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한국에 맞지 않다는 마담X에게(12)
민주주의는 한국에 맞지 않다는 마담X에게(12)
  • 성광일보
  • 승인 2017.11.03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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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주의와 지방자치에 대한 논쟁

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폭로

▲ 명길랑/천주교 서울평협 전 대외관계위원장

긴장감이 감돌던 5월 18일 저녁 월요일인데도 성경책을 든 신자들이 명동성당으로 조용히 모여들었다. 1980년 광주항쟁 7주년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특별미사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이 미사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의미심장한 강론을 했다. “광주의 한, 그것은 민족의 한이요, 역사의 한입니다. 민족의 가슴에 칼을 질러 깊은 상처를 내고 피를 흘리게 한 그 어처구니없는 사람들은 스스로 민족 앞에 나서서 죄를 고백하고 속죄해야 합니다. 아마도 이 길만이 한을 덮고, 우리 겨레로 하여금 광주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 자신을 구하는 길이요 나라를 구하는 길입니다” 김 추기경은 전두환 정권을 직접 나무라고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이 집전한 미사가 끝나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김승훈 신부가 단상에 올랐다. 마이크 앞에선 김 신부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성명서를 읽었다.

3,120자로 된 이 성명서가 가져온 파장은 엄청났다. 박종철군 사건의 진범은 조작됐으며 물고문을 한 진범은 구속된 조한경·강진규가 아니라 황정웅,반금곤,이정호 3명이라고 폭로했다. 이로 인해 재수사가 이루어져 고문 경찰관 3명이 더 구속되고 조작을 주도한 박처원 치안감과 유정방 경정, 박원택 경정 등 경찰 간부 3명은 범인도피죄로 구속 수감됐다. 그래도 성난 민심은 가라앉지 않고 하루하루가 달랐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전두환은 26일 전면 개각을 단행했다. 노신영 국무총리, 장세동 안기부장, 정호용 내무부장관, 서동권 검찰총장에 대해 문책 인사를 단행했다. 이로써 전두환 정권의 권력 지형이 바뀌었다.

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시민 진영은 더 튼튼해졌다. 학생과 재야단체, 종교계, 야당이 주축이 되어 5월 27일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라는 범국민적 단일 조직으로 뭉쳤다. 5월 18일 정의구현사제단 성명서는 6월 항쟁의 동력이었다.

라. 정의구현사제단 성명서의 탄생

정의구현사제단의 성명서 탄생 과정은 한편의 드라마였다. 그 주연은 용기 있고 의로운 교도관들이었다.

고문을 지휘했던 조한경과 박종철의 머리를 욕조 안으로 눌렀던 강진규는 사건 초기에 ‘경찰의 대공수사 조직을 위해’ 자신들이 다 한 것으로 사건을 축소하는데 동의했다. 처음에는 경찰의 계획대로 ‘심장 쇼크사’ 사인이 만들어지면 금방 풀려날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물고문에 의한 사망’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조한경과 강진규는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된 뒤 점차 자신들만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서서히 마음이 바뀌었다. 조한경은 2월 27일 영등포교도소에서 안상수 검사한테 범인이 3명 더 있다는 사실을 실토했다. 강진규도 같은 날 안상수 검사와 별도로 면담에서 조한경과 같은 내용을 털어 놓았다. 그러나 검찰은 당사자들의 고백을 듣고도 재수사를 하지 않았다. 관계기관대책회의에 참석해서 정권 차원의 ‘해결책’을 모색했다. 그러는 동안 경찰 간부와 동료들은 교도소로 두 사람을 번질나게 찾아가서 입막음을 계속했다.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 안유는 조한경, 강진규가 가족 및 경찰들과 면회하는 자리에 입회하면서 사건의 실체를 알게 됐다. 어느 날 그는 영등포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이부영(당시, 민주통일운동연합 사무처장)을 면담하자고 불렀다. 그는 정색을 하면서 “큰일 났다. 이러다가 나라가 망하겠다”고 말했다. 이부영이 “무슨 말이나”고 묻자 “자기들이 고문해서 박 군을 죽여 놓고 그것을 조작했다. 가장 중요한 수사기관이 조작하고 거짓말하니 나라가 망하는 것 아니냐”면서 이부영에게 자기가 직접보고 들었던 일을 쭉 얘기했다.

이부영은 안유를 만나고 돌아와서 한재동 교도관(이부영과 알고 지낸 사이)을 불러서 필기구와 종이를 달라고 부탁했다. 재생갱지와 볼펜심(옥방에서는 감추기 쉬운 심을 주로 사용)을 구해주어서 안유 보안계장에게 들은 것을 기억나는 대로 적어 김정남(당시,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중앙위원)에게 전달해 달라고 교도관 한재동에게 건넸다. 한재동은 도피 중인 김정남의 소재지를 알 길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교도관 동료였던 전병용에게 전했다. 이른바 ‘민주교도관’이었던 전병용도 수배 중이었다.

그 즈음 교도관을 그만 둔 전병용은 김정남의 요청으로 연희동 집에 이부영과 장기표를 숨겨줬다가 장기표가 붙잡힌 바람에 그도 범인 은닉 혐의로 쫓기고 있었다. 전병용은 우여곡절 끝에 3월 15일 김정남을 만나 이부영이 보낸 편지 두 통(2월 23일과 3월 1일 추신)을 한꺼번에 건네줬다. 그리고 전병용은 3월 17일 체포되었다. 참으로 아슬아슬 했다.

김정남이 이부영으로부터 ‘비둘기’(감옥에서 몰래 보내는 편지)를 받은 것은 3월 15일이었다. 그는 편지 내용을 토대로 지나간 신문보도 등을 참고해서 3월 말에서 4월 초에 원고지 18장짜리 성명서 초안을 완성했다. 이 초안을 천주교 서울대교구 홍보국장 함세웅 신부에게 보냈다. 김수환 추기경에게도 대략적인 내용과 경위를 보냈다. 고영구 변호사의 부인 황숙자 여사와 딸 은영 씨가 양쪽을 수십 차례 오갔다.

김정남이 함세웅 신부에게 성명서 초안을 보내면서 사제단에서 발표를 검토해 달라고 요청했다. 함세웅 신부는 내부적으로 의논하고 김수환 추기경과 상의를 했는데, 추기경께서 대담하고 과감하게 해야 할 일이긴 한데 혹시 1975년 박정희 정권 때 인혁당 구명운동을 하니까 재판이 끝난 18시간 만에 처형을 한 사례를 들면서 전두환 정권도 포악한 정권인데 그 경찰관 두 명을 감옥에서 죽이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을 했다. 그러는 중 한편으로는 유현석·황인철 변호사와 만나 김정남 초안을 토대로 성명서를 다듬어 최종 본을 완성했다. 하지만 발표를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5월 17일 함세웅 신부는 구파발 성당에 미사를 집전하러 갔다. 그런데 구파발 성당까지 황숙자 여사가 쫓아왔다. 황 여사가 가져온 김정남의 편지에는 “이게 참 중요한 사건이고, 사제단이 이 책무를 맡아야 된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운명이 사제단의 어깨에 있다. 이것을 공개하면 전두환 정권을 붕괴시킬 수 있다. 전두환 정권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것을 공개하는 것이다. 이 일을 신부님들이 감당해야 한다.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함세웅 신부는 김 추기경과 상의하면서 5·18특별미사를 준비했다. 그리고 함세웅 신부는 홍제동 성당으로 김승훈 신부를 찾아가 그동안의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내일 미사가 끝나자마자 성명서 발표는 신부님이 하시고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더니 김승훈 신부는 기쁘게 ‘내가 이번에 책임을 지마’라고 하였고 구속도 각오했다. 당시 김승훈 신부는 정의구현사제단 대표를 맡고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정의구현사제단 성명서가 발표된 것이다.

(∙한겨레. 박종철 30주기. 최환·황적준 대담. 2017.1.4. 3∼4면. ∙한겨레. 6·10항쟁 30돌. ‘숨은 주역’ 이부영과 김정남 대담. 2017.6.10. 3∼4면. ∙서중석 6월 항쟁. 돌베개. 2011. 239∼251쪽. ∙김대중. 김대중 자서전. 삼인. 2010, 514∼515쪽)

마. 6·10 항쟁

국본은 6월 10일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 민주헌법 쟁취 국민대회”를 열기로 했다. 6월 10일 오전 10시부터 5시간 동안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는 민정당 전당대회 및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열렸다. 전두환의 4·13호헌 선언 후 이에 따라 행한 잔치였다. 대통령 후보로 노태우를 선출했다. 간선제 선거로 ‘체육관 대통령’을 뽑겠다는 의도였다.

거의 같은 시각 성공회 대강당에서는 호헌철폐 범국민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국본의 간부 20여 명은 이미 성공회 대강당에 잠입해 있었다. 서울 덕수궁 옆 성공회 대강당의 종루에는 42번의 종이 울렸다. 해방 42년인데도 독재정권을 몰아내지 못한 이 땅의 겨레에게 다시 깨어나라는 종소리였다. 동시에 민정당의 영구 집권 음모를 꾸짖는 옥외 방송을 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온 국민의 이름으로 지금 이 시각 진행되고 있는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6·10대회가 열리기 바로 전날 연대생 이한열군이 쓰러졌다. 6·10대회 출정 궐기 대회가 열린 9일 오후 연세대에서는 교문을 사이에 두고 전경 및 백골단과 학생들 사이에 격렬한 공방이 있었다.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는 이때 어디선가 날라온 최루탄이 이한열의 머리를 강타했다. 이군을 옆에 있던 학생이 일으켜 세웠지만 몸을 가누지 못했다. 이한열은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로 옮겼으나 뇌사 상태에 빠졌다.

최루탄을 맞아 피를 흘리는 이한열군을 동료 학생이 뒤에서 껴안고 있는 사진을 본 국민들은 놀라고 분노했다. 학생들은 그 모습을 손수건이나 스카프에 찍어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사진은 6월 항쟁의 상징물이 되었다. 이군이 뇌사 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은 국민들에게 정권의 종말을 예감케 만들었다. 이한열이 중태에 빠진 것은 6월 항쟁의 불꽃을 계속 지피는 활화산으로 승화했다.

6월 10일 오후 6시가 되자 차량에서 일제히 경적이 울렸다. 이것은 약속한 울림이었다. 그리고 도심으로 시위대가 몰려왔다. 사무실에서 쏟아져 나온 넥타이 맨 노동자들이 합세했다. 이른바 ‘넥타이 부대’다. 날이 어두워지자 시위 군중은 늘어났으며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다.

이 날의 시위는 전국 22개 도시 514곳에서 30여만 명이 참가했다. 경찰은 이 날 하루에 3,831명을 연행했다. 서울 시내에서 시위를 하던 학생과 시민들이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을 피해 명동성당으로 들어갔다. 명동성당은 시위대의 유일한 피난처였다. 6월 10일 밤부터 명동성당과 경찰의 대치가 시작된 것이다.

이날 시위에 중산층이 가세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었다. ‘넥타이 부대’ 합류에 대해 세계 주요 언론들은 그 원인을 분석했다. 특히 미국 언론은 비상한 관심을 가졌다. 외신들은 6·10대회의 엄청난 열기와 중산층의 변화에 주목했다. 지금까지 폭력 시위에 비판적이던 시민들이 시위에 동조하거나 지원을 하는 등 놀라운 변화를 보여 주었다. 이러한 상황을 보고 미국 정부는 릴리(James Lilly)주한 대사를 최광수 외무장관에게 보내서 폭력 맞대응을 자제하도록 당부했다. 아울러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시위대에도 공권력 투입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전했다.

명동성당에는 서울 시내에서 시위를 하다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을 피해 쫓겨난 시민, 학생, 노동자 등 수백 명이 갇혀 있었다.

공안 당국은 시위대를 ‘체제 전복 국기 문란 행위자’로 몰았다. 그러나 상투적인 용공타령에 신물이 난 시민들은 농성대에 격려금과 물품을 전달했다. 공권력은 언제 투입될지 알 수 없었다. 이 때 서울대교구청 신부 40여 명이 성명을 발표했다.

“도덕성과 정통성을 잃은 현 정권에 대한 투쟁은 정당하며 사제의 양심으로 농성대를 끝까지 보호할 것이다”

여기에 김수환 추기경의 일갈이 터져 나왔다.

“그 사람들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보게 될 것이고, 나를 쓰러뜨려야 신부님들을 볼 것이고, 신부님들을 쓰러뜨려야 수녀님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은 그 다음에야 볼 수 있을 것이다.”

공안 당국은 결국 신부님들을 만나 협의를 해야 했고, 신부님들은 농성대원들과 협의를 해야 했다. 합의점을 찾아서 농성대는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명동성당을 떠났다. 이 때 김 추기경은 농성대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6·10 국민대회가 6월 항쟁으로 상승·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5박 6일간의 명동성당 농성투쟁과 넥타이 부대 시위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시위는 날이 갈수록 거세졌다. 전국에서 부상자가 속출했으며 최루탄 피해자가 가장 많았다. 이한열군은 국민들의 간절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깨어날 줄을 몰랐다. 국본은 ‘최루탄 희생자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8월 18일 ‘최루탄 추방의 날’ 행사를 갖기로 했다.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 전국에서 150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6·18시위는 전두환 정권에게 위기감을 안겨주었다. 6월 19일 오전 10시 30분 전두환 대통령은 삼군 참모총장, 합창의장 등의 군 수뇌부, 안기부장 등과 대책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시위 현장에 군 병력을 투입하기로 했다. 구체적인 병력 배치 및 파견 계획을 시달했다. 또 다시 유혈사태를 예고하는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그런데 이날 오후 4시경에 이 계획이 취소되었다.

그 배경은 다음과 같이 짐작된다. 첫째, 미국 정부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했을 것이다. 이미 슐츠 미 국무장관과 릴리 주한 미 대사는 “시위가 격렬하다고 해서 군이 출동하는 비상사태는 오지 않기를 바란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둘째, 88올림픽이 족쇄였다.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올림픽을 앞두고 만행을 감행할 수 없었다. 사마란치(Juan Antonio Samaranch)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은 만약 서울에서 소요가 발생하면 개최 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고 밝힌바 있다. 올림픽은 전두환 정권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서 국민을 현혹시켰던 카드였다. 이것이 전두환 독재정권을 꽁꽁 묶어 버렸다. 셋째, 군 내부의 분열이 우려 되었다. 그동안 군이 정치에 개입해 온 것에 대해 반성의 기운도 있었고, 노태우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는 측은 군을 동원하여 시위대를 제압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제2광주 사태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김대중. 김대중 자서전. 삼인. 2010. 516∼521쪽)

전두환의 신경은 6월 26일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에 쏠려 있었다.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겠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지만 6·26대회를 보고 최종 결정을 내리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전두환은 시위를 초기 단계에서 철저히 분쇄해 6·26대회 무력화를 시도했다. 그는 권복경 치안본부장에게 6·26대회를 초기 단계에서 꺾으라고 강력히 지시했다. 이날 여러 일간지가 보도한 바와 같이 이 시위대는 평화적 시위를 유난히 지키려고 했었는데도 경찰의 극심한 폭력적 진압이 난무하게 된 것은 전두환의 지시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국에서 180만 명이 넘게 참가 했다.

미 국무장관 더 윈스키는 6·24일 한국을 떠나면서 “계엄령은 물론 어떠한 종류의 군대 개입도 미국은 반대한다”는 점을 전두환에게 분명히 전했다고 밝혔다.

24일 미 하원 외무위원회 동아시아 태평양 소위원회는 한국에서 진정한 민주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한국 상품에 대한 무관세 혜택 철회 등 경제 보복 조치를 취하기로 한 ‘87년 한국 민주화 법안’을 통과시켰다. 25일 미 하원 외무위원회는 ‘한국의 민주주의 및 안보 증진을 위한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고 한국 정부가 문민화 조치를 단행할 것을 촉구했다. 미국은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을 옹호하여 출범시켰지만 이제는 한국의 민주화를 요구하고 있다. 전 정권의 지지를 철회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이상이 6·29선언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서중석. 6월 항쟁. 돌베개. 2011. 4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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