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책임과 실천: 사무부치(事無不治)의 당무(當務)
정치의 책임과 실천: 사무부치(事無不治)의 당무(當務)
  • 성광일보
  • 승인 2019.03.25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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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부치(事無不治)!

정항석 / 논설위원
정항석 / 논설위원

<맹자(孟子) 진심(盡心)>에 출처를 두고 있는 이 말은 ‘일(當務)은 하는 것이지 정치적 통치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다. 내용의 요지는 이렇다. 할 것과 하지 않을 것을 구분해야 한다.

기실, 이것을 가리는 것이 얼마나 용이할지 판단하기란 수월하지 않는다. 일을 하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이다. 익히 아는 바와 같이 유가(儒家)에서는 성정을 질(質)이라고 여긴다. 배움과 가르침을 통해 그 순수의 감성이 긍정적으로 나타나는 오성(悟性)이 문화적 동질성으로 향하는 것을 문(文)이라 한다. 그리고 질은 살아가면서 변화와 지속을 겪는 바, 본디의 선한 상태를 위해서는 끊임없이 되돌아보게 하는 후천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나아가, 그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의 문화도 실천의 수준에 따라 문명적 성격을 내포할 수 있는지가 결정된다. 그 범위에서 매우 포괄적이나, 그 의미의 확장성은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표현은 <장자(莊子)>의 여러 곳에서 그리고 공맹(孔孟) 이전에도 이러한 경구(警句)의 문장은 수천 년부터 전해진다. 물론 접근의 해석에 따라 변화될 수 있지만, 이는 동서양의 사상과 철학의 전제로 삼았던 것으로 별 이의가 없어 보인다.

묻는다. 무엇을 위해 질(質)과 문(文)을 가리는가? 그리고 배우고 익히면 끝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공무(公務)를 위한 경중(輕重)과 당무(當務)는 어떻게 분리할 수 있는가? 이러한 것에 따라 무엇을 가려서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맹자 진심>편에서 우선 해야 할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안다고 하는 것은 (할일을) 모르지 않는 것은 이른다. 급한 정도를 (딱) 맞추는 것을 말한다(知者無不知也 當務之爲急).’ 이같은 의미는 다음의 구절에서도 곧바로 반복된다(然常以所當務者爲急). 그리고 그 맺음은 매우 간결하다. ‘따라서 일(事)을 한다는 것은 다스리는 것이 없어야 하는 바 그것을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則事無不治 而其爲知也大矣)’. 즉 당무(當務)이다. 이를테면 모든 일에는 경중이 있고 순서가 있다는 것을 일러준다. 덧붙이자면 이렇다. 먼저 할 일을 못 챙기면 나중에 그 때문에 덧나는 것이 파생될 수 있다.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수백년 혹은 수천년 전에 살았던 이의 말을 빌려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도 그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는 국민의 뜻을 존중하여 따라야 하는 제도적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선천의 품성으로써 그 질(質)을 따지자면 한국사회는 얼마나 선한가? 그리고 그 선함을 덧붙이고 지속하기 위한 문(文)의 노력과 그 결실은 얼마나 실(實)한가? 그리고 국가의 일 중에서 안정적으로 국민들에게 마음을 결집할 일을 하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2019년은 건국 71주년을 맞는다. 5.10 총선거로 구성된 제헌 국회가 1948년 7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한 기준에 따른 것이다. 해방 74년 째 되는 해이며 분단 69년(1950년 기준) 째 되는 해이기도 한다. 일년의 가감은 있겠지만 그렇다. 어찌되었든 국사(國事)에서 어느 정부는 어떤 특정의 일(務)에 치중하고 경중을 가려왔다. 그로 인하여 이만큼 왔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다만, ‘해야 할 일을 놓치고 왔던 것은 없는가’ 그리고 ‘그 때문에 국민적 분열과 갈등의 원인이 잔존하는 것은 아닌가’를 당무의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 그것들 중에는 70여년 전에 해야 할 일을 못했던 것에서 찾아야 한다. 동족을 배반하고 동족에게 하였던 ‘몹쓸 짓에 대한 청산’이 그것이다. 해방이후 그리고 분단과정에서 파생된 문제가 여전히 우리 사회를 곪게 하는 탓이다. 아픈 상처를 참는 것은 한계에 이르러 인내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이제 그 곪은 것은 해결해야 한다.

더러 아니 종종 ‘촛불과 노란 색’을 그들의 아이콘으로 삼는 상당수의 국민들 그리고 태극기와 무궁화를 상징물로 내세워 세력화되는 국민들의 모임에 관한 언론의 보도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그 수에서는 많으나 국민 전체의 숫자로 보면 몇몇이고 일부일 것이다. 그리고 가시적인 것은 사회적 파장을 크게 일으키는 이들의 주장과 입장이 나름대로의 주장과 설명력을 보유하고 있다. 질(質)은 몰라도 문(文)의 측면에서 무언가를 익히고 배웠다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하지만 미래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염려스럽다. 다분히 갈등의 양상이기 때문이다. 근원에서 무엇보다 해방이후 반민족 청산의 미해결과 분단과정에서 생성된 갈등의 문제와 닿아 있고, 나아가 그것들이 우리 사회의 암적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근심을 지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툭’ 하면 ‘촛불부대’ 또 ‘툭’ 하면 ‘태극기 부대’라는 눈살찌푸리게 하는 표현들이 부정적으로 여론에 비춰질 것이 아니다. 산발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제도권에서 격렬하되 건전하고 생산적이며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서 그들의 이견을 좁히는 것이 옳다.

동시에 알아야 할 것은 이렇다. ‘무조건 너희들이 싫다’는 여하한 표현은 안 된다. 할 일도 아니거니와 할 것이 못되며 할 짓(?)이 아니다. 분열을 조장하는 몰국가적 그리고 비사회적 행위이다. 무엇보다, 대한민국이 전혀 다른 민족들끼리의 연합체가 아닌 까닭이다. 헌법 전문에서 1919년 상해 임시정부를 우리가 ‘정신적으로만’ 계승한다는 제헌의회의 선언을 승계한다고 하여도 우리는 안다. 건국이전의 역사는 우리의 것이라는 것을! 이는 단순히 한반도의 지리사만을 한정적으로 배우지 않은 것과 같다. 정신적이건 아니면 실체적이건 건국이전의 영광과 상처가 단지 지리적 자취를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보듬고 가야할 것들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미래 세대에게 이전의 세대들이 저질렀던 상흔을 대물림하게 해서는 안된다. 시간의 순서적 시각에서 보더라도 해방이후의 반민족적 행위를 청산하고 그 다음 분단의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옳았다. 누가 언급했건 간에 ‘사무부치(事無不治)의 당무(當務)’에서 오는 그 교훈의 가치는 일의 순서에서 무엇을 먼저 해야 할 것인가를 가리는 것이다.

삼면이 바다이면서 좁은 반도에 밀려 자리잡고 살아온 세월 속에 한겨레의 흔적이 그냥 덧없이 지나쳐온 그 험난했던 풍상이라 하여도 우리가 다같이 할 수 있는 사회적 약속을 져버리면 훗날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 누가 ‘국가를 구하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한겨레의 타고난 성품이 매우 선(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적어도 국민의 대다수가 고등교육과 평생교육으로 익혀온 문화의 국민들이다. 이제는 익힐 만큼 익혔으니 제대로 그 배움을 실천할 때가 아닌가! 그것이 아니라면 본받아도 된다. 예컨대 앙리 필리프 베노니 오메르 조제프 페탱(Henri P. B. O. Joseph Pétain 1856-1951)은 제1차 세계대전 때의 무훈으로 한때 프랑스의 영웅으로 칭송되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협력하여 ‘공공의 적’으로 지목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영웅로서의 칭송(Hero of France)’과 ‘공공의 적(guilty and condemned to death)’으로 그 공과를 가린 것이다. 왜 프랑스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반복하자면 이렇다. 사무부치(事無不治)의 당무(當務)의 시각에서 보자. 해방 73년, 분단 70여년이니 순서로보면 친일매국의 문제를 매듭짓고 분단의 문제를 그 다음으로 풀어야 한다. 동시에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이것이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우선적으로 가려야 하는 것이다. 하여 일의 순서에서 ‘진보(?)’이니 ‘보수(?)’이니 할 것 없이 ‘친일매국의 문제부터 해결하라’는 목소리를 온 국민의 이름으로 요구해야 한다. 노파심이지만 사무부치의 교훈 하에 정치적 요소는 배제되어야 한다. 고민 할 것 없이 매우 간결하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당무(當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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