 통하여 정치동원의 수단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1978년 5월 11일자 광명일보는 '실천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기사 <實踐是檢驗眞理的唯一標準>를 게재하였고, 마오쩌둥 사상에 충실해왔던 당·정·군을 대상으로 하여 사상해방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리고 보다 커다란 의미를 띠는 것은 '4인방'에 대한 공개재판을 허용한 것이었는데, 이는 곧 마오에게 가하는 공개비판의 성격을 띠는 것과 다름없었다.

1980년 11월 20일부터 수 주간 계속된 공개재판 실황은 TV의 황금시간대에 맞추어 방영되었으며, 사상 유례없이 외국에도 공개리에 소개되었다. 이것은 분명히 인민군중을 상대로 시청각적 효과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반응을 기대했던 덩과 그 추종세력의 의도적이며 계산된 정치동원이었다.

덩샤오핑의 정치적 승리는 1981년 6월에 열린 당 제11기 6중전회에서 결정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회의에서 덩 지지세력 가운데 제1인자인 후야오방(胡耀邦)이 당의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여기서 이른바 약칭 '역사결의(歷史決議)'가 통과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오쩌둥의 역사적 지위와 그의 사상에 대한 최초의 당의 평가라는 측면에서 역사적 문건이라 할 수 있다.

8개 항목으로 구성된 내용은 ①건국 이전 28년간의 역사적 회고 ②건국 이후 32년간의 역사에 대한 기본 평가 ③사회주의 개조의 7년간 ④사회주의 건설기의 10년간 ⑤문혁기의 10년간 ⑥역사의 대전환 ⑦마오쩌둥의 역사적 지위와 마오쩌둥 사상 ⑧사회주의 현대화를 위한 분투 등이다.

이 문건의 의미는 마오 개인과 중국을 지도하는 이념으로서의 마오쩌둥 사상을 분리시키려는 것과, 마오쩌둥 사상을 그 개인의 사상이라기보다는 중국공산당의 장기간에 걸친 투쟁과정에서 형성된 '집체적 지혜'로서 인정하려는 데 있었다. 따라서 총괄적 평가는 마오가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였지만 문혁(文革)이라는 중대한 오류를 범했으므로 그 공적이 첫째이고, 과오는 두 번 째라는 것으로 내려졌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이 문건의 채택은 덩의 권력 장악을 확인해 준 것이며, 이로써 마오쩌둥과 관련된 중국에서의 파벌간 권력투쟁이 일시 종료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이 '역사결의'를 채택함으로써 마오쩌둥에 관한 당의 공식적 평가가 내려졌고, 덩샤오핑의 현대화정책이 중국의 공식 정책노선으로 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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