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매(三昧)체로 거른 ‘깨달음의 노래’
삼매(三昧)체로 거른 ‘깨달음의 노래’
  • 성광일보
  • 승인 2019.08.28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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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묵(李啓默) /화정(和政)·화옹(和翁)

 

본래 근본 자리로 돌아오다,

 

본래로
돌아오고 보니

이미
힘(功) 깨나 허비 했네,

어찌 할꼬?
바로 당장에 눈 먼 자, 귀머거리와
같이 되려면,

암자
가운데서 암자 앞 물건을
찾지 않네 그려!

물은
스스로 흐르고

꽃은
스스로 붉구나!

返本還源已費功 爭如直下若盲聾
庵中不見庵前物 水自茫茫花自紅
                   <九,返本還源頌>

이계묵(李啓默) /화정(和政)·화옹(和翁)
이계묵(李啓默) /화정(和政)·화옹(和翁)

이 게송은 본원(本源)자리로 돌아왔다는 노래입니다. 본원은 무엇이 본원 입니까? 우리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말한 것이다. 그 자리는 범부(凡夫)도 없고 성인(聖人)도 없는 자리이다.
차별망상(差別妄想)이 다 떨어진 청정무구(淸淨無垢)한 본래(本來) 자리를 말합니다. 그 근원자리로 다시, 한번 돌이켜 본다는 것입니다.
불교 공부는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을 해야 공부가 된다고 옛 스님들이 말을 했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요? 분별하지 말고 쪼개지 말라는 것입니다. 쪼개고 분별하다 보면 식(識) 작란에 속고 맙니다. 식(識)은 중생심(衆生心) 아닙니까? 식(識)이 바꿔야 지혜(智慧)가 납니다. 그래서 이구(二句)에 어찌할꼬? 바로 당장에 맹농(盲聾)과 같으려면 한 것입니다. 깨달은 경계가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분별(分別)하지 않는 것이 장님과 같고 벙어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암자 가운데서 암자를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암자에 있는 것은 전체가 암자 아닙니까? 하나로 통하는 것을 말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에도 매이지 말라는 말이 사구(四句)의 물은 흐르고 꽃은 붉다 입니다.

이런 대목을 불교 에서는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합니다. 인우구망(人牛俱忘)이 아공(我空) 법공(法空) 진공도리(眞空道理)이고. 반본환원(返本還源)의 수망만(水茫茫) 화자홍(花自紅)은 묘유(妙有)를 말 한 것이다.

임제(臨濟)스님은 사료간(四料揀)에서 인경구불탈(人境俱不奪)이라 했습니다. 사람과 경계를 빼앗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불탈(不奪)은 긍정(肯定)입니다. 사람은 사람대로 경계는 경계대로 놔둔다는 것이다. 인정 한다는 거죠.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요? 범부(凡夫)들은 경계(境界)를 취(取)하여 집착(執着)하기 때문에 경계를 뺏(奪)습니다. 수행자(修行者)는 마음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인(人)을 뺏(奪)은 것입니다. 이렇게 집착(執着)을 타파(打破)하고 나면 확철대오(廓徹大悟) 아닙니까? 깨달고 나면 무심(無心)하기 때문에 무심(無心)자리에서는 산(山)은 산(山)대로 물(水)은 물(水)대로 살아 난 것입니다. 이것을 일러 놓는 것이 반본환원(返本還源頌)입니다.

근본(根本)자리인 청정심(淸淨無心)에서 보면 삼라만상(森羅萬象) 우주만물(宇宙萬物)이 둘(二)이면서 하나(一)이고, 하나(一)이면서 둘(二)인 것을 말 한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佛敎)의 진공묘유(眞空妙有)이다. 이것을 곽암스님은 수망망(水茫茫) 화자홍(花自紅)이라고 한 것입니다.

옛날 宋나라때 청원유신선사(靑原惟信禪師)가 말한 산시산(山是山) 수시수(水是水)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란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죠. 그런데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열반하신 해인사 성철스님께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 했잖습니까? 청원 선사의 말씀을 끌어다 쓰신 것이다.
그런데 세상이 온통 이 말로 시끄럽게 했잖습니까? 뜻도 모르면서 세상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청원 선사가 말씀한 뜻은 이렇습니다. 하루는 법문을 했습니다.

老僧三十年前未參禪時 見山是山 見水是水 乃至後來親見知識有入處 見山不是山 見水不是水 而今得箇休歇處 依前見山祗是山 見水祗是水 大衆這三般見解 是同是別 有人緇素得出 卽是親見老僧이라는 한문으로 된 법문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내가 삼십년 전 참선을 하기 전에는 산(山)은 산(山)이고, 물(水)은 물(水)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선지식을 친견하고 견처(見處)가 생겨서 봤더니, 산(山)이 산(山)이 아니고. 물(水)이 물(水)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편안히 휴식처(見性成佛)를 얻고 나니, 산(山)은 산(山)이요, 물(水)은 물(水)이었다. 그러니 그대들은 이 세 가지 견해가 같(同)은가? 다른(別)가?

여기 모인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얻는 자가 있는가? 있다고 하면 이렇게 말한 이 노승(靑原)을 친견(親見)했다고 할 것이다. 라는 법문입니다. 청원스님은 뭘 말 한 겁니까? 처음에는 산(山)은 산(山)이요. 물(水)는 물(水)라고 했습니다. 참선하기 전 중생의 눈으로 보니 현상계가 산(山)은 산(山)대로 물(水)은 물(水)로 차별(差別)로 보였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따로 따로 있죠, 산山과 물水는 다르게 있죠? 다르게 따로 따로 인식(認識)을 합니다.

그런데 견처(見處)가 생겨 공(空)도리로 보니까? 산山이 산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공空으로 돌아가니 어찌 산山이 산山이겠습니까? 산山이 물水가 됩니다. 중생이 부처 아닙니까? 둘이 아니잖습니까? 아공(我空) 법공(法空)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공공(空空)에 매여서야 되겠습니까? 공空에 빠져있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묘유(妙有)로 나온 겁니다. 물은 물대로 흐르고. 꽃은 꽃대로 붉게 핀 것입니다, 청원 선사 쉬고 나니, 山은 山이요. 물(水)은 물이란 말은 묘유(妙有)를 말 한 것입니다. 이렇게 중국 선사(禪師)스님들은 불교(佛敎)를 중국(中國) 생활 언어(言語)로 바꿔서 쓴 것이다.

진공묘유(眞空妙有)를 임제(臨濟)스님은 인경구불탈(人境俱不奪)로 쓰셨고, 곽암스님은 반본환원(返本還源)의 수망망(水茫茫) 화자홍(花自紅)으로 쓰셨으며, 청원(靑原)스님은 산시산(山是山) 수시수(水是水)로 쓴 것입니다. 말은 달라도 내용은 똑같습니다.

좀 쉽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어렵게 생각지 마십시오, 우리가 왼쪽(左) 오른(右)하지 않습니까? 위에 말을 똑같은 논법으로 바꿔보면 이렇습니다. 우시우(右是右) 좌시좌(左是左)란 말입니다. 오른쪽은 오른쪽이고, 왼쪽은 왼쪽이다. 라는 말입니다.

여기 두 사람이 마주보고 논쟁을 합니다. 오른쪽은 어디가 오른쪽인가? 하고 논쟁을 합니다. 두 사람 서로 마주보고 있으니까 서로 오른쪽을 주장합니다. 서로 주장하는 오른쪽은 오른쪽이 아니죠? 왜냐하면 서로 반대잖습니까? 상대의 오른 쪽은 내가본 왼쪽이죠. 그런데 오른쪽이라고 고집을 부리니까 오른쪽이라고 고집을 부려봤자 그건 오른쪽이 아닙니다.

오른쪽이 왼쪽이 될 수가 있습니다. 보는 관점(觀點)만 바꾸면 간단하지 않습니까? 보는 관점을 바꾸는 것이 뭡니까? 오른 쪽이 오른쪽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고 오른쪽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른쪽 아닌 곳이 없습니다. 보는 관점만 바꾸면 우주 전체가 다 오른쪽이 됩니다. 왼쪽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왼쪽이죠. 다 왼쪽 오른쪽 이라는 것은 보는 관점을 바꿔본 견해입니다. 세상사 만사가 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식(認識)하는 세계가 이와 똑같습니다.

자기(自己) 주관인식(主觀認識)으로 세상(世上)을 논(論)합니다. 고집을 부렸을 때는 오른쪽이 오른쪽입니다. 그러나 고집을 버렸을 때는 오른 쪽이 오른쪽이 아닌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곽암스님이 심우도를 수행의 단계로 설하는 것은 우리 범부 중생의 고집(固執) 집착(執着)을 깨부수기 위해서입니다. 집착과 편견(偏見)을 버리게 하여 무심(無心) 자성(自性)을 깨닫게 하 기 위해서입니다. 주의 주장 편견 집착을 버려야 대도(大道)를 깨달게 됩니다. 물은 흐르고 꽃은 붉다는 조사선(祖師禪)의 말입니다. 아홉 번째는 반본환원송(返本還源頌)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회광반조(廻光返照)입니다. 각자 자기 마음자리로 돌이켜 마음에 깊이 새겨 보십시오. 제불조산님들의 깨달은 안목을 깨달아야 견성성불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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