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갑장 나리(5)
<소설> 갑장 나리(5)
  • 이기성 기자
  • 승인 2019.11.27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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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영 한
·문학저널 문인회 소설분과 위원장
·(사)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사)한국문인협회 이사
김영한
김영한

“푸-하하하! 이 각박한 세상에 집을 담보해준다는 놈이 다 있으니 졸지에 재벌 된 기분이다. 자, 이 기분으로 쫘-악 한 잔 꺾자!”
그는 맥주잔을 들어 내 잔에 힘차게 밀어붙이곤 쭉 들이켰다.
“나 돈 많아. 죽을 때까지 펑펑 쓰고도 남을 만큼 있으니까 너나 필요함 말 해.”
그가 뭘 보고 내게 호의를 베푸는지 모르지만 말만 들어도 흐뭇했다.
“글 쓰는 놈이 뭔 돈이 있겠냐? 똥끝이 타도 그 잘난 자존심 때문에 혼자 끙끙댈 게 뻔하지. 노름밑천만 아님 얼마든 갖다 써.”
문학은 쥐뿔도 모르는 그가 궁상떠는 게 딱 질색인 나를 어떻게 알았는지 노골적으로 자존심을 건드렸지만 아주 싫지는 않았다.
“잔을 채우잖고 왜 따르다 말아?”일부러 반만 따른 술잔을 그가 추켜들고 소리쳤다.
“전작이 있잖아, 자넨?”
늦은 시간에 갈 길이 먼 그에게 무턱대고 술을 권할 수가 없었다.
“걱정 마. 금방 일어날 테니까.”
“곧 갈 거면 뭐 하러 왔어? 한가할 때 오던지 아님 맨 정신으로….”
술을 맹물처럼 주는 대로 쭉쭉 들이켜는 그가 불안하게 보였다.
“난 너처럼 한가한 놈이 아니라구.”
“어련하겠어, 공사다망한 사장님인데!”
나는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지랄 마! 남의 속도 모르면서.”
그가 단숨에 비운 술잔을 내던지듯 탁자에 놓고 물었다.
“네 집에서 자잘까 봐 그래?”
“나야 엎어지면 코 닿는 데니까 괜찮지만 자넨 갈 길이 멀잖아?”
“갈 길이 멀어서 노잣돈 많이 달랠까봐?”
“그깟 택시비가 문제냐? 건강이 걱정되니까 하는 소리지.”
“이미 결단 난 몸, 걱정한다구 돼?”
갑장은 삶을 포기한 듯, 자작으로 거푸 잔을 비웠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데 뭔 소릴 그럭해? 금방 갈 것처럼.”
그의 건강 상태를 잘 모르는 나는 퉁명스럽게 핀잔을 주었다.
12시가 되자 손님은 다 빠져나가고 우리 둘뿐이었다. 나는 그만 일어서길 바랐으나 그는 한 잔만 더 하자고 뻗댔다.
“좋다. 죽은 놈 원도 풀어준다는데.”
나는 선심 쓰듯 술을 더 시켰다.
“고맙다. 소원을 들어줘서. 아까 혼자 술을 마시자니 문득 서글픈 생각이 들더라구. 그래서 가까운 친구들에게 모조리 전화를 했지. 그랬더니 나오기는커녕, 요리조리 핑계만 댈 뿐, 오라는 놈도 없더라구.”
그의 핼쑥한 얼굴에 금방 서운한 기색이 스쳐갔다. 입술까지 파르르 떨리는 걸 보면 몹시 야속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술에 걸신이 들렸기로 취한 놈이 부르는데 당장 뛰쳐나올 놈이 어딨냐?”
“너 있잖아?”
“나? 솔직히 나도 부담스러웠지.”
“그으래? 암튼, 친구들에게 퇴짜를 맞으니까 인생 헛산 것 같더라구. 놈들은 내가 죽어도 문상은커녕, 귀찮게 여길 게 뻔해. 난 죽어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구 할 거야.”
“야, 이 밴댕이 소갈딱지야! 자네 건강 때문에 사양한 걸 왜 퇴짜라고만 생각해? 그게 알짜배기 친구의 의린데. 나처럼 촐랑대고 나오는 놈은 말짱 개털이야.”
나는 어떡하든 그의 서운한 감정을 빨리 삭혀주고 싶었다.
“쳇! 친구의 의리?”
그가 혀를 차고 말했다.
“고맙네. 자네의 의리는 죽어도 안 잊음세.”
그는 천장으로 시선을 던지며 꿀꺽 침을 삼켰다. 순간, 목울대가 크게 꿈틀대며 눈가에 맺혔던 눈물이 야윈 뺨을 타고 흘렀다. 나는 못 본 척 말했다.
“과분한 호의에 낯이 뜨겁군.”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단 말이 있잖나? 너야말로 불알친군 아니지만 맘에 쏙 드는 진국이야. 존 글 많이 써. 죽어도 힘껏 도울게.”
그가 눈물을 감추고 술잔을 비울 때, 이렇다 할 작품을 여태 내놓지 못한 나는 긍정적인 대답대신 엉뚱한 말로 그 순간을 모면하기에 바빴다. 
“엊저녁 꿈이 개꿈은 아니군. 드디어 막강한 후원자가 나온 걸 보니.”
나는 사업을 하는 그가 지금껏 자신이 구축한 세계와 전혀 다른 일을 무조건 돕겠다는 말이 일종의 허세거나 동정이라도 아주 싫지는 않았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빈말이 아니야.”
“몸이나 잘 챙겨. 내가 유명할 때까지 도우려면 오래 살아야지.”
“그랬음 오죽이나 좋겠냐.”
이윽고 나는 그의 등 뒤로 가서 겨드랑에 손을 넣고 번쩍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그는 잠시 일어섰다간 바로 빈 자루처럼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뭔가 잔뜩 토할 것처럼 울컥거리며 몸을 뒤틀었다. 빨리 집으로 갔으면 좋으련만 그는 술집을 나온 뒤에도 계속 나를 놓지 않았다. 내 어깨에 무겁게 매달린 그는 빈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쉰 목소리로 최 희준의'하숙생'을 흥얼거렸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빈 택시가 오자 갑장은 데려다주겠다는 나를 뿌리치고 재빨리 택시에 올라탔다. 뒷자리에서 손을 흔드는 그의 모습이 멀어질 때 비로소 나는 무거운 짐을 벗은 듯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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