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갑장 나리(3)
<소설> 갑장 나리(3)
  • 이주연 기자
  • 승인 2019.10.24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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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한 /소설가

나는 버릇없이 깝죽대는 임철한의 콧대를 초장에 팍 꺾어놓고 싶었다.  
“뭐, 지지부진?“
임 철한이 벌떡 일어나 내 멱살을 잡으려는 순간, 저쪽에서 우리를 흥미롭게 지켜보던 뚱뚱한 사내가 잽싸게 앞을 막았다. 
“자자, 이러지 마시고 정식으로 돗자릴 깝시다. 도사님이 우리 임 사장님의 운세를 지대로 감정하려면 판을 멋지게 짜야 안 쓰것습니까?”
뚱뚱보는 온탕 냉탕의 수온조절이 곤란한 우리가 결국 위험수위에 이르렀다고 느꼈는지 슬쩍 임 철한을 싸고돌았다. 내가 말했다. 
“옳거니! 형씬 복채나 잘 챙기쇼.”
“그럼, 지도 국물이 쪼깨는……?”
“있다마다. 내 한밑천 잡음 거기도 이번 경비는 좋이 건질 거외다.”
분기탱천했던 임 철한이 물었다.
“복채가 얼만데?”
“그야 사람마다 다르지. 팔자가 개떡 같으면 당장'우라까이'할 건데 달랑 돈 몇 푼 갖고 되겠소?”
“사주팔자를 홀딱 뒤집어준다구?”
임 철한은 흥미롭다는 듯 되물었다.
“흔히 사주를 본답시고 남의 껄끄러운 과거를 들쑤셔놓기가 일쑨데 건, 말짱 개수작이오. 허긴, 사주에 없는 관(冠)을 쓰면 이마가 벗어진다지만 그래도 팔자가 기구하면 당장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줘야 될 거 아니겠소? 헌데, 비전은커녕 겁만 잔뜩 주는 게 개나발이 아님 뭐겠소?”
내가 입에 모터를 단 것처럼 떠들자, 임 철한이 솔깃해서 덤벼들었다. 
“그러니까 복채가 얼마냐구? 뭐, 지갑에 있는 것 반을…?”
임철한이 어이가 없다는 듯, 목을 외로 꼬며 콧방귀를 날렸다.
“명색 사장이란 사람이 돈 몇 푼에 벌벌 떤다면 백수와 다를 게 뭐냐고?”
“어, 이게 어디다 대고 반말이야?”
“도사 운운하며 먼저 반말을 찍찍 깔긴 게 누군데?”
나도 모르게 목청이 올라갔다.
“대관절 너 몇 살이나 처먹었어?”
그가 색안경을 벗고 눈을 부라렸다.  
“버르장머리 없는 넌?”
나는 콧등을 구겨 붙이고 대들었다. 
“머리를 염색해놓으니까 네 눈엔 애들로 뵈는 모양인데, 어른한테 까불다간 큰코다치는 수가 있다구! 너, 내 문신 좀 보여줄까?”
문신이 조폭의 계급장인양 팔뚝을 걷어붙이고 덤비는 꼴이라니! 
“머리만 허옇다고 어른 행셀 하다간 훅, 가는 수가 있다구! 개새끼는 날 때부터 하얀 강아지가 있다는 거 모르냐? 암튼, 너 민쯩 한번 까볼래?”
임철한이 먼저 주민등록증을 꺼냈다.
“좋다. 까자.”
임 철한은 내 주민등록증엔 눈길도 주지 않고 설레발을 쳤다.
“자, 보다시피 난 해방둥인데, 넌?”
“갑장인 주제에 뭘 그렇게 어른 대접을 받고 싶어 안달인가, 임 사장?”
나의 핀잔이 그의 입을 단번에 막아버렸다. 
우리는 더 따지지 않았다. 다섯 명 중에 연장자만 확인되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우리보다 서너 살 아래인 김 씨가 셋째고, 오십이 갓 넘은 뚱뚱보와 사십 후반인 장 씨가 막내였다. 김 씨는 국영기업체에서 부장인가 뭔가로 근무하다 2년 전에 명퇴해서 아직 백수고, 뚱뚱보는 부동산중개업을 하는지 아까부터 그쪽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막내인 장 씨는 중령으로 예편한 뒤 현재 방위산업체에서 일한다고 했다. 
우리는 즉석에서 그를 이 계급 특진시켜 장 장군으로 부르는 동시에 김 씨도 이사로 승진시켜주었다. 갑장이 말했다.
“야, 우리 말 까자.”
“까자니, 뭘? 말 좆을…?”
갑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뻔히 알면서도 시침을 떼었다.
“지랄 말구 말 트자니까! 세상에서 젤 만만한 사이가 갑장이란다.”“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당장…?”
나는 점잖게 한발 물러섰다.
“객지에서 귀한 인연을 만났는디 술이 읍서 쓰것능가요? 지가 쌈빡한 술 한 잔 낼텡게 욜로 땡겨 앉으시쇼, 잉.”
뚱뚱보가 여행 가방에서 중국술'이과두주'를 꺼냈다. 내가 육포를 내놓자, 갑장이 너스레를 떨었다.
“육포 갖고 다니는 꼴이 술 좀 하는 모양이지? 암튼, 어른 입맛에 맞춰 대령한 걸 보니 진짜 족집겔세그려.”
“잔소리 말고 술이나 드셔.”
술을 권커니 잣거니 하다 보니 거나한 분위기가 금방 후끈 달아올랐다. 화제도 다양해졌다. 
갑장과 김 이사는 우리나라의 흔들리는 경제와 곤두박질치는 주식을 화제로 입에 거품을 물었다. 
갑장은 폭락한 주식으로 수억 원을 날렸다고 징징대면서도 자신의 재력을 은근히 과시하듯 억 단위를 공깃돌처럼 까불어댔다. 
김 이사도 주식에 손을 댔다가 집 한 채는 좋이 말아먹었다고 맞장구를 쳤으나 주식과 거리가 먼 나는 그들이 집을 말아먹든 빌딩을 볶아먹든 아무 관심이 없었다.  
“아까 문신 어쩌고 하면서 폼 잡고 겁을 주던데, 건 뭔 소린고?”
나는 화제를 돌릴 셈으로 건성 물었다.
“문신…? 아, 이거?”
갑장이 러닝셔츠를 훌떡 걷어붙이고 밀가루 반죽 같은 하얀 배를 불쑥 내밀었다. 거기에 그려진 것은 문신이 아니라, 1자로 길게 개복했다가 지네발처럼 촘촘히 봉합한 시퍼런 수술자국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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