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과 함께 살아간다
중생과 함께 살아간다
  • 이원주 기자
  • 승인 2019.09.11 15: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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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매체로 거른 ‘깨달음의 노래

중생과 함께 살아간다,

 

가슴
헤치고 맨 발로

네거리에
돌아다니네!

흙먼지
재 뒤집어쓰고도,

볼에
웃음이 가득 하네

신선의
참 비결 쓰지 않고

바로
가르쳐 마른 나무에 꽃을
피게 한다네.

胸露跣足入鄽來 抹土塗灰笑滿面
不用神仙眞秘訣 直敎枯木放開花

                          <10,入廛垂手>

이계묵(李啓默) /화정(和政)·화옹(和翁)
이계묵(李啓默) /화정(和政)·화옹(和翁)

열 번째 입전수수(入廛垂手)는 중생 교화(衆生 敎化)입니다. 아홉 번째까지는 자신의 내적 수행(內的 修行)인 상구보리(上求菩提)라면 입전수수(入廛垂手)는 하화중생(下化衆生)입니다. 안으로 자신의 불성을 깨달고 밖으로 사람들을 제도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깨달아야 남을 도울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깨닫는 다는 것은 지혜의 눈을 뜬것을 말합니다. 눈이 열려야 보지 않습니까? 그것이 오안(五眼)입니다.

오안(五眼)은 불안(佛眼) 법안(法眼) 혜안(慧眼) 천안(天眼) 육안( 肉眼)입니다. 부처의 눈이 열려야 남을 도울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삼계도사(三界導師)라고 합니다. 길을 인도하는 스승이라는 뜻이다. 길을 인도하려면 가는 길을 잘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진리의 눈이 열려야 남을 인도할 수가 있습니다. 오안 중(五眼中)에 육안(肉眼)은 중생 안(衆生眼)을 말합니다.
육안(肉眼)으로는 남을 제도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눈 뜬 장님을 육안(肉眼)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도道를 깨달아서 불안(佛眼) 법안(法眼) 혜안(慧眼) 천안(天眼)을 가지고 삼계중생(三界衆生)을 제도(濟度)한다 해서 삼계도사(三界導師)라고 합니다.

그 모습을 그려놓는 것이 심우 도에 입전수수(入廛垂手)이다.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님 모습입니다. 그러니 그 모습이 맨발로 가슴을 헤치고 중생 속으로 들어가니 흙먼지 재 다 뒤집어 쓴 모습 아닙니까? 진흙탕에 빠진 중생을 건지는데 가사 장삼 차림으로는 안 되겠죠. 흙먼지 뒤집어쓰고 중생들과 함께 동고동락해야 하니까요. 이렇게 사는 것을 동사섭(同事攝)이라고 합니다. 산적(山賊)을 제도(濟度) 하려면 산적(山賊)속으로 들어가듯이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하려면 중생(衆生)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중생이 사는 곳이 어디입니까? 시장(市場)속 아닙니까? 산(山)속이 아닙니다. 시장 속엔 별개 다 있습니다. 사기꾼, 도적놈, 노름꾼 등 별별 중생이 다 있습니다. 그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부처입니다.

가만히 산속에 앉아 있는 것이 부처가 아닙니다. 중생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공감하는 것이 부처님 마음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그랬잖습니까? 6년 수행 후 45년간 중생 속에서 입이 쓰도록 법을 설하신 분입니다. 깨달음을 중생에게 회향(廻向)한 것입니다. 혼자만 깨치고 회향(廻向)이 없었다면 소승불교(小乘佛敎) 아라한에 그치고 맙니다. 일생을 중생을 위해 사는 것을 곽암스님은 입전수수(入廛垂手)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중생제도(衆生 濟度)는 자비심(慈悲心)의 발로(發露)이다. 그래서 옛 조사(祖師)님들도 깨달고 나서 회향(廻向)을 멋들어지게 했습니다.
어떤 스님은 평생 머슴살이로 살다 가셨고, 어떤 스님은 뱃사공으로 살다 가셨고, 평생을 짚신만 삼아서 가는 길손들에게 나눠준 스님도 있습니다. 그 회향의 삶이 이타(利他)에 있습니다.
이타심(利他心)은 자비심(慈悲心)입니다. 남을 돕는 마음 그것이 불교(佛敎)입니다. 부처님도 그랬잖습니까? 그러니 불자(佛子)는 부처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고목(枯木)에서 꽃을 피우는 것이 불교(佛敎)입니다. 불교는 무슨 비법(秘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을 부처 되게 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고목(枯木)에서 꽃을 피운다는 것은 중생(衆生)이 부처(佛) 되는 것을 말 합니다. 심우 도는 이것으로 다 마쳤습니다. 

부처님 회향처(廻向處)는 입전수수(入廛垂手)였습니다. 부처는 좌불( 坐佛)이 아니라. 행불(行佛)이다. 행(行)이 없는 부처는 죽은 사불(死佛)입니다. 행불(行佛)은 활불(活佛)을 말합니다. 오늘날 한국 불교는 좌불(坐佛)이 아닌 행불(行佛)을 필요로 하는 시대(時代)이다. 모두 다 살아 있는 부처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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