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한국에 맞지 않다는 마담X에게(4)
민주주의는 한국에 맞지 않다는 마담X에게(4)
  • 성광일보
  • 승인 2017.07.2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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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지방자치에 대한 논쟁 -

나. 한국 민족의 희망을 보다

▲ 명길랑/천주교 서울평협 전 대외관계위원장

비숍은 한국의 전통적인 정치질서의 틀에서 해방된 한국인의 모습에서 희망적인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시베리아에 이주한 한국인들의 농촌마을에서 한국의 역동적인 미래의 근거를 발견합니다. 〈시베리아 정착민의 성공에 대하여〉의 부분을 전재(轉載)해 보겠습니다.

「한국인 마을 ‘관’에 도착하기까지는 80베르스트, 80.5km가 소요되었다. 일본이 거대한 군대를 두만강 남쪽에 진주시키리라는 어이없는 생각에 사로잡힌 중국은 모든 배들을 러시아 주둔지에 묶어 두었다. 나는 국경에서 러시아 군대와 그 병영을 찍었는데, 그 사진에는 하사관 한 명이 완전히 절망한 상태로 비참한 숙소에 기대어 구부리고 있었다. 돌아오는 여행은 자신의 정부 밑에 있자 않고 다른 나라 정부 밑에 있는 한국인의 생활상을 관찰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1863년 전에 13가구가 함경도로부터 국경을 건너 포시만 북쪽에서 조금 떨어진 티젠호 주변에 정착했다. 1866년에 이르러서는 1백여 가구가 정착했지만 매우 가난해서 러시아 정부는 소와 씨앗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1869년 중에 한국의 북쪽 지역이 심한 기근에 허덕일 때 4천5백여 한국인들이 굶주린 채 프리모르스크로 이주했고 그들 중 3천8백 명은 절대 기근에 굶주렸다. 이들은 러시아 정부의 보호를 받아야 했는데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불과 몇 년 전에 러시아 제국에 양도된 그 지역은 거의 황무지였고 정착민들은 흉작으로 고생을 해야 했다. 1897년 프리모르스크에는 외딴 거주지까지 포함하여 32개의 마을이 있었는데 이는 5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눠져 있었다. 이 외에도 흑룡강가에 있는 하바로포스크시에 속하는 한 마을에도 블라디보스톡과 니콜스코예에 근접한 커다란 한국인 거주 지역이 있었다.

한국인 이주민의 전체 수는 16,000∼18,000명이었다. 이들은 문자 그대로 빈곤자였다. 러시아 정부의 자선으로 한 해 한 해 겨우 살아가고 있었고, 옥수수 씨앗까지 배급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시베리아 계곡의 부유한 지역에 무국적의 거주자로 정착했고 몇 년 동안 평온했었다. 그 뒤 많은 거주자들이 그들이 차지한 땅을 구입했고 인접한 땅에 대한 공동의 권리를 얻었다. 무국적의 거주를 정식 토지 구입에 의해 점진적으로 대체하고 토지 구입자들에게 법적인 권리를 부여한다는 것이 러시아 정부의 의도였다.

실제로 이 외부 정착자들은 자치를 누리고 있었다. 연장자나 촌장은 마을의 크기에 따라 한 사람에서 세 사람까지 관리를 거느리고 각 지역을 관장하고 있었다. 경찰과 공무원도 한국인이었다. 각 지역에는 두세 명의 법관이 있었는데 그들은 경범죄를 심리하는 서기를 두고 있었다. 치안과 세금징수에 대해 책임지는 촌장은 급료가 지불되거나 다양한 수당을 받았다. 이 지역의 모든 관리들은 한국인이었고 한국인 가운데서 한국인들에 의해 뽑혔다. 정부의 세금은 해마다 각 농장에 대해 10루블이었다. 도로, 수로, 다리, 학교 등을 위해 의회에서 마을 사람들에 의해 확립된 지역세는 해마다 각 농장에 대해 3루블로 제한되었다. 땅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해마다 1∼2루블을 지불하였다.

1884년 이전에 시베리아에 정착한 한국인들은 이제 러시아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지금까지 10년 동안 그들이 구매한 땅에서 정착해 왔음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도 역시 똑같은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그들은 안정된 생활과 좋은 자치운영을 하고 있었다고 보고되고 있다. 남부 러시아로부터 정착자의 점진적인 유입 때문에 철길 근처의 비옥한 땅이 요구되었고 한국으로부터의 더 이상의 유입은 금지되었다. 무허가 거주자나 흑룡강 지역의 미정착 한국인의 추방은 고려중에 있다.

크라스노예와 노보키예프 사이의 촌민들은 러시아 이주 한인들의 표본이다. 길은 꽤 좋고 길과 맞닿아 있는 수로는 잘 관리되었다. 위생법은 엄격하게 실시되었고, 촌장은 마을 청결에 대해 책임져야 했다. 가난하고 초라하고 불결한 반도의 마을과는 달리 이곳은 한국식으로 회반죽된 진흙과 기와로 단정하게 지붕이 이어져 있었고 주택지구와 농가의 안뜰은 회반죽된 담, 혹은 단정하게 짜여진 갈대로 만들어진 높은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다. 그것들은 매일 아침 청소되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돼지우리조차도 지역경찰의 아르고스를 증거하고 있다 (아르고스 : 희랍신화에 나오는 1백개의 눈이 달린 거인)

대부분의 집은 얇은 벽과 천장, 격자무쇠세공 문과 창을 가진 네다섯 또는 여섯 개의 방을 가지고 있었다. 문과 창은 희고 투명한 종이로 둘러싸여 있었고 정교하게 깔린 마루를 가지고 있었다. 또 한국 고위 관리의 집에서도 보지 못한 많은 가구들이 있었다. 캐비닛, 책상, 우아한 황동 장식을 한 나무로 만든 쌀통, 낮은 탁자, 걸상, 소파, 황동 사모바르, 찬장, 황동그릇, 도자기, 찻잔, 황동촛대, 황동등유램프 등등은 확실히 안락한 생활을 예증했다. 러시아 황제와 황후의 그림, 예수와 12명의 기도한 사람의 그림이 매우 많은 집에 투박하고 서투른 가족의 수호신처럼 걸려 있었다. 문 밖에는 곡식창고, 조랑말, 망아지를 밴 암말, 개량종 검은 돼지, 쟁기 끄는 소, 블라디보스톡 시장에 내 놓을 살찐 소, 손수레, 농기구들이 늘어서 있었다.

나는 여행자들이 내가 이곳의 한국 가정에서 느꼈던 것보다 더 온화한 친절과 더 깨끗하고 더 안락한 편의시설을 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의미심장한 것이 있다. 한국 남자들의 기풍이 미묘하지만 실제적인 변화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곳의 한국 남자들에게는 고국의 남자들이 갖고 있는 그 특유의 풀죽은 모습이 사라져버렸다. 토착 한국인들의 특징인 의심과 나태한 자부심,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게 대한 노예근성이, 주체성과 독립심, 아시아인의 것이라기보다는 영국인의 것에 가까운 터프한 남자다움으로 변했다. 활발한 움직임이 우쭐대는 양반의 거만함과 농부의 낙담한 빈둥거림을 대체했다. 돈을 벌 수 있는 많은 기회가 있었고 만다린이나 양반의 착취는 없었다. 안락과 어떤 형태의 부도 더 이상 관리들의 수탈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이곳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것은 불안함의 원천인 부보다는 명예였다. 이곳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은 평온할 수 있었다. 농부들 대다수는 부자였고 무역에 종사하며 광대한 계약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중국 국경지역에 있는 땅에 정착하지 못한 한국인들과 그곳에서 나무를 자르고 목재를 운반하는 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부유하지 못했고 그들의 움막도 더러웠다. 한국에 있을 때 나는 한국인들을 세계에서 제일 열등한 민족이 아닌가 의심한 적이 있고 그들의 상황을 가망 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곳 프리모르스크에서 내 견해를 수정할 상당한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한국인들은 번창하는 부농(富農)이 되었고 근면하고 훌륭한 행실을 하고 우수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로 변해갔다. 이들 역시 한국에 있었으면 똑같이 근면하지 않고 절약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만 했다. 이들은 대부분 기근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배고픈 난민들에 불과했었다. 이들의 번영과 보편적인 행동은 한국에 남아있는 민중들이 정직한 정부 밑에서 생계를 보호받을 수만 있다면 천천히 진정한 의미의 ‘시민’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나에게 주었다.

나는 아시아 지역의 정복지에서 거둔 러시아 정부의 성공을 주목해 왔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유량적이며 공격적인 투르크 부족을 질서정연하고 평화롭고 정착된 농업인구로 정착시키는 것을 주목해왔다. 한국에 이주민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성공도 물질적인 면이 부족했던 점을 고려하면 그것만으로도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러시아 정부는 강력한 통치력을 보였으나 그 절대적인 허용범위를 넘어서진 않았고 자그마한 금지와 규정으로 외국인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또 다른 민족의 자질과 습관에 알맞은 지방자치정부의 형태를 지원해 주었다. 러시아 정부는 시간과 교육, 다른 문명과의 접촉이 이들 이주자들의 관습과 종교와 의상에서 비난받을 만한 것들을 수정해 주리라 믿는 것이다. 그 같은 판단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며칠 후 나는 중국령 만주지역에 있는 훈춘(琿春)에 갔다. 훈춘은 위치 때문에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지였다. 거기서 나는 주둔군 사령관에게 매우 친절한 대접을 받았다. 프리모르스크의 모든 지역에서처럼 민사와 군사전문가로부터 나는 특별한 환대를 받았으며 내가 관심을 갖고 목표로 한 주제에 대해 솔직한 정보를 얻었다. 훈춘은 산악지역의 가운데에 있었다. 그리고 최근 몇 년 동안에 한국인들에 의해 개발되어 기름지고 관계가 잘 된 계곡으로 넘쳐 있었다. 황량하고 음울하고 바람에 씻겨진 듯한 곳은 더 이상 발견할 수 없었다.

훈춘에는 예전에 있었던 4천명의 군인 대신 단지 2백 명의 코사코 기병들이 있었다. 이 기별들은 좋은 벽돌로 된 막사에 살고 있었고 그 중 반은 잘 장식된 예배당에 살았다. 그 옆에는 건강하고 활동적인 바이칼 말을 위한 마구간이 있었고 작지만 잘 정돈된 병원과 사령관을 위한 통나무집, 하사관과 결혼한 병사를 위한 흙집이 있었다. 1천 5백 명의 코사코인으로 구성된 러시아 군대는 훈춘에서 흑룡강까지 30개의 초소에 나뉘어 배치되어 있었다. 사령관이 말하기를 그들의 주요한 임무는 한국인 마을을 약탈하기 위해 넘어오는 중국 마적들을 체포해서 중국인 관리들에게 넘겨주는 것인데 그들은 즉시 방면되면서 다시 약탈을 반복하곤 한다고 했다.

중국인들은 훈춘에 수천의 만주병을 모아 공포정치를 자행했는데 이는 수많은 농민들이 집을 떠나가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자신의 급료를 갈취당해 겨우 살아가는 병사들은 그 부족분을 매우기 위해 끊임없는 약탈을 자행했다. 그들의 잔인성과 폭력 앞에서 여자도 재산도 안전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극도로 기강이 풀어져 며칠 전 공식적인 일로 훈춘을 방문한 노보키예프의 국경담당 비서가 약탈당하고 겨우 그들의 손에서 풀려난 일이 있을 정도다. 중국인 관리는 군대에 관한 통제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훈춘에서 큰 피해를 일으킬지도 모를 위험을 방어하고 있는 것은 엄한 규율로 훈련된 소수의 코사코 기병대들뿐이었다」(이사벨라 버드 비숍.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이인화. 도서출판 살림. 1994. 274-279쪽)

다. 시베리아 정착민의 성공에 대한 요약

위 전문(全文)에서 본바와 같이 비숍은 한국의 전통적 정치질서의 틀에서 해방된 한국인들의 모습에서는 희망적인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시베리아에 이주한 한국인들의 농촌마을에서 한국인의 역동적인 미래의 근거를 발견했습니다. 비숍에 따르면 한국인이 러시아, 시베리아 지방에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863년이었습니다. 함경도 주민 13가구가 국경을 건너 포시만 북쪽에서 조금 떨어진 티젠호 주변에 정책했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이들에게 소와 씨앗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1869년 한국 북부에서 심한 기근이 발생하면서 4천5백여 한국인들이 굶주림을 피해 시베리아 극동쪽 프리모르스크로 이주합니다. 1897년 비숍이 프리모르스크를 방문했을 때, 그 도시와 흑룡강가의 하바로프스크,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와 니콜스크 근접지역 등에 많은 한국인 촌들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 무렵 한국인 이주민의 전체수는 16,000∼18,000명 수준이었습니다.

이들은 일정한 자치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지역의 경찰과 공무원을 포함한 모든 관리들이 한국인이었습니다. 특히 한국인 가운데서 “한국인들에 의해 뽑혔습니다.” 고국에는 여전한 전통질서의 질곡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이들의 삶은 “안전한 생활과 좋은 자치운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시베리아 한국인 마을의 풍경을 비숍은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크라스노예와 노보키예프 사이의 촌민들은 러시아 이주 한국인들의 표본이다, 길은 꽤 좋고 길과 맞닿아 있는 수로는 잘 관리되었다. 위생법은 엄격하게 실시되었고, 촌장은 마을 청결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다. 가난하고 초라하고 불결한 반도의 한국 마을과는 달리 이곳은 한국식으로 회반죽된 진흙과 기와로 단정하게 지붕이 이어져 있었고, 주택지구와 농가의 안뜰은 회반죽 담이나 단정하게 자여진 갈대로 만들어진 높은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다”

비숍은 이곳에서 한국인 가정들을 방문하면서 전혀 다른 한국인들을 발견했음을 고백합니다. 먼저 “나는 여행자들이 내가 이곳의 한국가정에서 느꼈던 것보다 더 온화한 친절과 깨끗하고 더 안락한 편의시설을 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리라고 생각된다”고 운을 뗀 뒤에 그녀는 “그러나 이것보다 더 의미심장한 것이 있다. 한국 남자들의 기풍이 미묘하지만 실제적인 변화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곳의 남자들에게는 고국의 남자들이 갖고 있는 그 특유의 풀죽은 모습이 사라져 있었다. 토착 한국인들의 특징인 의심과 나태한 자부심,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 대한 노예근성이, 주체성과 독립심, 아시아인의 것이라기보다는 영국인에 가까운 터프한 남자다움으로 변했다. 활발한 움직임이 우쭐대는 양반의 거만함과 농부의 낙담한 빈둥거림을 대체했다. 돈을 벌 수 있는 많은 기회가 있었고, 만다린(관료집단)이나 양반의 착취는 없었다. 안락과 어떤 형태의 부도 더 이상 관리들의 수탈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이러한 관찰에 기초해 비숍은 ‘한국인’을 새롭게 정의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 나는 한국인들을 세계에서 제일 열등한 민족이 아닌가 의심한 적이 있고 그들의 상황을 가망 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곳 프리모르스크에서 내 견해를 수정할 상당한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한국인들은 번창하는 부농(富農)이 되었고 근면하고 훌륭한 행실을 하고 우수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로 변해갔다.” 비숍은 그 차이를 고국의 한국인들이 처해 있는 구태의연한 정치질서의 질곡과 그로부터의 자유로움에서 찾았습니다. “이들의 번영과 보편적인 행동은 한국에 남아 있는 민중들이 정직한 정부 밑에서 그들의 생계를 보호받을 수만 있다면 천천히 진정한 의미의 ‘시민’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나에게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자치능력, 즉 민주주의 역량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한길사. 204. 762-764쪽)

이상에서 “민주주의는 한국에 맞지 않다.”는 마담X의 주장에 대해 필자가 구체적인 긴 반론을 전개했습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 민족에게는 자치역량이 넘쳤습니다. 우리 민족의 자치역량을 가로막고, 국가의 발전을 저해하고 식민지 지배체재로 만든 것은 수구세력의 집권층이었습니다.

마담X! 필자의 반론을 보시고 이의가 있으시면 재반론해 주시기 바랍니다. 언론 기관이 참석한 공개토론을 환영합니다.

국가의 형태와 정체체재를 함께 재점검해 보고 “지방자치는 한국에 맞지 않다.”는 마담X의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전개코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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