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느끼면서
가을을 느끼면서
  • 성광일보
  • 승인 2018.09.28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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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천/광진구의회 의원
장길천/광진구의회 의원
장길천/광진구의회 의원

아침에 세수할 때 어디서 날아왔는지 버들잎 한 잎 대야물 위에 떨어진 것을 움켜드니 물도 차거니와 노랗게 물든 버들잎의 싸늘한 감각! 가을이 전신(全身)에 흐름을 느끼자, 뜰 저편의 여윈 화단(花壇)이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예불(禮佛)이 끝나 산사(山寺)를 나와서 수풀 속으로 들어가니 일찍 깬 까막까치의 울음소리! 벌써 연한 빛으로 보이는 단풍의 잎새들도 있었다.

산간마루 중턱에는 마당에 멍석을 깔고, 농부들은 나와 앉아 농사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모깃불이 향불같이 피어오른다.

가을은 서글픈 계절이다.
시들어 가는 풀밭에 팔베개를 베고 누워서 유리알처럼 투명한 하늘을 고요히 우러러 보고 있노라면, 까닭 없이 서글퍼지면서 눈시울이 눈물에 어리는 것은 가을에만 느낄 수 있는 순수(純粹)한 감정이다.

촛불을 끄고 누었을 때에 창호지에 고요히 흘러넘치는 푸른 달빛이며 산들바람이 문풍지를 울릴 때마다 우수수 나뭇잎 떨어지는 서글픈 소리, 깊은 밤에 귀뚜라미 소리에 놀라 잠을 깨었을 때 그 무엇인지 조차 모르는 것이 불현 듯 그리워지기도 하고, 가을볕이 포근히 내리 비치는 신작로(新作路)만 바라보아도 어디든 정처 없는 길을 떠나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는 것도 역시 가을이라는 계절이 무안히 외롭고 서글프기 때문이리라

나는 가을을 사랑한다.
가을은 사람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무엇인가를 갖고 있다.
호젓한 산속을 거닐어 보라.

낙엽(落葉)을 밟으며 단풍진 나뭇잎 사이를 혼자 소요(逍遙) 하노라면 나의 생각은 가을 물 같이 맑아지고, 나의 마음은 정녕코 가을 하늘 같이 그윽해 진다.

꽃치고 정답고 아름답지 아니한 것이 어디 있으리오마는, 나는 꽃 중에서도 가을꽃을 좋아한다. 그 중에서도 들국화를 더 한층 사랑한다.

들국화는 특별히 신기한 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호젓한 산중에 외로이 피어 있는 그 기품이 그윽하고 봄, 여름 다 지나, 가을에 피는 그 기개가 그윽하고, 모든 잡초와 어울려 살면서도 자기의 개성을 끝끝내 지켜 나가는 그 지조(志操)가 또한 귀여운 것이다.

말 없는 가운데 자신의 순결성을 솔직히 보여주는 그 겸손(謙遜)이 더 한층 고결(高潔)하다는 말이다. 깊은 밤의 적막을 가르며 잎이 떨어진다.

짙게 깔린 어둠을 뚫고 생성(生成)과 소멸(消滅)과 환생(還生)의 어머니인 대지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거부하는 몸짓으로 떨어진다는 릴케의 표현은 잘못이다.

체념이 아니라 순응(順應)이고, 죽음이 아니고 시작이며,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무한한 가능의 문이다. 죽음이 두려워 회피(回避)하고 타협(妥協)하고 저항(抵抗)하고 몸부림치다 결국 죽고 마는 인간보다 나뭇잎은 얼마나 지혜(知慧)로운가.

불티같은 수유(須臾)의 이해에 연연하여 아귀(餓鬼)처럼 가축하다 힘없이 꺼져버리는 인간보다 나뭇잎은 얼마나 의젓한가.

이런 의미에서 나는 의식(意識)이 없는 초목(草木)에 까지 불성(佛性)을 부여한 불타(佛陀)의 혜안(慧眼)과 자비(慈悲)에 합장한다.

또 하나의 보리수 잎이 떨어지고, 순응하는 몸짓으로 생명(生命)을 재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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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어린 시절 계룡산 산사(山寺)에서 불도(佛道)를 공부하며 만산이 홍엽(紅葉)으로 물들어가는 가을의 정취에 몸서리치도록 그리워지는 인간 사랑의 애환을 떨쳐버리고자 하는 마음이 이 글속의 낙엽과 들국화 속에 짙게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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