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학과 풍수 122. 동 양 오 술. (배달국12)
동양학과 풍수 122. 동 양 오 술. (배달국12)
  • 이원주 기자
  • 승인 2019.09.25 14: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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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老泉)김흥국/광진투데이 편집위원장
노천(老泉)김흥국/광진투데이 편집위원장

지난 호에서는 정조대왕의 행차그림에서 치우둑기와 교룡기가 함께 있는 그림을 보고 조선시대까지도 용의 문양은 임금의 상징으로 쓰인 것을 보았다. 이는 경복궁 근정전의 천정에도 용의 그림이 있었으며. 임금이 입는 곤룡포에도 용의 문양이 있었다.

일설에는 중국황제는 용의 발톱이 9개이며 발톱의 숫자로 위상을 말한다고 하였지만 굳이 발톱의 숫자를 구별하기 이전에 조선의 임금들도 용문양을 사용하였던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는 언제부터 사용하였는가? 누가 먼저 용문양을 사용하였는가? 가 중요하다. 그래야 용문양의 출발과 함께 누구의 것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용은 상상의 동물로 봉황과 함께 우리 민족의 고유문양이다. 용은 임금이 힘의 상징으로 사용한 문양이고, 봉황은 천손민족의 핏줄을 뜻하는 문양이다. 그래서 고구려 사신도에는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이 북현무의 그림이 있다. 여기서 남주작은 봉황을 말한다. 봉황의 봉(鳳)은 수컷을 말하고 황(凰)은 암컷을 뜻한다. 이렇게 암수가 그림으로 구별되어 있다. 남주작은 널방입구의 문짝에 그려져 있고, 널방의 문짝이 양쪽으로 있기에 암수를 구별하여 그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보다 몇 천 년 앞서 존재했던, 우리문명의 유물이 내 몽골의 홍산지역에 엄청나게 분포되어있다.

배달국과 고조선이 자리 잡고 오랜 세월 지켜온 우수한 문명의 유적이 못난 후손들 덕분에 초라하게 매장되어 있다. 그렇다 조상도 후손을 잘 못 만나면 역사가 뿌리 없이 허공을 헤매고, 역사의 유물도 못난 후손 때문에 빛을 발하지 못하고 매장되고 있다. 그래서 신화는 햇빛에 바랜다. 고 했던가? 이곳의 유적은 7000년 전, 소하서문화를 시작으로 흉륭와, 사해, 부하, 조보구문화 까지가 신석기시대이며, 홍산문화부터 청동기시대로 소하연, 하가점 상하층 문화까지 약 5000년의 문화가 존재하며 이상을 통 털어 요하문명이나 홍상문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적봉의 우하량(牛河梁)에는 우리 조상의 무덤유적이 있다. 거기에는 좌청룡과 우백호가 조개껍질로 표현되어 있다. 풍수지리설의 효시를 말하듯 자리 잡고 있다.

현재 풍수지리에 응용되고 있는 사신사(四神砂)는 본래 우리 고유의 사신문화에서 발현한 것으로 홍산지역의 분묘에서 집안의 고구려 고분 등에 그려져 있지만 오늘날의 풍수에는 이러한 기운 응용법이 멸실되어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로 분묘주변의 산들을 사신사라는 개념으로 바뀐 것이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사신도(四神圖)에 숨겨진 비밀을 함께 밝히도록 하고, 오늘은 치우천황이 어떻게 도깨비가 되었는지를 꾸준히 밝혀보자.

지금부터 그 내용을 밝히기 위해서는 치우천황과 황제가 서로 대립하고 싸울 때 어떠한 모양으로 대치하였는가를 기록을 통해서 추측해 보자.

그 옛날, 치우천황은 각각의 부대를 우가(牛加) 마가(馬加) 구가(狗加) 양가(羊加) 저가(豬加) 등으로 짐승의 형상을 깃발로 사용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치우천황은 자신의 깃발로 당연히 뭇 짐승의 우두머리인 용의 형상을 사용하여 용기(龍旗)나 교룡기(蛟龍旗)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과연 그런가? 그 이유는 고조선의 뒤를 잇고 고구려의 전신인 북부여가 마을을 나눌 때 짐승의 이름을 사용하였다.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와 같은 명칭을 붙였으며, 이러한 풍습은 아마도 배달국 시대부터 내려온 우리 전통이 아닌가 한다. 당대의 기록에 의하면 우리 민족은 오곡육축을 먹고 길렀는데 오곡은 멥쌀, 보리쌀, 좁쌀, 기장쌀, 수수쌀이다 육축은 소, 말, 양, 돼지, 닭, 개를 칭한다. 윷놀이의 도 개 걸 윷 모도 이러한 가축의 명칭을 군사로 사용해서 병법에 활용한 놀이판이다. 또 다른 간접증거로 고구려의 신화에 고주몽의 아버지, 해모수는 다섯 마리의 용이 끄는 수레(五龍車)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 왔다고 했다. 다양한 증거로 용은 우리 민족이 사용한 문양인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면 황제는 어떻게 표시했는가? 그들의 기록은 정확하게 오행을 바탕으로 한, 오색기(五色旗)를 사용했다고 되어있다. 다섯 색깔의 오방기는 적기(赤旗) 청기(靑氣) 백기(白旗) 흑기(黑旗)로 표시하고 자신은 중군으로 황색(黃旗)기를 사용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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