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思母曲(下)
<수필> 思母曲(下)
  • 이기성 기자
  • 승인 2019.12.27 15: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一 松 韓吉洙
한길수
한길수

이렇게 되고 보니 선친께서는 아무 거리낄게 없이 양 날개를 달고 욱일승천하시는 경지에 이르시었다. 그러니 매사가 더욱 바빠지셨다. 이런 일을 뒷바라지 하신분이 우리 어머니이시다. 매일 꼭두새벽에 찾아오는 사람, 깊은 잠이 든 야밤에 환자를 업고 오는 사람 외에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등 등 모두를 받아드려 부축하고 접대하는 일을 18세 신부가 발을 동동거리며 해 냈으니 얼마나 말 못할 고통 속에 고생하셨을 가를 생각하니 지금도 안타까운 마음 그지없다.

그러다가 선친은 활동범위를 넓히시었다.
전라감영인 전주로 가시어서 그곳에서 명성을 떨치시었다. 그러다가 두 달이나 3개월 정도 지나서 귀가하신다. 그러자니 집안 살림이나 자녀들 교육은 물론 범사를 오로지 어머니의 가녀린 어깨가 담당하시었다.

자그마치 7남매가 먹고 입고 씻고 말썽부리고 서로 잘 났다고 싸우고 울고 불고 지지고 볶고 하는 일을 어머니 혼자 짊어졌으니 그 무개가 얼마나 무거웠을까? 지금생각해도 너무나 안쓰럽고 죄송하다.

필자는 장남으로서 어느 정도 책임감을 갖고 동생들에게 관심을 가졌어야 하는데도 오로지 공부한다는 핑계로 가사일체를 도외시 했으니 이제 생각해도 죄를 많이 진 죄인이다.
시골에서 농사일을 하시는 우리 어머니는 참으로 대쪽 같은 심성을 지니셨다. 농사를 짓다보면 이웃에서 농기구를 빌리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금전이나 곡식을 빌려야 하는 경우도 있으련마는 先慈(선자·작고하신 어머니)께서는 일체 그런 일이 없는 분이시다. 단 한 번도 남에게 아쉬운 말씀을 하시는 분이 아니시었다.

어머니는 42세에 홀로되시었는데 7남매 중 한사람도 혼사를 못 시켰고 학업을 마친 자녀가 한 사람도 없었다. 이런 와중에 큰 짐을 짊어지신 어머니는 꼿꼿한 성품으로 초지일관 그래도 할 일을 다 하시었다. 아들딸을 다 짝을 맺어 주실 뿐 아니라 살림을 내주었고 데리고 있는 손자 손녀까지 전문대학이라도 마치도록 했다.

남에게 조그마한 폐도 끼치지 아니하시고 평생을 사시는 분이시기에 다른 사람과 한 번도 말을 섞거나 다투시는 일이 없으셨다. 한 평생을 곧게 살아오신 우리 어머니는 1977년 5월 5일 어린이 날 益山郡守(익산군수)로 부터 [壯(장)한 어버이 상]을 받으신 일이 있다.

일제 막바지에 마을 어른들을 마을 사랑에 모아놓고 청년들이 일본어를 가르친 일이 있었다.
이때 어머니는 참여를 안 하시니 어느 분이 웨 여기에 빠진 사람이 있는데 왜 내버려두느냐고 항의를 하자 할 수 없이 우리 어머니도 참여토록 불러내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방안에 들어서자 말자 칠판에 적어놓은 ァィゥェォ아이우에오 カキクケコ 가기구게고를 술술 읽으셨다. 그러니 그곳에서 일본어 기초를 배울 필요가 없었다. 아마도 어머니는 우리들이 학교 공부 할 때에 어깨 너머로 배우신 것 같았다. 그러니 항의한 여자는 뻘쭘해졌을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어머니께서는 별도로 배우지 아니하셨지만 영리하시고 총기가 있고 재치가 있으셨다.

이농현상이 심화되자 마을이 초토화 되어갔다. 젊은이들은 구경조차 힘들고 풀기 떨어져서 힘없는 노인들만 모여서 기울어져 가는 고향마을의 기둥뿌리를 붙잡고 매달리고 있었다. 이렇게 되니 어른들이 병이 나도 치료가 힘들어 그냥 아픈 몸뚱이를 끌고 다니며 농사일을 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안타깝고 처량한 이야기 인가?
그래서 막네 계수씨가 차를 운전하고 가서 어머니를 모셔왔다. 그래도 장남인 필자가 모셔야 하기 때문에 필자의 집에서 기거를 하시었는데 그래도 아이들이 있어 밤에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났으나 날이 새면 아이들 3남매가 모두 학교에 가고 나니 큰 며느리하고 둘만 남았는데 공통된 역사가 없으니 구수한 이야기꺼리가 없어 지루한 하루해가 너무나 심심하시었다.
그래도 우리 집은 단독주택인지라 이웃사촌도 있고 이웃 간에 상부상조의 미풍이 불고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이웃 노인들과 말벗을 터서 왕래를 하시더니 하루는 호미를 구해서 우리도 모르게 낮에 구리시로 아는 할미들과 밭을 매러 다니신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안 식구에게 어느 아주머니가 핀잔을 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돈이 필요해도 그렇지 시골에서 평생 고생하신 노인을 불러다가 품팔이 시킬 수가 있느냐?”

필자가 저녁때 퇴근 후에 저녁식사 중에 이런 말을 들으니 밥알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아니했다. 그래서 어머니 방으로 건너가서 확인을 해 보니 어머니 말씀이
“시골에서 날이 새면 날마다 움직이던 사람이 이곳에 와서 두 손 놓고 있으려니 소화가 안 되고 하루해가 너무나 길어서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웃을 따라서 며칠 움직여 보니 건강에도 좋고 소화도 잘 되어 사람 사는 맛이 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필자가 말씀 드렸다.

“ 물론 어머니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나 이곳에 사는 자식들의 얼굴도 있으니 심심하시면 노인정이나 아니면 어른들 모이는 곳에 가시던지 하셔야지 품 팔러 다니시는 것은 재고 주십시오.”하고 사정의 말씀을 드렸더니 잘 알았다고 말씀하시었다.

그런 뒤 한 20여일 되었는데 어머니 품 팔러 다니신다는 이야기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또 들어 왔다. 어머니의 소일꺼리 아니면 심심풀이 정도로 이해 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뒤로 어머니는 “이곳은 너무나 심심해서 못 있겠다”고 하시면서 아직 나이가 어려서 학교에 입학하지 아니한 손자들이 있는 목동 막내네 집으로 가신다고 가셨다.
이제 생각하니 후회막급이다. 어머니가 너무 피곤하지 않고 심심푸리로 왕래하실 수 있는 밭을 좀 장만하던지 했더라면 어떠했을까? 여기 저기 널려있는 노인정 중에 어머니 성미에 알맞은 곳이 있는지 잘 살펴서 권유해 드리었더라면 어떠했을까?

이 모두는 행차 후에 나팔이요 사후의 약방문이라 할 수 밖에 없는 하나의 사족에 지나지 않는다. 先慈(선자)께서는 목동 아파트에서 홀로된 둘째 계수씨와 생활을 하시다가 2013년 4월 13일에 아쉽게 百壽(백수)가 아닌 하나님과도 싸울 수 있다는 나이인 白壽로 영면하시었다. 그래서 경기도 포천 냉정리에 계시는 선친 곁에 모시었다.
두 분은 56년 만에 만나셨으니 그동안 쌓아놓으셨던 만단정화(萬端情話)를 구수하게 나누 고 계실 것이다.
부모님 양위분과 작별을 하고나서 마지막으로 송강 정철의 시 한수가 생각나서 여기에 적는다.

어버이 살아 신제 섬기길 다 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 닯다 어찌 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은 이뿐인가 하노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 특별시 광진구 용마산로128 원방빌딩 501호(중곡동)
  • 대표전화 : 02-2294-7322
  • 팩스 : 02-2294-732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주연
  • 법인명 : 성광미디어(주)
  • 제호 : 성광일보
  • 등록번호 : 서울 아 01336
  • 등록일 : 2010-09-01
  • 창간일 : 2010-10-12
  • 회장 : 조연만
  • 발행인 : 이원주
  • 자매지 : 성동신문·광진투데이·서울로컬뉴스
  • 통신판매 등록 : 제2018-서울광진-1174호
  • 계좌번호 : 우체국 : 012435-02-473036 예금주 이원주
  • 기사제보: sgilbo@naver.com
  • 성광일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성광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sgilbo@naver.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