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분단과 역대 정부의 대북 정책(1)
한반도 분단과 역대 정부의 대북 정책(1)
  • 성광일보
  • 승인 2019.05.28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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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길랑 / 비젼경영컨설팅 원장

「한반도 분단과 역대 정부의 대북 정책」

제1장 제2차 세계 대전과 한반도 분단

제1절 제2차 세계 대전의 원인

Ⅰ 대공황

세계를 지배했던 영국이 제1차 세계 대전으로 큰 피해를 입어 세계의 지배권을 잃었다.

그 뒤를 이어 미국이 세계 경제의 중심 국가로 부상하였다.

미국은 1920년대에 세계에서 최고의 번영을 누리고 있는 국가였다. 국민들의 생활도 높은 수준에 달했다. 미국의 기업들은 유렵과 일본 등 아시아 국가에 상품을 판매하고 자본을 투자하여 막대한 이익을 취했다.

1929년 뉴욕 증권거래소 회장은 주식 투자를 통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확인하였다.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 대통령은 1929년 3월4일, 취임사에서 “나는 미국의 장래에 대해 조금도 우려하지 않는다. 미국의 장래는 희망에 가득차 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7개월 후인 1929년 10월부터 대규모 경제적 붕괴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식 시세는 폭락하여 경제 전반을 위축시켰다.

1. 대공황 초래 원인

대공황을 초래한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명확하게 드러난 원인은 첫째, 생산 시설의 과잉 투자에 따른 소비재의 과잉 생산, 둘째, 규제 받지 않은 불건전한 금융 및 은행의 제도, 셋째, 생산 설비에 과잉 투자된데 비해 노동자의 임금은 조금밖에 오르지 않아 생산 대비 소비가 따라주지 않았다. 넷째, 공급이 수요를 창출 한다는 공급 경제학을 과신한 탓도 있다.

자유방임적 자본주의 경제의 결함이 결국 1929년 10월 24일, 뉴욕 증권거래소 주식 가격의 폭락을 가져오면서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기업은 파산하고 노동자들은 해고당했다.

2. 미국의 대공황 상황

실업자 발생 상황을 보면 1929년부터 1931년까지 6백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했고 1932년까지 무려 1천 2백만 명의 남녀 미국인이 실직자가 되었고 다시 1933년 3월까지 1천 3백 50만 명으로 증가했다.

기업 활동도 침체 되었다. 제조업의 생산량은 1929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1932년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공장의 조업률은 20%에 불과했고, 피츠버그 제철공장들은 조업률이 12%에 불과했다.

1933년 3월 초에는 2개 주를 제외한 모든 주의 은행들이 문을 닫았다. 금융 공황이 절정에 달한 순간이었다.

모든 곡물 시장과 증권 거래소는 폐쇄되었고, 뉴욕시와 시카고에서는 ‘기아의 행진’이 벌어졌다.

1920년대 말 경 절정을 이루었던 경제가 급속하게 쇠퇴하면서 많은 미국 국민들은 불안과 불확실성에 사로 잡혀 있었다. 1933년까지의 실업자 수가 1천 3백 50만 명으로 늘었다. 특히 경제 불황이 심했던 도시의 상황은 심각했다. 자선 단체가 베푸는 무료 급식소 앞에는 굶주린 사람들이 장사진을 쳤고, 집세를 내지 못해 쫓겨난 사람들이 수천 명씩 빈터에 웅크리고 있었다. 집이 없는 사람들은 포장용 상자 조각을 모아 움막을 만들었다.

유아 사망률은 급격히 높아졌고, 뉴욕시 보건국은 아사(餓死)를 새로운 사망 유형으로 잡아 놓을 정도였다. 급기야 1백만 명 이상의 주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미국 전역을 방황하기에 이르렀다.

후버 대통령은 정부의 행정력을 동원하여 경제를 일으켜 보려고 노력했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후버 대통령 정부를 무능한 정부로 비판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1929년 3월 4일 취임 연설에서 “나는 미국의 장래에 대해 조금도 우려하지 않는다. 미국의 장래는 희망에 가득차 있다”고 했던 취임 연설이 무색해졌다.

수많은 미국인들은 어떠한 경제 정책의 효력으로써 불황이 종식되기를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불황은 금융 파탄뿐만 아니라 개인의 긍지와 자존심의 상실이라는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많은 미국인들은 신속한 대책을 요구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 경제에 의존하고 있었던 유럽 및 아시아 지역의 기업들은 대공황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세계 각국은 미국으로부터 자금 유입과 미국으로의 상품 수출에 기대어 경제를 발전시키고 안정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의 자금과 시장을 잃게 되면서 이 국가들도 경제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29년부터 1932년 사이에 세계 무역은 60%이상 감소하였으며 전 세계적 실업자 수는 약 5천만 명에 달했다. 1

Ⅱ 대공황에 대한 각국의 대응

1. 대공황의 극복 방법

1929년 미국발 대공황을 극복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하나는 미국·영국·프랑스처럼 국가가 시장 경제에 개입하여 과잉 생산과 과소 소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고, 또 다른 방법은 이탈리아, 독일, 일본처럼 전체주의 정책과 대외 침략을 통한 방법이다. 이들 나라들은 미국과 같은 나라들에 비해 자본주의 경제 기반이 취약하였으며 경제 블록을 묶을 수 있는 지역도 많지 않았다.

따라서 사회 간접 자본에 대한 투자보다는 군수 산업에 대한 투자로 과잉 생산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러나 이들 국가에서는 군수산업 분야에 투자한 이윤을 실현시키는 것이 또 다른 문제로 등장하였다. 2

2. 미국의 대응

가. 루즈벨트 대통령 당선과 뉴딜 정책

1932년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공화당의 현대통령 후버와 민주당의 프랭클린 델라노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민주당 루즈벨트 후보가 선거인단 투표 결과 472:59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루즈벨트의 당선은 경제를 구하라는 국민의 명령이었다.

루즈벨트의 취임 연설은 실의에 빠진 미국에 희망을 불어 넣었다. 신임 대통령은 고무적인 목소리로 실업을 종식시키고, 농민을 지원하며, 경제를 회복시킬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겠다고 다짐했다. 강력한 루즈벨트의 연설은 국민에게 자신감과 신뢰감을 심어주었다. 3

나. 대공황에 대한 대응

루즈벨트 대통령은 대공황을 타개하기 위해 뉴딜(New Deal)정책과 중남미 국가들과 선린 외교를 통해 중남미 국가들을 상품 시장으로 활용했다. 뉴딜 정책은 경제 부흥과 사회보장 증진 정책이다.

1933년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인위적으로 수요를 만들어 내지 못하면 공황에서 탈출할 수 없습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해서 투자를 늘려야 합니다.

공공 투자를 확대해 일자리를 늘리면 시민들의 호주머니에 돈이 생길 것이고 그들은 물건을 사려고 상점에 몰려들 것입니다. 그러면 문을 닫았던 공장들이 생산을 재개할 것이고 그에 따라 취업문이 넓어질 것입니다.”

이 한 통의 편지는 대공황으로 존망의 기로에 선 미국 경제를 살리는 계기가 된다. 당시 실물 경제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을 금기시 하던 때였고 전통적인 자유주의 경제학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미국 경제를 공황에서 구하고 세계 경제사의 흐름을 바꿔 놓는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은 케인즈가 보낸 한 통의 편지에서 시작되었다. 4

루즈벨트 대통령은 자유방임적 자본주의 경제의 결함을 수정하고, 금융과 실업 및 물가 등 시장 경제의 전반에 걸쳐 강력한 국가 통제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루즈벨트는 뉴딜 정책으로 생산을 조절하고, 테네시 강 계곡 개발 공사(TVA : Tennessee Valley Authority) 등으로 고용 증대를 꾀하였으며, 최저임금제와 사회 보장제의 실시 등을 통해 노동자의 권익을 보장하였다.

뉴딜의 주요 정책을 요약하면 첫째, 농업 보조금 정책을 들 수 있다. 주요 농산물의 과잉 생산을 제한하고 농민에게 보조금을 지급했다. 둘째, 테네시 강 유역개발이다. 초대형 댐 건설로 일자리를 창출하고, 완공 이후 홍수 조절, 수력 발전, 환경 조성 등의 역할을 했다. 셋째, 와그너 법을 제정했다. 노인, 유족, 실업자, 산업 재해, 의료 서비스 등을 지원하기 위한 공공부조 체제를 시행했다. 다섯째, 공공사업 진흥 정책을 시행했다. 교량, 고속도로, 공원 등 대규모 토목 공사로 건설 노동자 고용 및 각종 예술가 지원 등으로 약 800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였다.

또한 루즈벨트는 중남미 국가들에 대해 종래의 강압적인 자세를 버리고 선린 외교 정책을 펼쳐 이 지역을 미국의 상품 시장으로 활용하였다.

뉴딜 정책으로 미국의 경기는 두드러지게 회복되었고 세계 경제의 재건에도 크게 기여 하였다. 5

3. 영국의 대응

영국은 유럽의 어떤 나라보다 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였고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세계를 지배하였으며 미국과 가까운 나라로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였다. 당연히 미국의 대공황은 영국에 큰 타격을 주었다. 영국도 미국과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공장의 조업률이 떨어지고, 공장이 문을 닫고, 실업자가 폭증했다. 앞에서 미국의 실업자 100만 명 이상이 일자리를 찾아 미국 전역을 정처 없이 방황하기에 이르렀다고 지적했는데 영국도 별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어느 실업자가 직장을 찾기 위해 등에다 다음과 같이 써 붙이고 직장을 찾아다녔다는 것은 영국의 실업 상태를 말해 주고 있다.

“나는 3가지 일을 할 수 있고, 3개 국어를 구사하고, 3년 동안 전쟁에 참가하였고, 3명의 아이가 있고, 그리고 3개월 동안 실직 상태에 있다. 그러나 나는 단지 한 개의 일자리를 원한다” (I KNOW 3 TRADES, I SPEAK 3 LANGUAGES, FOUGHT FOR 3 YEARS, HAVE 3 CHILDREN, AND NO WORK 3 MONTHS, BUT I ONLY WANT ONE JOB) 여기서 실직자의 간절한 구직을 알 수 있다.

실업률의 증가는 과도한 실업 보험의 지출을 초래하여 국가 재정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노동당 출신 맥도랄드 수상은 거국 내각을 구성하고 국가 재정의 삭감, 공업과 농업의 생산량을 조절하는 등의 정책을 단행하여 공황을 타개해 나갔다. 또한 1932년 7∼8월 영국과 영 연방의 각 자치령 정부는 캐나다 오타와에서 영 연방 경제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이들은 쌍무 무역에 조인하였다. 영국은 자치령 상품들의 면세 수입에 동의했고 각 자치령도 영국 상품의 관세를 내리거나 아예 면세를 하기도 했다. 보호 관세를 중심으로 하는 배타적 경제 블록을 만들어 대공황을 타개해 나갔다. 6

4. 프랑스의 대응

산업 혁명 이후 일찍 공업화를 이룬 프랑스는 영국 못지않은 제국주의 국가였다.

식민지 보유도 영국과 자웅을 겨룰 정도였다. 미국의 대공황은 프랑스에 큰 타격을 주었고, 그 정도는 영국에 못지않았다.

프랑스에서는 대공황으로 인한 민심의 동요가 심했다. 이 틈을 타 각종 우익 단체의 활동이 활발한 가운데, 좌파 중심의 인민전선이 설립되었다. 인민 내각은 극단적인 우익 단체를 해산해 정치적 불안을 해소하고 주 40시간 노동제의 실시와 단체 교섭권의 확립 등으로 노동자의 생활 개선을 추구했다. 또한 영국처럼 식민지 국가들과 경제 블록을 형성해 대공황에 대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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