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실천과 책임: ‘아(阿)Q’의 정신승리(?)
정치의 실천과 책임: ‘아(阿)Q’의 정신승리(?)
  • 성광일보
  • 승인 2019.08.19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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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항석/논설위원

정항석/논설위원
정항석/논설위원

승리(勝利)!

견주어 이기는 기쁨을 의미한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살아가기 힘든 상황에서도, 폐습에 젖어 헤어나지 못한 환경에서도, 그리고 현상의 패배에 직면하여도 묘한 자기대화법으로 패배를 승리로 도출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예를 들어 이렇다. 건달들과 마주치면 자신을 위한 이기는 전략(優勝記略)을 취한다.

“나는 벌레다(我是蟲豸)”
“짐승을 사람이 때린다(人打畜生!)”

1921년에 발표된 <아(阿)Q정전(正傳)>의 일부이다. ‘아Q’는 건달들과의 대면을 짐승과 사람의 다툼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사람의 격을 갖추지 못한 존재로 전락시킨다. 이러한 묘한 승리전략(優勝記略), 즉 정신승리법(精神上的勝利法)에 걸리는 시간은 채 10초도 걸리지 않는다(不到十秒). 그리고 마음을 흡족하게 만든다(心滿意足的得勝). 말하자면, 자기 판단에 따라서 그는 곧 역전승을 거두었다고 생각해 버린다(立刻轉敗爲勝). 그렇게 상상한다. 이것이 기묘한 상상 방법(能夠自輕自賤的人)의 주인공이 되어 견주지 않고도 승리한다는 것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이 작품은 ‘자신만의 정신세계에 갇히어 무지하고 가난하며 혼자 살아가는 날품팔이 ‘아Q’라는 이가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허무하게 죽어간다’는 내용이다. 주목할 것은 이렇다. 누구도 눈여겨 볼 것 없는 그런 존재를 노신(魯迅 1881-1936)은 <아Q정전>이라는 거창한 제목으로 다루었다. 정전(正傳)! 해석에 따라 다의적이나 다분히 ‘바로 전하기’라는 속뜻을 담고 있다. 문학적 진단으로 중국 개혁의 의미를 포함한다.

기실 아시아의 대문호를 꼽으라면 많은 이들 중에 여전히 노신(魯迅 이하 노신)은 제외되지 않는다. 근대 중국의 변혁이 진행 중인 당시(예를 들어 신해혁명의 1911년, 학생 및 시민의 평화시위를 무력 진압한 1926년 3.18 사태, 광저우에서 국민당 정권에 의한 1927년 4.12 대학살 등) 활동한 문학가이며 사상가인 그는 무기력한 중국내부를 고발하고,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비판하며 장제스의 국민당의 독재에 항의하기도 하였다. 그가 어떠한 사상을 가졌는지는 다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사상은 그가 남긴 작품들과 어록적인 표현에 녹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렇다면 왜 <아Q정전>인가!

1세기 전에 쓰인 이 작품은 아직도 국경을 넘어서 개혁이 절실한 이들에게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던져준다. 잃어버린 듯, 혹은 생각하고 싶지 않는 듯 주인공은 여느 작품과 달리 주인공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가지는 파동은 자못 크다. 이 작품은 그 시작에서 정체성의 질곡을 질타하고 있다. 역설적이다. 1) 아Q는 시답지 않는 일에 열을 내고, 2) 정작 화를 내야 할 때는 자신의 뺨을 스스로 때리고 자기 위안적 독백으로 그친다. 3) 게다가 ‘혁명’도 모르면서 누명을 쓰고 죽어갈 때에도 ‘공포’를 느끼지만 무슨 까닭에 ‘그럴 수 있어(得人生天地間 未免要殺頭的)’라며 사라져간다. 그리고 이를 지켜본 마을 사람들도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취한다. 특히 작품 뒷부분에 나오는 ‘아Q처형에 대하여 여론은 좋지 않았지만(輿論卻不佳), 그들 대부분은 이를 불만족스럽게 여기고 있다(他們 多半不滿足)... 처형이 너무 시시해서 헛걸음했다(他們白跟一趟了)’는 대목은 몹시 허탈하게 만든다.

노신이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단박에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하여도 읽고 난 후의 맛은 오랫동안 개운하지 않다. 그러면서도 다시 읽게 한다. 이 작품의 마력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가지는 강렬한 인상은 크게 세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 정확하게 자기이름도 모르는 품팔이꾼 ‘아Q’를 주인공으로 하여, 과거의 영화에만 매달리는 근대 혁명 당시의 중국을 ‘착각의 정신 승리’와 ‘방황’ 등으로 응축하여 꼬집고 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대화체를 사용하여 당시 중국의 병폐를 노골적으로 그리고 중국인 스스로 패배감을 들 수 있도록 노출시켰다. 둘째, 무지와 몽매의 중심에서 누명을 뒤집어쓰고 처형되는 아Q의 운명을 통해 변혁과 혁명의 과정에서 과연 ‘누가 주체이고 누가 객체인가’를 고발하고 있다. 정체성의 인식 없이 정신적으로 피폐화된 변혁의 중국을 여과 없이 비판하고 있다. 환언하면 자신(self, 중국)을 알아야 진전과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계몽과 자각의 반성이다. 당시 중국 계몽의 절박한 심정에 대한 반증이다. 셋째, 방황과 착각의 정신승리는 병적 증세이다. 직관적으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그저 지나가는 바람’ 수준에 머물거나 ‘자기학대의 자위적 행위’는 현실직시 위에서 부정하거나 긍정적으로 보려는 ‘자기합리화’와는 분명 차별된다. 아Q에게는 삶의 목적의식이 없다. 그렇다고 사명감은 더더욱 없고 대항할 용기도 없이 비겁하게 살아가는 민중으로서 ‘부스럼의 아Q’를 격변기의 중국전체로 프리즘화(prism-embedded)시킨 것이다.

사실 노신이 작가가 되는 과정은 안쓰럽다. 그는 1904년 미야기현(宫城县)의 센다이 의학전문학교(仙台醫學專門學校)를 다니다가 강의 도중 일본인에게 처형당하는 한 중국인의 영상을 보게 된다. 심리적 분노 못지않게 그가 큰 충격을 받는 것은 따로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이를 바라보는 다른 중국인들의 모습이 그것이다. 노신은 중국에게 필요한 것은 ‘병든 정신의 치료’라고 판단했고 시간은 오래 걸렸으나 그의 생각대로 중국은 자각을 했고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문학의 고전은 시공간을 넘나든다. 격변기에 태동된 이 작품은 노신의 생애를 의미한다. 그러나 ‘아Q’는 단지 자신과 중국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혼동과 궁핍, 혁명과 반혁명 등 내적 소요와 분열, 밖의 도발과 주권위협, 그리고 자국의 정체성 확보와 발전을 위한 희망의 개혁이 필요한 국가와 국민들에게 여전히 그 가치는 요구받고 있다. 현재의 중국이 1934년 시작된 대장정(大長征 또는 대서천[大西遷])과 1946년 국민당의 대만탈출의 결과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다만, 그들은 내적 문제를 스스로 노출하였고 어떻게 이를 봉합해야 하는지에 대한 그들의 자성을 우리는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스스로 ‘아Q’라고 할 만큼 우리 스스로를 고발하고 비판할 수 있는가! 내적으로는 국토의 이념분단, 남남 갈등과 분열 그리고 외적으로는 주변 4강으로부터의 대립과 긴장 그리고 우호관계의 설정과 이원화 등으로 우리의 국내외적 위치를 포괄적으로 투사할 수 있다. <아Q정전>이 신보부간(晨報副刊)에 연재되던 그 때에 앞서 우리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을사늑약 이후 1919년 3.1 만세 운동은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에게 선구적 영향을 주었다. 그 즈음 중국은 청조를 무너뜨린 신해혁명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중국이 서구 열강의 야욕 속에 있었다면 우리는 36년의 식민지배의 굴욕 속에 있었다.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Q와 건달’의 관계로 비유한다면 일본제국주의와 극우주의자들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이들을 ‘벌레(蟲豸)’로 여기면 그만인가! 그리고 내외적으로 갈등과 민감한 발언에도 불구하고 ‘아Q의 묘한 정신적 승리법(轉敗爲勝)’의 원용하여 심리적 역전(逆戰)으로 자위하면 그만인가! 우리에게는 분명 분단과 분열의 아픔이 여전히 상처로 남아있다.

다시 돌아보자.

‘일본인에 의한 중국인 처형장면과 이를 무심히 바라보는 중국인’의 영상은 우리의 어디와 닮지 않았는가! 근자에 일본열도로부터 오는 일본극우주의자들의 자극적 발언과 정치적 적대정책의 발표(2019년 일본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함)도 그러하지만 이를 두고 내부의 분열양상은 매우 요상하다. 이를테면 ‘아Q의 억울한 총살’에도 무심한 침묵을 했던 미장(未莊 웨이좡) 마을 사람의 태도와 무엇이 다른가! 허와 실을 짚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보이는 남북관계에 대한 비난의 소리도 그러하지만 매국행위의 단죄와 독립 그리고 한일관계에 대한 도를 넘어서는 패악수준의 목소리는 ‘아Q’가 약한 비구니의 머리를 조롱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100여 년 전 노신이 외쳤던 것은 단지 ‘수치(羞恥)’의 노출(아Q)과 웨이좡(未莊) 마을사람의 ‘표리(表裏)의 이중성’이 아니다. ‘희망’이다. 우리는 72년 동안 과거를 왜곡하는 일본에 대한 공공외교의 부진 못지않게 아Q처럼 내적 과거사 청산에 ‘아무런 대항력을 갖추지 못하고 자기위안적 정신승리’에 갇혀오지는 않았을까! 74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나타난 대통령의 연설은 그 시작에서 ‘독립’에 대한 것을 운운하고 있다. 주변국과의 돈독한 관계설정 등 ‘경제공동체’에 대한 언급도 너무 소극적이다. 현재 국민이 원하는 곳을 시원하게 경제적으로 긁어주지 못했다는 비판 못지않게 장기적으로 현안에 관한 희망을 줄 수 있는 대안이 제시되지 못했다. ‘현재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는 방황과 착각의 정신승리의 증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보다 더 적극적일 필요성이 있다. 이러한 느낌은 비단 특정계층의 시각만은 아닐 것이다.

이제 노신(鲁迅)이 남긴 말을 다시 되새겨보자. 노신을 말한다. ‘슬프다는 것은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이나, 분노하되 대응하지 않는 무력함은 의미를 상실한다(哀其不幸 怒其不争)’. 우리에게는 어떠한 용기도 없는가! 노신은 말한다. 아Q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를 도발하는 여하한 행위에 ‘침묵하는 것은 가장 큰 경멸이고(惟沉默是最高的轻蔑) 변화 없이 안주하는 곳에서는 자유는 보장되지 않는다(贪安稳就没有自由)’. 과거사에 대한 반성 없는 일본은 그렇다 치고 내적인 반성과 성찰은 어떤가! 정치가(政治街)에서뿐만 아니라 도심 한복판에서 보여주는 비겁함은 우회하자. 적어도 ‘소녀상’ 주변에서 친일매국행위를 옹호하거나 일본 극우세력을 감싸는 언급은 ‘죽어가면서도 항변하지 못하는 아Q’와 뭐가 다른가! 불건전한 정신적 폐단(自輕自賤)이다. 노신은 말한다. ‘용감한 이의 분노는 강자에게 향하지만 비겁한 사람의 부화는 약자를 향한다(勇者愤怒 向更强者 怯者愤怒 向更弱者)’.

72년의 세월은 과거를 잊기에는 적지 않는 시간이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먹고 사는 것’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과거에 할 일을 하지 않았고 하지도 못했다. 이로 인하여 내적 갈등의 골이 더 깊어지기 전에 그리고 과거의 죄를 그냥 덮고 가기 전에 국민에게 물어야 한다. 특정 정부가 홀로 맡아서 될 일이 아니다. 노신은 말한다. ‘본래는 길이 없다.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면 길이 된다(走的人多了 也便成了路)’.

오늘을 사는 우리는 ‘아Q’의 정체성을 몹시 꺼릴 것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생각이다. ‘좁은 한반도에서 갈라져 씩씩거리는 우리’, ‘이를 조롱하는 열도의 극단적 우익세력들’, 그리고 ‘이를 측은하게 바라보는 주변국들의 시선’은 ‘아Q’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의 분열양상을 결코 아름답게 보지 않는 진실을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 씁쓸하지만 그렇다.

수확의 계절이 곧 다가오면 한 목소리로 국민이 만족할만한 것을 거두어 주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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