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책임과 실천: 복지부동(伏地不動)과 제모의(諸母依)
정치의 책임과 실천: 복지부동(伏地不動)과 제모의(諸母依)
  • 성광일보
  • 승인 2019.12.30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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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항석/논설위원

복지부동(伏地不動)!

정항석/논설위원

글자 뜻이나 용례로 보아 이 사자성어는 ‘땅에 납작 엎드려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몸을 사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의 질책이다. 기실, 이 말은 그 어원에서 어떤 일화를 배경으로 하지 않는다. 훗날 이러저러한 환경에서 생성된 것으로, 이와 비슷한 말은 <후한서(後漢書卷四十三 朱樂何列傳 第三十三)>에 전한다.

때는 바야흐로 A.D. 23년, 한나라 외척이었던 왕망(王莽 B.C.45-A.D.23)이 제위를 찬탈했다가 패하던 그해 즈음이다. 그때 주휘(朱暉)라는 아이가 있었다. 생몰연대가 분명하지 않다. 그의 자(字)가 문계(文季)이기 때문에 주계(朱季)라고도 하며 후한 명제(後漢明帝) 남양(南陽) 원현(宛縣) 사람이다. 그런 그에 관하여 열전으로 전하는 데는 까닭이 있다. ‘i)강직(彊直)하여, ii)공무관리의 모범이고(畏惠), iii)국민의 존경(懷惠)’으로 그를 상징하고 있다. 기록은 주계가 임회 태수(臨淮太守)로 부임하면서 공무와 정사를 제대로 하였다고 한다. 하여 그곳 관리와 백성들이 그에 대하여 이르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강직으로 말하자면 스스로 그 모범을 보이는 남양의 주계이려니(彊直自遂 南陽朱季)!
사령과 공무서리들은 그를 경외하고 백성들은 그를 은혜로 기린다네(吏畏其惠 人懷其惠)!

이러한 것에 견주어, 그런 그와 복지부동은 얼핏 부합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복지부동을 본디의 포괄성에서 짐작해야 한다. 그가 13세 때의 일화는 복지부동을 어떻게 풀이하고 다가갈 것인지 그리고 어떤 해석의 생산성에서 투사해야 할지를 보여준다. 딴은 이렇다.

주계는 일찍이 홀로되었다(暉早孤). 세상이 혼란에 처하여(天下亂),부득이 먼 친척들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 완성(宛城)으로 가는 도중에(與外氏家屬從田閒奔入宛城), 반란군을 만나게 되었다(道遇腢賊 한조[漢朝]의 입장에서는 이들을 도적으로 기록함). 이에 같이 있던 모든 이들이 당황하여(昆弟賓客皆惶迫) 땅에 엎드려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伏地莫敢動). 이런 환경에서는 질서와 거리가 멀다. 혼란 그 자체이다. 어느 누구도 사회적 약속에 따른 인간적인 모습을 보일 리가 없다.

“가진 것을 모두 내-놓아라!”

아수라장이며 두려움과 떨림이 엄습하였고, 다 내어 준다고 해도 산다는 것을 보장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다. 약간이라도 빈정이 상하면 여지없이 목숨이 날아갈 판이다. 그때이었다. 어린 주계가 외쳤다.

“재물은 다 가져 갈 것이나(財物皆可取耳).”

이 소리에 그에게 이목이 쏠렸다.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야 하는 이들은 ‘이 어린 것이 무엇을 안다’고 도적들을 자극하는지 원망의 눈초리를 보냈고, 도적들은 어이가 없었다. 공히, ‘뭐야...’ 하는 표정을 하고 있을 때 주계는 또 다시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의 옷가지를 가져갈 수 없다(諸母衣不可得)!

‘어떻게 해도 목숨도 붙어있을 형편이 못되는 데 누구를 위해 무슨 ...’ 주계이외에 모든 이들이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또 다시 주계가 외쳤다.

“오늘은 이 주휘가 죽는 날이다(今日朱暉死日也).”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죽음을 각오하고 어떤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주계가 나서는지 도통 이해 할 수 없었다. 어찌되었든 이 말에 모두가 경악했다. 손이 입으로 들어갈 어처구니없는 그림이 그려진다.

도대체 제모의(諸母衣)가 뭐라고!

‘제모의’를 해석하기가 까다롭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인간적인 면과 어린 것의 배포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공익의 가치(all of the valuables for all)로 보면 무리가 없다. 하여튼, 이 말을 들었던 도적의 무리 역시 무엇을 아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단지 어린이의 배짱만을 칭찬하지는 않았던지 그는 ‘어린 것의 가슴에는 기상이 있구나’ 하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기록에는 그렇다.

여기서의 복지막감동(伏地莫敢動)은 복지부동(伏地不動)과 겉말은 같지만 그 속뜻은 다르다. 상황의 앞뒤를 자를 것이 아니다. 그의 됨됨이를 가리키는 것이나, 그렇게 해야 할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우리가 읽어야 할 대목은 이렇다. 역할과 기능 그리고 책임과 실천의 생산성이다. ‘해야 할 것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궁극적인 것을 대입하는 것이다. 단지 납작하게 엎드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이른다. 주계가 보여준 모습은 이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것을 공인(公人)으로서 보여주었다고 <후한서(後漢書)>는 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강직(彊直)하고, 모범이 되고(畏惠), 존경(懷惠)의 대상이 어디 주계뿐일까!

환경이 어떠하든지 맡은 역할은 실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단순히 철밥통을 앗기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잃을 수 있음에도 그는 해야 할 것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근자의 정치가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보아 차라리 이 말(복지부동)이 적용되었으면 하는 ‘넋두리 바램(?)’도 있다. 무슨 일을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국민을 위해 도와주는 형국이니 말이다. 그냥 푸념으로 넘길 일이 아니다. 국민들을 위하여 단기적인 것은 고사하고 중장기적인 정책이 없어 보일 뿐만 아니라 ‘왜 그들이 있는가’ 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복지막부동의 주계와 같이 시련의 극복을 위한 대안의 제시는 고사하고 마음 담긴(제모의諸母衣) 질책이 ‘가망 없어 보인다’는 것이 그것이다. 정치가 가지는 속세적 속성도 그렇고 이를 쫒아가는 무리들 역시 그런 치들이라고 치부하면 그럴 것이다. 가장 심각한 것은 이것이다. 정책과 방안 등 대안적 시각은 늘 요구받고 있다. 현재를 위기로 볼 때 이 위기의 원인과 과정 그리고 예측가능한 미래결과 등의 분석과 연구를 통해서 대안이 제시되어 오류를 시정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하는 곳에서 정작 하지 않는 탓이다. 이는 단지 단순 질책이 아니라 실천가능하고 실용성 있는 대안적 시각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대학과 언론은 그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가!

잠시 여기서 역의 상황을 따져보자. 같이 있었던 주계를 포함하여 친척과 동네사람들(가상)이 무엇도 하지 않은 채, 도적들의 처분만 바라면서 가장 측은한 표정으로 동정심을 구하고자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찌하여 살아났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들은 도적들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아니다. 게다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란 기껏 해야 도적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다. 정말 무엇도 보장받지 못하는 나쁜 상황이다. 그것이 보편적일 것이다. 여기서 ‘선(善)한 체 증후군’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영역이 있다. 왜냐하면 연구하는 대학과 알리는 언론은 위와 같은 상황에서도 이를 바로잡겠다는 암묵적 약속을 하는 사회적 지도층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따져보자. 한국은 세계에서 문자해독이 높은 국가이며 인구당 고등교육을 받은 대학졸업율이 매우 높다. 그리고 인구밀도에 비하여 대학이 많은 국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사회발전을 위한 쓸모 있는 소리와 글은 그리 많지 않다. 서구의 것을 빌리는 데는 재빠르지만 자체 연구가 미진하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일이다. 그 유용성에서 문제가 있다. 그리고 정작 말을 해야 할 곳임에도 원용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따분한 연구 사이에 연구실에서의 약간의 유희적 오락도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의 농도가 짙어서야 하겠는가! 또한, 언론 역시 그렇다. 인구수에 비하여 언론은 그 수에서 엄청난 정도이다. 광고와 홍보를 위한 것까지 포함해서 그렇다. 문제는 그것이 대다수 공익적 가치와 어떻게 연계되는가! 자기 밥그릇은 이미 챙겼으니 할 필요가 없는가!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는가! ‘선(善)한 체 증후군’이다.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니나, 이것이 발전과 진전을 가로막고 있다.

물론, ‘우리 사회에서 누가 선한가’를 묻는다면, 아마도 예수께서 말씀한신 바대로 ‘돌을 던질 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공익(諸母依)’을 위한 것에는 일부만이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누군가의 고발이 아니면 들추기도 무서운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정말 나쁜 의미의 복지부동(伏地不動)의 사회이다. 그러한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해봐야 손해’라는 것이다. 한 해를 마치거나 시작할 즈음 몇몇 대학인들은 무슨 사자성어를 만들어 낸다. 그것으로 할 일을 다 한 것인가! 제모의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이 없다. 역시 ‘선(善)한 체 증후군’을 보여준다. 씁쓸하다.

역사는 단절과 지속이 번갈아가면서 이어지고 있다. ‘그것이 발전인가 그렇지 않는 것인가’ 하는 것은 아무도 단정하지 못한다. 그 까닭은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무슨 큰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명시적이지는 않으나 그 사회적 기능을 맡는다는 곳에서 그 일을 책임과 실천을 보여주어야 한다. 우선적으로 이를 할 수 있는 교육(대학)과 언론이 그것이다. ‘철밥통’의 크기만큼 많은 국민은 그 그릇에 존경을 담고 싶다. 그렇지 못하다면 시급하게 그들은 스스로 개혁의 대상이라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육은 알고 있는 것을 제대로 말해야 하고 언론은 이를 바탕으로 논리적으로 여론을 설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복하거니와, 이 두 영역이 이것을 하고 있는가! 더 이상 ‘밥그릇 챙겼다고 외면할 일이 아니다. 복지부동은 물론이고 ‘선(善)한 체 증후군’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린 열세 살의 주계가 외쳤던 것처럼 공인체(公人體)로서 ‘국민모두(諸母衣)를 위하여’, 어떤 상황에서도(道遇腢賊) ‘할 것과 하지 않을 것을 가려주어야 할 것(不可得)’이다. 많이 배우기 않은 13세의 주계는 해야 할 것을 약 2000년 전에 외쳤기 때문이다.

늘 그렇듯이 한 해가 기울고 있다. 오는 새해에는 강직과 존경 그리고 국민들이 은혜에 감동받는 사회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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