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책임과 실천: 창실지예(倉實知禮)
정치의 책임과 실천: 창실지예(倉實知禮)
  • 성광일보
  • 승인 2019.03.08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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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항석 / 논설위원
정항석 / 논설위원

창실지예(倉實知禮)! ‘먹을 것이 풍족해야 예의를 안다’는 의미로 흔히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속담과 그 뜻을 같이한다. 비단 이러한 말은 옛 성현의 말을 인용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 말의 출처는 <관자管子) 목민(牧民)>편의 첫 문장에 나온다. 목민이라는 용어가 현대에는 어울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속내의 뜻은 표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진정성에서 찾을 필요가 있다.

관중(管仲 또는 管夷吾, 紀元前B.C.725?-B.C.645)은 시기적으로 춘추시대(春秋時代 B.C.770-B.C.403) 제환공(齊桓公)이 통치하던 시대의 재상이다. 당시의 상황은 제후국간의 관계가 ‘술렁이는(?)’ 것으로 이를 만큼 안정화되지 못했다. 따라서 백성들의 삶에 미치는 위기의 기운은 매우 삭막할 수밖에 없다. 경제적 여건이 불안정한 것이다. 위의 주요 어휘는 ‘먹을 것’과 ‘예의’이다. 그렇다면, 이 둘 사이에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우선, 예의(禮義)에 대한 것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좌전(左傳)>에는 ‘주공(周公)이 주례(周禮)를 제정하였다’라고 하였다. 그 핵심은 관계적 질서이다. 그 목적에서 주례(周禮)는 어디까지나 왕권을 유지하는데 있고, 그 내용은 다분히 황제와 제후들 간의 정치적 위계질서를 수립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예’는 사회적 행위를 위한 규범의 표준화를 규정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편에서는 ‘예란 백성을 혼란스럽지 않게 하는 것(夫禮 所以整民也)’이라고 했다. 어찌되었든 ‘예’는 국가 통치의 근본이면서 궁극적으로는 국가전체의 안정을 위한 방법이었던 셈이다. <예기(禮記) 곡례상(曲禮上)>에서도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도덕인의(道德仁義)은 예가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고(道德仁義 非禮不成), 풍속을 선도하는 데 예가 아니면 원만하지 않으며(教訓正俗 非禮不備), 분쟁과 소송은 예가 아니면 해결되지 못하고(分爭辨訟 非禮不決), 정치의 위계 및 법령과 기율의 시행(班朝治軍 蒞官行法) 등 그 위엄과 정성이 이루어질 수 없다(非禮威嚴不行 非禮不誠不莊).’ 여전히 예는 모든 사회적 행위와 관계에서 그 핵심으로 어떤 과정과 절차를 주요 골자로 중심에 두고 있다. 이러한 것은 그 때나 오늘이나 대동소이하다.

주목할 것은 이것이다. 포괄적으로 보면 예를 통해 안정을 기하는 것이다. 관중에게 있어 예(禮)는 도덕적 바탕인 동시에 사회적 안정을 위한 기능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를 실행하기 위한 방편 혹은 근간으로 관중은 <관자(管子) 목민(牧民)>에서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다. ‘무릇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순리에 따라야 하며 생산된 곡식을 잘 저축해야 한다(守在倉廩). 그렇게 해서 국가가 부유하면 다른 나라 백성들도 옮겨오게 되고(國多財 則遠者來), 땅을 개간하면 백성들이 머물러 살 수 있다(地辟舉 則民留處). 창고가 가득 차게 된다면 사람들이 예를 알 수 있다(倉廩實 則知禮節). 따라서 의식이 족하면 사람들에게 영욕을 알게 할 수 있다(衣食足 則知榮辱).’

<예기>와 <관자 목민> 등 위의 내용은 거의 흡사하다. 인용된 곳에서 눈에 띄는 것은 첫 화두가 경세제민(經世濟民)이다. 제(濟)는 빈곤이나 어려움에서 건져내는 것을 이른다. 경제가 정치의 핵심이라는 것의 역설이다. 이를테면, 경제는 곧 예로 이어진다. 그리고 i) 순리에 따라 ii) 국민들과 같이 한다는 암묵적 언급을 전제로 한다. 정치의 우선적 조건은 국민이 먹고 사는 데 기본적인 것을 충족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환기시키고 있다. 환란은 그곳에서 오는 것이며, 무질서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서민들이 느끼는 경제는 어떠한가? 단기적으로라도 안정을 기대할 수 있는가? 우선 밖에서 하는 소리를 들어보자. 희망적이지 못하다. 예를 들어, 국제무역경제단체(예, Trading Economic)와 경제협력기구(OECD Economic Outlook)는 한국의 실질 예상 성장률(GDP Annual Growth Rate)을 2.8%로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이후의 전망치는 다르다. 국제금융기구(IMF)에서는 2020년 전망치를 2.8%로 거의 같이 예상하고 있지만 그 이후에는 추이는 비관적이다. 게다가 한국의 경제에서 발전 동력의 주요 축이었던 국제유가는 민감한 요인이다. 상회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2019년 2월 글로벌 벤치마크인 브렌트유(배럴당 66달러, 5% 이상 인상)는 그렇다 하더라도, 3월 인도분 미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은 전일 대비 2.2% 상승하여 배럴당 55.59달러로 거래되는 등 변동의 폭이 크게 뛰려는 양상이다. 이외에도 국제무역규제 및 협상내용은 급변하여 환율, 금리 등 주요 거시변수의 변동성이 크게 확대되고 있다. 일언하면, 투자를 할 빌미(?)를 제공할 요인과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그렇다면 안의 사정은 어떠한가? 환경적 요인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여도 단기적 소득지원 정책을 통해 이전소득을 위한 대책이 미봉책으로 느낀다면 어떨까? 어떠한 실질소득의 증가가 없는 상황에서 그러한 효과는 부실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안의 상황이 그렇다. 임금소득격차, 시중금리, 1,500조원을 넘어선 가계부채 등은 서민경제의 소득대비 소비여력이 개선되기가 힘든 실정이다. 저성장의 장기화에 대한 우려는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2018년도 상반기 투자는 2% 수준으로 급감했고, 취업자 수는 연평균 30만 명(?)에서 수천 명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러한 수치는 2010년 성장률이 6.5%이었던 이후 계속 하향 추세이다. 이것의 반전을 위해 도박에 가까운 모험에 의존하기도 했다. 경제개선을 기대한 것과 달리 했던 이명박 정부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후 줄곧 한국의 경제구조가 개선되지 못했거나 낙관적 기대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비단 그 특정의 정부에 모든 것을 걸 수 없는 반증이다. 그런데 여전하다. 2019년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대한 경제에 대한 전망은 한마디로 비관적이다. 미래는 알 수 없지만 현재의 것으로 추정한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없거나 안 되는 것을 억지로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보자. 2019년도 정부 예산안이 전년도에 비하여 9% 이상 증가되었다. 이는 세계 금융위기 있었던 2009년의 10.6%을 제외하면 최고의 증가율이다. 이러한 데는 까닭이 있을 수 있다. 빚을 내서라도 개선의 동기를 유발시켜야 한다. 그런데, 그 상황의 반전을 위한 것이 한쪽으로 쏠림 되어 있다면 분산투자가 정답은 아니더라도 국민들에게 기대감을 가지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무엇보다 현 정부에서 눈에 띄는 정책은 단연 남북관계이다. 2017년 국정감사 당시 대북차관은 약 총액 1조 3백억 원정도로 추산되었다. 그리고 2019년도 대북관계에 드는 예상비용은 5천억 원 미만으로 편성되었다. 이 예산의 일부는 개발원조(ODA)의 형식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다. 또한, 남북관계로 인한 국가적 비용을 고려하면 이에 정부의 집중을 나무라는 국민은 없다. 게다가, 들인 비용 역시 분단에서 오는 총체적 비용에 비할 것은 아니다. 다만, 쏠림과 관심의 정도이다.

반복되지만 주목할 것은 이렇다. 일반서민은 물론 중소기업의 경제사정은 그야말로 힘들다는 표현으로도 모자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예산은 해마다 오르는데 청년실업은 만연되어있고, 서민의 경제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무슨 일이라도 해서 먹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향후 중단기적으로도 서민은 그 기대에 대하여 한국경제를 불신한다는 데 있다. 적어도 희망이 보여야 하는데 과연 노후연금에 대한 대책을 세운 서민이 얼마나 있는가? 요즘 회자되는 것은 ‘오늘은 이렇다 치고 내일은 어떨까?’ 딱 그것이다. 이는 진보와 보수 등에 대한 같지 않는 볼멘소리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소규모로 이루어진 중소기업을 포함하여 자영업은 전체 고용의 25%를 차지하는 일자리 창출의 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정책은 희박한 기대에 걸려있다. 말하자면, 한국 경제의 바탕적 보루인 서민 밑바탕 경제가 몹시 위태로운 것이다. 이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중적(重積) 증세(症勢)이다.

그렇다면 춘추시대 관중의 언급을 다시 들어보자. 흥미로운 것은 그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제나라를 패국으로 성장시켰다는 데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그를 주목해야 하는 것은 따로 있다. 그 동안 유교적 습성에 젖어 그의 사상이 주시되지 못하고 있지만, 적어도 한번이라도 우리는 그를 주목해야 하는 것은 ‘경제적 상황이 문화와 예술 등을 포함하여 사회적 질서를 안정적으로 성취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이다.

딴은 이렇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나, 요즘은 정국의 상황에 따르면 야당은 정부를 비난하는데 여념이 없다. 정치적으로 그리고 사상적으로 ‘불온’을 운운하고, 여당과 정부는 이에 대한 정치적 표현에서 그 수위를 조율하는데 골몰하는 양상이다. 그럴 만하니까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이를 바라보는 서민들의 시선은 실망이라는 단어로는 못 다 이른다. ‘이를 아는 지 아니면 모른 체하는지’는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다. 2700여년의 사람이 말한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지만, 귀을 더 세워 들어야 할 것은 i) 순리에 따라 ii) 국민들과 같이 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정치의 우선적 조건은 국민의 경제적 기본적 여건이 희망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경제 어려움과 책임을 어느 한 정부에게 떠넘길 것은 아니다. 해야 할 것은 이렇다. 지난 10년 동안 정부의 교체 등 정책변화는 있겠지만 적어도 우리는 안에서라도 얻을 교훈을 산출해야 한다. 첫째,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다. 특히, 정권획득이후 치우치는 정치시스템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없이 관중이 언급한 예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 둘째, 기아(飢餓)의 상황은 아니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없다면 서민들이 가야할 좌표를 상실하게 한다. 이농의 증가와 불균형적인 국토이용 그리고 중소기업과 자영업이 제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다면 서민들의 삶은 팍팍할 수밖에 없다. 셋째, 어떻게 보면 적어도 지난 10년 동안 어려운 서민 살림을 졸라매어 국가살림을 해왔다는 것으로 비친다. 과연 옳은 것인가? 심각하다. 결론적으로 서민은 ‘예’를 차리고 싶다. 최소한의 희망을 담은 청사진의 뒷받침 없이 안정적 ‘예’를 기대할 수 없다. 오늘도 정치가에서 고민하고 책임을 느끼며 실천할 일은 이것이다. 어제와 오늘의 실패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내일의 실망은 더 이상 안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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