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분단과 역대 정부의 대북 정책(4)
한반도 분단과 역대 정부의 대북 정책(4)
  • 이원주 기자
  • 승인 2019.07.11 14: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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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길랑 / 비전전략경영컨설팅 원장

제3절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국 수뇌 회담

Ⅰ 카이로 회담(Cairo conferences : 1943.11.22.∼11.26)

명길랑 / 비전전략경영컨설팅 원장

이탈리아가 1943년 9월 항복을 함으로써 승기를 잡은 연합국은 1943년 11월 22일부터 11월 26일까지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델리노 루즈벨트( Franklin Delano Roosevelt), 영국 수상 윈스턴 레너드 스펜서 처칠( 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 중국의 장제스( (蔣介石) 총통 등 삼거두가 회담을 하였다.
카이로 회담 주최국을 자임한 영국은 처칠 수상을 포함해 100여 명이, 미국은 루즈벨트 대통령을 포함해 60여 명이, 중국은 장제스 총통을 포함해 28명이 참가했다.
회담 장소는 이집트 수도 카이로 시내에서 서남쪽으로 15km 떨어진 기자(Giza), 피라미드 지구 메나 하우스 호텔이었다. 기원전 2,500년 전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3개의 대형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있는 이 유서 깊은 지역에 1886년 건립된 고급 호텔이다.
고대 이집트 왕국을 창건한 파라 파라오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메나 하우스 호텔에서 손을 뻗으면 닿을 듯 피라미드가 가깝게 보인다.
회담 진행을 맡았던 영국은 호텔 인근 비행기지에 보병1개 여단 이상의 병력과 대공포 5,000여대를 배치하는 등 삼엄함 경계를 펼쳤다.
이런 가운데 미·영·중 3개국 거두는 5일간 (1943.11.22.∼11.26) 회담 끝에 11월 27일 카이로 선언(Cairo Declaration)이 나왔다.

1. 이 선언의 주요 내용은
가. 3국은 일본에 대한 장래의 군사행동을 협정한다.
나. 3국은 야만적인 일본에 가차 없는 압력을 가할 것을 결의한다.
다. 3국은 일본 침략을 저지, 응징하나 모두 영토 확장의 의사는 없다.
라. 제1차 세계 대전 후 일본이 탈취한 태평양 여러 섬을 박탈하고 또한 만주·타이완·평후도 등을 중화민국에 반환하고, 일본이 약취한 모든 지역에서 일본세력을 축출한다.
마. “한국 국민이 노예 상태에 있으므로,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자유 독립시키기로 결의 한다"는 특별 조항을 명시했다.

이로써 한국의 독립이 처음으로 국제적인 보장을 받게 되었다. 한국의 독립이 처음으로 국제적인 보장을 받게 된 것은 중국의 장제스 총통이 제기한 것이고 장 총통이 제기한 것은 김구 주석을 비롯한 임정 수뇌부가 장제스 총통이 중경에서 카이로로 떠나기 5일 전에 장 총통을 찾아가서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호소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독립안이 카이로 회담에서 처음 논의된 시각은 1943년 11월 23일 오후 8시, 장 총통이 루즈벨트와 만찬 석상에서 '한국 독립' 안건을 꺼냈다. 일본이 차지한 만주와 대만·평후도의 중국 반환, 일본이 강점한 태평양의 도서(島嶼) 지배권 박탈과 함께 주요 의제로 삼은 것이다. 이날 회동은 밤 11시까지 3시간가량 계속됐다. 장 총통은 11월 24일자 일기에 “한국독립 문제에 대해 나는 루즈벨트에게 나의 주장을 찬동하고 도와 달라고 요구했다”고 적었다.

만찬에 동석한 루즈벨트 대통령 특별 보좌관 해리 흡킨스가 11월 24일 오후 카이로 회담 선언 초안을 작성했다. 흡킨스는 “우리는 일본에 의한 한국 국민의 기만적인 노예상태에 유념해 일본 몰락이후 가능한 한 가장 이른 시기(at the earlist possible moment)에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가 될 것임을 결의한다"라고 되어 있다.

11월 24일 루즈벨트 대통령이 “적절한 시기(at the proper moment)에"로 수정하였고, 11월 25일 처칠 수상은 “3대 강국은 한국 국민의 노예 상태에 유념해 적절한 절차를 거쳐 (in due course)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될 것을 결의한다"로 수정했다.

미·영·중 3국은 전후 질서 수립을 둘러싸고 시종 팽팽한 신경전을 벌렸다. 특히 영국과 중국은 '한국 독립'승인을 놓고 정면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인도·버마 등에 대한 식민 지배 유지를 바라던 영국은 '한국 독립' 조항을 명시하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캐도건 영국 외무차관은 11월 25일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가 될 것”이라는 구절은 “일본 통치에서 이탈시킬 것"이라고 수정 하려고 했다.

사실상 '독립'이라는 표현을 빼려는 시도가 중국의 반대로 무산되자, 영국은 한국 관련 조항 전체를 삭제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하지만 미국이 중재에 나서고 다음날 처칠 수상이 “적절한 시기에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될 것을 결의 한다"는 수정안을 내놓으면서 중국과 영국 갈등은 잦아들었다.
1943년 12월 1일, 카이로 회담에 참가한 미국·영국·중국 등 3개국은 한일합병 이래 처음으로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겠다는 선언문은 “한국 국민들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절한 시기에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고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김구 임시정부 주석은 카이로 선언 발표 직후인 1일 “나는 3,000만 동포를 대표하여 3영수에게 사의를 표하는 동시에 일본이 무조건 투항할 때까지 동맹국의 승리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최후까지 분투할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위에서 수정은 지엽적인 것이 아니었다. '가능한 한 빠른 시기' 독립과 '적절한 시기'의 독립 사이에는 엄격한 차이가 있다. '가능한 한 빠른 시기'의 표현은 독립이 지상 목적임을 뜻하는 것이고 '적절한 시기'의 표현은 즉각적인 독립에 비해 다른 고려가 앞선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루즈벨트의 '적당한 시기'의 표현의 속셈은 테헤란 회담과 얄타 회담에서 드러난다.

 2. 카이로 회담의「한국 독립」문구 변화 과정
가. 1943년 11월 23일:미국 루지벨트 대통령과 중국 장제스 총통 만찬
나. 1943년 11월 24일:홉킨스 미국 루즈벨트 보좌관 초안 작성
“우리는 일본에 의한 한국 국민의 기만적인 노예 상태에 유념해 일본 몰락 이후 가능한 한 가장 이른 시기(at the earlist possible moment)에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가 될 것임을 결의한다.
다. 1943년 11월 24: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수정안
“적절한 시기(at the proper moment)에”로 수정
라. 1943년 11월 25일:처칠 영국 총리의 수정을 거친 최종 선언

“3대 강국은 한국 국민의 노예 상태에 유념해 '적절한 절차를 거쳐'(in due course)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될 것을 결의한다”
마. 1943년 11월 26일:최종 확정
바. 1943년 12월 1일:카이로 선언 공식 발표

Ⅱ 테헤란 회담 (Tehran Conference : 1943.11.28.∼12.1)

1943년 11월 28일부터 12월 1일까지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 처칠 총리, 소련 이오시프 스탈린(Iosif Vissaronovich Stallin) 당 서기장 등 3국 수뇌가 한 회담이다. 이 회담은 독일에 대한 공동작전을 논의하는 게 목적이었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스탈린에게 카이로 회담에서의 토의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인도차이나, 버마, 말레이시아, 동인도제도 등 극동의 식민지역 인민들에게 자치의 기술을 교육시키는 것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는 필리핀인들이 독립을 위하여 준비를 갖추도록 도와준 미국의 기록을 자랑스럽게 지적하였다.
루즈벨트는 필리핀의 경험을 인도차이나와 한국에 있어서의 신탁통치에 연결 지었다.
테헤란에서 있었던 스탈린과의 대화에 대한 미국 측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루즈벨트는 장제스가 자기에게 중국은 인도차이나에 야욕을 갖고 있지 않으나 인도차이나 인민은 아직 독립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하여 그는 미국이 필리핀을 취득했을 때 그곳 주민들은 독립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나 이제 일본과의 전쟁이 끝나는 대로 무조건 독립시킬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루즈벨트는 스탈린에게 자신이 장제스와 인도차이나의 신탁통치를 논의한 사실을 알려준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그 나라의 인민에게 확정된 기간(20∼30년)내에 독립을 하도록 준비시키는 과업이다. 스탈린은 이러한 견해에 완전히 동의하였다”루즈벨트는 그 후 “한국인은 아직 독립정부를 행사 또는 유지할 능력이 없으며 40년간의 후견을 받도록 해야 된다”라고 한 자신의 견해에 스탈린 역시 동의했다고 말했다.

루즈벨트가 생각한 것처럼 한국인은 독립정부를 유지할 능력이 없는 민족이 아니다. 한국은 오래된 국가이다. 북유럽의 조상들이 아직 가죽을 걸치고 숲속을 다니며 무술(巫術)을 따르고 있을 때 한국은 이미 자체의 정부를 갖고 있었으며 고도의 문명을 이루고 있었다. 일본은 한국으로부터 문화를 전수 받았으면서도 한국을 자기의 식민지화하기 위해 악의적으로 허위 사실을 미국 조야에 퍼뜨려 루즈벨트는 이를 믿고 한국인을 무시한 것이다.

루즈벨트의 한국 신탁통치는 집요했다. 1945년 2월 8일, 얄타 회담 도중의 비공식 토론에서 루즈벨트는 다시 스탈린에게 미국의 필리핀인에 대한 후견을 자랑스럽게 말했으며 이러한 추리를 한국에 다시 적용시켰다. 루즈벨트는 필리핀이 50년간의 후견을 필요로 한데 비해 한국은 20∼30년간의 신탁통치를 받으면 된다고 말했다. 스탈린은 신탁통치 기간이 짧을수록 더 좋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소련 주재 미국대사 해리먼(W· Averell Harriman)은 스탈린이 만약 한국인들이 자신의 정부를 만들 수 있다면 어째서 신탁통치가 필요 하느냐고 반문했다고 말했다. 해리먼은 이것이 소련식 정부를 뜻하는 것이라고 받아 들였다. 어쨌든 미국과 소련은 전후의 한국 신탁통치에 분명한 협정을 이루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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