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분단과 역대 정부의 대북 정책(2)
한반도 분단과 역대 정부의 대북 정책(2)
  • 이원주 기자
  • 승인 2019.06.11 19: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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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길랑 / 비젼경영컨설팅 원장
명길랑 / 비젼경영컨설팅 원장

Ⅲ 전체주의 대두와 대공황 대응

1. 이탈리아의 대응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는 파시즘으로 다스리는 이탈리아 국가의 절대적인 본성을 설명하려고, 토탈리타리오(totalitario)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그 정의(定義)는 “국가 내에 모두가 있고 국가 밖에는 아무도 없으며, 아무도 국가에 저항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다.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경찰·군대·교육·언론·출판·집회의 자유 모두 통치자에 복종하며 통치자는 이들의 복종을 통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파시스트의 경우 그 목적이 국수적인 성격을 띤다. 예를 들면 무솔리니는 과거 로마제국의 영광을 찾으려 했다.

이탈리아는 가난한 나라였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경제적인 어려움과 정치적인 불안으로 계층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고물가 고실업은 노동 운동의 격화를 불러와 사회가 불안의 늪으로 빠져 들었다. 여기에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승국인데도 무엇 하나 제대로 얻지 못한 것 때문에 민족주의 정서가 격양되었다.

여기서 통치계층이 파시즘과 결합된 길을 택하게 된다. 이 파시즘 정권을 세운 사람이 무솔리니였다. 무솔리니는 파시스트당을 결성하고 사회당의 이탈자와 참전군인, 소시민층을 규합하여 작은 조직으로 처음에는 중소 시민 계층의 이익을 대변했다. 그러다가 독점자본가 봉건 잔재 세력과 권세가들의 편에 선다.

1921년 11월 7일 파시스트당이 로마에서 거행한 제3차 대표회의는 당명을 '전투적인 이탈리아 파시즘'에서 '파시스트당'으로 바꾸고, 무솔리니를 당 지도자로 선출했다. 이 대회에서 통과된 강령에 따르면, 파시스트당은 전통적인 의회국가를 포기하고 로마제국의 패권을 회복하겠다고 되어 있었다. 대내적으로는 전체주의 통치의 실현, 대외적으로는 침략을 통해 파시즘 정권을 세우겠다고 밝혔다.

무솔리니는 정권 탈취를 위해 파시스트당의 조직을 군사화하여 당 전체를 병영화 했다. 정부의 질서를 빙자해 테러 활동을 강화하고 지방 정권을 탈취하였다. 1922년 10월 27일, 3만 명의 파시스트 행동대원이 세 방향으로 나뉘어 로마로 진군했다. 10월 29일 국왕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를 총리로 임명하고 내각 구성원을 부여했다. 10월 31일 무솔리니가 제1기 파시즘 정부를 구성하면서 파시스트당이 정치의 중심이 되었다. 정권을 잡은 후 숱한 테러를 일으켜 1929년 이전에 무솔리니는 당과 정부, 군대 등의 전권을 장악했다(1922)

1929년, 미국발 대공황의 경제 위기는 이탈리아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경제 문제 해결은 무솔리니의 당면과제였다. 원료 및 소비시장을 확보하고 파시즘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전쟁에서 출구를 찾으려 했다. 그래서 주변 지역에 대한 침략을 감행하여 알바니아를 보호국으로 삼았으며 자연자원이 풍부하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아프리카 에티오피아를 생각했다.

무솔리니는 1935년 12월 5일 에티오피아를 기습 점령했다. 이탈리아가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외 침략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의 타협정책과 미국의 중립 속에서 군사적으로 우세했던 이탈리아가 1936년 에티오피아를 합병했다. 그리고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9

2. 독일의 대응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 독일은 외채가 쌓여 있는데다가 민생 경제도 어려운 처지였다.
1929년 미국발 대공황의 경제 위기는 독일에 심각한 타격을 안겨 주었다. 역사상 유래가 없는 국난을 맞은 독일은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상태였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경제적으로 위기에 처한 독일을 구할 능력이 없었다. 1929년에서 1933년까지 정권이 4차례나 바뀌었지만 재정적 어려움과 정치적 난제들을 극복하지 못했고 사회적 불안이 계속 되었다. 왜나햐면 민주주의가 제대로 착근하지 못해 자기 조절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파시즘이 고개를 내밀었다. 독일 파시즘 정당의 정식 명칭은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당'으로 바로 '나치스'라고 불렀다.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는 제1차 세계 대전 후 패전국 독일을 상대로 체결한 베르사유-워싱턴 체제가 독일에 가한 제재에 대해 불만이 컸다. 여기에 유래가 없는 경제 위기는 독일 국민들의 불만을 키웠다.

히틀러는 이를 이용해 '생존 공간론'과 '종족 우열론'을 부르짖었다. 즉 유대인을 멸종시키고, 게르만족에게 유럽의 통치권을 부여하려고 했다. 또 '지도자 원칙'의 독재 정치를 제창하고 사회주의를 공격했으며 독일의 과거 영광을 되찾자며 대대적으로 선동했다.

나치스는 1930년 9월 선거에서 제2당으로, 1932년 7월 선거에서 제1당이 되었다. 1933년 11월 나치스는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정권을 잡았고, 히틀러는 독일 총리에 올랐다. 1933년 1월 말, 힌덴부르크에게서 내각 구성을 명령받았다.

1933년 2월 27일 밤, 나치스는 의사당 방화사건을 일으켰다. 나치스는 공산당에 책임을 물으며 가혹하게 탄압했다. 히틀러는 정치일체화를 추진하고 다른 정당의 정치 활동을 금지시켰다. 군대의 일체화정책을 실행하면서 당·정부·군대의 권력을 잡았다. 1934년 8월 1일, 히틀러가 조직한 국회는 '독일국 원수에 관한 1934년 8월 1일의 법률'을 통과시켜 원칙적으로 대통령과 총리를 하나로 통일시켰다. 이것이 바로 총통제이다. 그 다음 날 힌덴부르크가 세상을 떠남으로서 히틀러는 국가 원수가 되었다.

히틀러가 경제 문제를 해결하고 정치를 안정시킨다는 명분으로 권력을 향해 질주했지만 나치스가 정권을 장악했을 때 세계 경제 위기는 어느 정도 누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독일은 베르사유체제에서 벗어나야 했다. 또 새로운 생존공간 확보와 유렵의 맹주가 되려는 목적이 있었다. 이를 위해 나치스는 경제와 사회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강화하면서 군사적 확장과 전쟁 준비를 착수했다.

3. 일본의 대응
1929년 미국발 대공황을 일본은 어떻게 극복했을까? 일본도 이탈리아와 독일처럼 외국 침략을 통해 대공황의 경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明治)유신을 이룬 후 조선의 대원군 정권에 대해 자기들의 임금을 황상(皇上)으로 칭하면서 수교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정한론(征韓論)이 대두했다.

그러나 당장 침략해 오지 않았다. 대원군이 물러난 후 운양호 사건을 일으키더니 1910년 8월 29일 결국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았다. 힘에 의한 침략이었다.

유럽이 제1차 세계 대전의 수렁에 빠졌을 때 일본은 호황을 누렸다. 전쟁으로 인해 유럽이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수출하던 막대한 양의 면직물을 생산할 수 없게 되자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은 일본산 면직물을 수입하게 됐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특수를 누렸던 미국이 일본산 생사를 대량으로 수입한 것도 일본 경제에 도움이 됐다. 일본은 전쟁 중인 유럽에 무기를 비롯한 군수품을 대량으로 수출하면서 미국에 이어 주요 군수품 공급 국가가 되었다.

전쟁으로 유럽 전역에 선박이 부족해지자 일본의 조선업과 해운업에 호황이 찾아왔고, 제철업 역시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다. 배와 같은 군수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철강업이 활성화 돼야 했기 때문이다.

화학 공업도 발달하여 약품, 염료, 비료 등을 일본에서 직접 생산하게 됐다. 이러한 제품들은 독일에서 수입되었으나 전쟁으로 수입이 어려워지면서 자체 생산에 노력한 결과였다. 중화학 공업의 성장은 경이적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중화학 공업이 일본 공업 제품 총생산량의 30%를 차지할 정도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일본에게 대박이었다. 전쟁 특수로 1914년 11억 엔의 채무국에서 1920년에는 28억 엔의 채권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일본의 황금기도 끝났다. 일본의 군수품 공장은 문을 닫았고,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직장을 잃었다. 여기에다 1929년 미국발 대공황은 일본 경제를 궁지로 몰았다. 대공황으로 미국의 사치품 수입이 중단되었고 이로 인해 일본의 견직물 수출은 큰 타격을 입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동맹국이었지만 많은 외국 기업과 소비자들은 일본 제품 구매를 꺼리게 된다. 유럽 열강과 일본은 전후 해외식민지 개척에 힘을 쏟았지만 일본의 팽창주의는 유럽 국가의 경우와 다르게 이해되었다. 일본이 20세기가 시작되고 처음 10년 동안 중국에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고, 베르사이유 조약으로 독일이 소유하고 있던 산동(山東)반도의 조차권을 일본이 확보하자 중국에서는 광범위한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이 벌어졌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일본 경제를 어렵게 했다. 기업들은 조업률을 줄이거나 문을 닫았고 실업자는 200만 명으로 치솟았다. 인프레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노동쟁의가 번졌다. 따라서 사회가 혼란해졌다.

불황의 늪에 빠진 일본은 대량 기아를 막기 위해 새로운 영토를 정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 되었다. 메이지 시대(1871) 3,300만 명이었던 일본 인구는 1930년대에 6,500만 명으로 크게 늘어나 이들을 먹여 살리는 것조차 벅찬 일이 되었다.

일본은 1868년 명치유신 이후부터 정한론(征韓論)이 대두 됐고, 만주와 중국을 식민지로 만들고자 1910년 8월 29일 조선을 식민지화 했지만 1920년대의 추락한 경제와 1929년 10월 24일, 미국 대공황의 발생은 일본 경제를 수렁으로 몰아넣었다. 이런 현상은 정부를 궁지로 몰았고,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뽑아든 칼이 만주 침략이었다.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 요원들이 만주 무크텐(Mukden : 봉천, 지금의 선양) 근처의 남만 철도를 폭파했다. 일본 관동군은 자기들이 폭파해 놓고도 중국 측이 범한 소행이라고 덮어씌운 뒤 이를 핑계 삼아 무크텐과 다른 만주의 도시들을 점령해 버렸다. 이것을 만주사변이라고 부른다.

국제연맹은 중일 양측에 휴전을 요구했으나 일본이 이를 수용하지 않았고, 중국은 미국이 일본에 압력을 가해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나 미국 후버 정부의 헨리 스팀슨(Henry Lewis Stimson) 국무장관은 중립을 선언한다.

일본 관동군은 만리장성을 넘어 친저우(?州 : Chinchow)를 점령한다.  중국 정부가 만주를 봉쇄하는 조치를 취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은 1932년 1월 28일, 상하이를 폭격했다.

미국과 영국은 상하이 근처에 군대를 증강배치 했으나 미국은 일본에 대해 경제적 군사적 제재는 철저하게 배제했다. 이런 미국의 대응은 일본의 무법적 행동을 고무시켰다.

또한 일본은 국제연맹 권고 사항이나 결의를 묵살했다. 드디어 1932년 3월 10일,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내세워 만주괴뢰정부를 선포했다.

만주는 군사적, 경제적 가치가 큰 곳이었다. 만주 무크텐은 베이징, 조선 등으로 통하는 철도의 길목이고, 만주 하얼빈에는 시베리아로 가는 철도가 있었다. 여기에 국제 무역의 거점인 다렌항과 수로 역할을 하는 쑹화강까지 가진 교통의 요지였다.

일본은 만주 철도와 관동군 군사력을 바탕으로 만주를 상품 시장과 자본 수출 시장으로 만든 뒤 경제적 진출을 시도 했다. 1930년대 일본의 대외 투자의 50%가 만주에 집중됐는데 이는 당시 만주 지역의 외국 투자 총액의 70%에 달했다. 특히 군부는 언젠가는 소련과의 대결에서 만주가 전진기지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해 이 지역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1929년 미국발 대공황은 제2차 세계 대전의 빌미를 제공했다. 대공황은 세계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고 세계 각국은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골몰했다. 미국·영국·프랑스는 국가가 시장 경제에 개입해서 생산과 소비의 문제를 조절해서 해결하려고 했고, 이탈이아·독일·일본은 전체주의 정책과 대외 침략을 통해서 해결하려 했다. 바로 대외 침략이 제2차 세계대전을 부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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