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思 母 曲(上)
<수필> 思 母 曲(上)
  • 이기성 기자
  • 승인 2019.12.11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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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松 韓吉洙

어언간(於焉間) 어머니 가신지 6년
어머니 모습이 그립다.
자애로우신 어머니 가슴이 생각난다.
대쪽같이 곧으신 어머니의 말씀 듣고 싶다.

일송 한길수

어머니는 1915년 음12월 14일 소한 무렵 전북 익산시 웅포면 입점리 280번지에서 태어나시었다.
어머니가 태어나신 이곳은 새 터라는 큰 마을인데 150여 호가 되는 평택 林(임)씨들의 집성촌으로서 강릉 유 씨와 한양 조 씨가 윗 뜸에 2~3가구가 있을 뿐 왼 마을이 임 씨들의 못자리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곳 유 씨 집에 선친께서 과객으로 유숙하시게 되었다.
아버지는 남원시 덕과면 만도리 수 萬石(만석) 하는 명문가에서 1902년 음 7월 14일에 출생하시었는데 그 당시에는 韓末(한말)의 공권력이 지방에 까지 미치지 못하는 때인지라 화적떼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도적떼들이 선친의 집에 몰려와서 창고에 있던 곡식을 훔쳐가고 그 큰 기와집마저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화병으로 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필자의 할아버지가 작고하셨고 장형이 몸져눕는 등 훈김을 뿜어내던 가세가 점점 기우러져 가는 처지가 되었다.

선친께서는 15세 무렵 서당에서 글공부를 하시다가 귀가하던 중에 한 노승을 만나 지리산 암자에 들어가서 노스님의 가르침을 받아 10여 년 동안 경전 역사 천문, 지리, 의약 등에 관한 이론과 실습에 정진하셨다.
그런데 하루는 노스님이 말씀하셨다.“이제 너는 더 배울게 없다. 내가 아는 것은 모두 가르쳤다. 너는 사바 세상으로 내려가서 나에게서 배운 것을 널리 펼 치거라”는 말씀과 함께 노승은 문을 안에서 걸어 잠가버렸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선친께서는 절 마당에서 은사와 작별을 고하고 스승의 당부를 이행하고자 施恩(여사)할 곳을 찾으려고 전주와 김제 만경을 거쳐 임피 남산 밑에 사는 탐진 최 씨 댁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곳도 머물 곳이 못되었는지 이 집에서 주선하여 웅포 입점의 강릉 유 씨 댁과 인연이 닿아서 이곳에서 머물게 되었던 것이다.

百濟(백제)유물전시관이 있는 이곳은 오랜 옛날 백제 때부터 지방 지배세력이 주름잡던 곳으로 깊은 역사성이 배어 있는 고장이었다. 선친께서는 하늘이 점지 해 주신 이곳에서 哀慶事 擇日(애경사택일), 患者(환자)에게는 침과 뜸, 그리고 施藥(시약), 陰宅(음택)과 陽宅(양택)의 알선 등 이웃들의 아픈 곳을 긁어주는 시혜를 무료로 하시었다. 때는 일제의 억압 속에 숨도 재대로 못 쉬던 시절인지라 난세의 구세주가 나타났다는 所聞(소문)으로 인근에서 人波(인파)가 몰려들었다. 그러자 누가 시키지도 아니했는데도 마을 有志(유지)들이 선친을 이곳에 묶어두어 安着(안착)시키려고 居處(거처)를 마련하고 임씨들 집성촌 마을에 사는 林씨 처자를 중매하여 1931년 3월 7일 嘉禮(가례)를 올려 이곳에 定着(정착)토록 주선하였다.

그러자 평택 임씨 門長(문장)인 향교전교를 하시는 어른을 중심으로 몇 분들이 난리를 치고 문제를 일으켰다. 하루는 선친의 장인어른(필자의 외조부)을 불러다가 야단을 쳤다.

“외지에서 굴러 온자가 어떤 개뼈다귀 인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딸을 주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옆에서 임씨 한 분은 이렇게 거들고 나섰다.
“우리 평택 임씨 가문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집안이야?”
“그렇게 아무렇게나 혼사를 해도 되는 게야?” 중구난방으로 필자의 외할아버지를 닦달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당하기만 하는 선친은 아니시었다. 장인어른이 당하고 왔다는 말씀을 듣고 우선 장인어른을 안심시키시었다.

“한 달만 여유를 주시면 우리 집안이 여기에서 흉잡힐 집안이 아니라는 걸 보여드리겠습니다.” 그 뒤에 선친은 남원에 사시는 형수님에게 이런 사정을 소상히 아뢰는 편지를 띄우면서 고이 보관중인 족보를 인편에 보내달라는 말씀을 전했다. 그런 뒤 보름정도 지난 후에 형수께서는 애지중지 고이 간직하고 있던 족보를 잘 쌓아서 큰 아들 창수 편에 보내주시었다.

청주 韓(한) 씨는 蘭(란)시조로부터 10세손인 서원군 方信(방신), 13세 양절공 確(확), 16세 승지공 世信(세신), 28세 世敎(세교)로 이어지며 선친은 世敎의 차남이신 가계로 이어왔다.

蘭 시조 할아버지는 청주 방정리(一名 대머리)라는 곳에 거주하시다가 고려 태조 왕 건이 후백제의 견 훤을 치러 갈 때에 앞장을 서시어 큰 공을 이루시었기에 태위 삼중대광 개국벽상공신으로 위양공의 시호를 받으시었다.

10세 서원군 할아버지는 고려 말에 과거에 급제하시어 공민왕 때에는 추밀원직학사(樞密院直學士)가 되었다가 동북면 병마사로 가시었다. 
한편 공민왕 9년 10월에는 동지공거로서 과거를 관장하여 정몽주(鄭夢周) 같은 선비를 선발하는 업적을 남기시었다.

그런데 方信(방신) 할아버지는 개성근처에 墓域(묘역)이 소재하기에 할 수 없이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영의정을 한 현손 致亨(치형)의 묘소 하에 西原祠(사원사)를 세워 세향을 모시고 있는데 필자가 서원군파 대종회장을 5년째 맡고 있다. 청주 한문은 단일 본으로 우리나라 10대성 중의 하나이다. 한 씨 종원들을 통칭 100만 명이라고 하는데 서원군하 후손들은 30만 명 정도를 헤아리는 큰 문중이다.

襄節(양절공)公 確(확) 할아버지는 조선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의 아버지로서 世祖(세조) 朝(조)에서 左議政(좌의정)을 하신 불천위이시고 16세 승지공 世信(세신)은 燕山君(연산군) 때에 左承旨(좌승지·현 대통령 비서실 차장)를 하시다가 연산군의 폭정으로 落鄕(낙향)하시어 박사 마을인 전북 임실 삼계에 사셨는데 선친으로부터 14대조이시다.
청주 韓 門(한 문)에서는 조선조에서 13명의 相臣(상신)과 6왕비, 4부마를 배출했고 기자조선과 마한을 세운 무강왕의 후예로서 왕족이며 빛나는 명문거족으로 치부하는 가문이다.

장조카가 족보를 모셔오자 선친께서는 어머니를 시켜 음식을 정성스럽게 장만토록 하여 터줏대감인 평택 임씨 문장 등 어른들을 한곳에 모셨다. 선친께서는 이 자리에서 청주한씨 족보를 자랑스럽게 펼쳐 보여드렸다고 한다. 다만 몇 페이지를 넘기지 아니했는데도 문장 어른이 감탄사로 하시는 말씀.
“야 우리와는 상대가 안 되는 양반이다. 한 씨가 이렇게 엄청난 조상을 모시고 있는 줄 몰랐다. 아주 미안하게 되었는데.”라고 하시며 장인어른을 부르더니“사윗감을 아주 잘 골랐네. 일전에 한 말은 내가 잘 모르고 한 말이니 담아두지 말게” 하시었다는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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