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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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광부 기자
  • 승인 2019.03.26 10: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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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고전13:6) 2019.03.26

(2019.2.15 창경궁 춘당지) 사진: 김광부 기자
(2019.2.15 창경궁 춘당지) 사진: 김광부 기자

“선조가 피난길에 오른 직후, 서울의 난민들은 임해군의 저택을 비롯하여 왕자들의 궁을 불질러 태워버렸다(중략).  선조는 피난길에 오를때 임해군을 함경도로 들여보내면서 근왕병을 모으고 민심을 수습하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그는(중략) 동생 순화군과 함께 회령에서 일본군에게 포로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중략).  그는 당시 회령으로 귀양을 와 있던 아전 국경인(鞠景仁)에게 포박 되어 일본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加蘇淸正)에게 넘겨졌던 것이다.”

한명기 저(著) 「광해군」 (역사비평사, 55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임진왜란 때,  선조는 왕자인 임해군에게 근왕병을 모아 민심을 수습하라고 하였지만,  임해군는 국경인에게 포박되어 왜군에게 넘겨졌습니다.  이는 국경인이라는 개인의 반역으로 볼 수도 있지만,  왜란을 통해 드러난 조선 사회의 모순을 상징하는 사례였습니다.

지도자인 왕과 왕자들은 백성의 신임을 얻지 못했습니다.  특히 임해군에 대한 민심은 바닥을 쳤습니다. “임해군은 의롭지 못한 짓을 많이 하여 백성의 땅을 빼앗는 등 죄악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갑진만록(甲辰漫錄)」

“임해군 진은 교만하고 음란한 짓을 멋대로 하여 불의(不義)한 짓을 많이 저질렀다.  희서는 재신인데도 도적을 시켜 살해했고 하원 부인은 백제(伯餘)인데도 모욕을 가했으니,  왕법(王法)이 시행되었다면 당연히 형장(刑章)을 받았을 것이다.”  「선조수정실록」37년(1604) 3월 1일.

임해군 뿐이 아닙니다.  선조는 한양이 수복되고 일본군이 남쪽으로 내려간 뒤에도 의주에서 돌아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의 반란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최고의 덕목은  ‘섬김’과  ‘신뢰’입니다.  

섬기지 않고 군림하려 하면 왕이 아니라 폭군입니다.  사람이 신뢰를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이고,  신뢰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입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마23:11)

 

한재욱 목사
강남 비전교회
서울시 강남구 삼성2동 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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