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아테네 가는 배(1)
<장편소설> 아테네 가는 배(1)
  • 이기성 기자
  • 승인 2020.01.08 18: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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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성 / 성동문인협회 고문
정소성 / 소설가
정소성 / 소설가

기차가 브린디지에 이르렀을 때에는 벌써 진은 어둠이 내려 있었다. 브린디지는 장화같이 생긴 이탈리아 반도의 발뒤꿈치쯤에 자리한 항구도시이다. 나폴리를 떠난 기차는 길쭉한 반도의 허리를 마구 가로질러 달렸다. 온종일 흐린 하늘에 비가 뿌렸다.

이탈리아는 한반도 세 배 크기의 땅덩이지만 인구는 거의 비슷한 5천만 정도이다. 그나마 4분의 3쯤이 반도 북부에 몰려 살고 있다. 반도 중앙부로 달리는 기차 칸은 텅 비어 있었다. 이따금 한두 사람이 탔다가 내리곤 했다. 늦가을 비라 한기마저 들었다.

브린디지가 아드리아해 쪽으로 향한 항구도시인 줄 알고 있었으나, 막상 플랫폼에 내려선 종식은 전혀 방향감각이 없었다. 낮같이 밝은 플랫폼이었다. 수은등 불빛이 너무나 밝아서 짙은 음영을 배경으로 내리는 빗줄기는 그만큼 뚜렷이 자취를 드러냈다. 도착한 사람들과 기다리던 이들이 빗줄기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데 어울렸다. 부둥켜안고 볼을 비비거나 입맞춤을 했다.

종식은 피로가 온몸을 덮쳐 옴을 느꼈다. L시를 기점으로 한 여행은 토리노, 로마, 나폴리를 거쳐 벌써 일주일째 접어들고 있었다. 이탈리아를 훑고 그리스로 가 볼 참이었다.

비록 오늘 밤 아테네로 떠나는 배편이 있다 해도 이 밤은 브린디지에서 지내고 싶었다. 지친 몸은 휴식의 필요성을 아우성쳐 요구해 왔다.

종식은 플랫폼에 내려섰다. 한기가 가느다란 빗줄기를 따라 온몸에 파고들었다. 언젠가 읽은 적 있는 영국 시인 바이런이 생각났다. 19세기 첫 무렵 그는 그리스 독립전쟁을 도우러 가는 길에 이 브린디지를 지나갔다. 십 년 가까이나 끈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었다. 그리스를 내놓지 않으려는 터키의 집념은 대단했다. 몸이 허약하고 다리 까지 절었던 바이런도 종식 자신처럼 피로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독립전쟁의 핵심인물은 입실란티 형제로 형은 루마니아에서 주로 활약했다. 그 휘하의 비밀결사가 루마니아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그 영향은 그리스 서쪽 최대의 외항 파트라스 시민들을 자극했다. 이곳의 아우는 봉기한 그리스인들을 모아 터키군에 저항했다. 그들의 저항은 정당했으나 역부족으로 터키군의 총칼에 처참히 죽어 갔다. 이곳 브린디지항 선착장에 서서 출렁이는 아드리아해 물결을 바라보던 바이런은 눈물을 뿌렸다고 한다. 메테르니히의 압력에 굴복한 온 유럽 국가들은 그리스의 죽음에 외면했다. 그러나 영국은 그리스를 잊지 않았다. 특히 그때 외상 카닝이 그랬다. 그것은 그들의 시인 바이런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시인의 뜨거운 영혼을 외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인파를 따라 종식은 플랫폼을 걸어 나갔다. 짙은 소금냄새가 코끝에 와닿았다. 출렁이는 바다를 가슴 깊이 안고 있는 항구에 와 있음을 그는 절감했다. 뚜우― 기적소리가 들렸다. 그리 가까운 거리는 아닌 듯했다.

기적소리는 종식에게 아득한 여수의 감정을 일깨웠다. 지친 몸이었지만 여수는 감미로웠다. 짙은 구름과 어둠이 깔린 아드리아해로 거대한 기선을 타고 미끄러져 가는 것이, 항구의 여관방에 머무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았다. 여수는 피로를 따뜻이 녹여 줄 수도 있으리라.

고독감도 가슴을 적셔 왔다. 외국 유학생활이란 워낙 외롭지만, 그나마 모여 사는 한국인들을 떠나 혼자 떠돌기 일주일이나 되지 않는가.

너무 오래 끌어온 학구생활은 그의 몸과 마음을 매우 피폐케 했다. 서른이 훨씬 넘었으나 여태껏 혼자였다. 누군가를 거느릴 처지가 못 되었다. 정상적인 직업이 없기 때문이다. 이 대학 저 대학 보따리장사를 하면서 목숨을 이어 가는 세월이었다. 지도교수가 보다 못해 장학금을 하나 주선해 주었다.

“죽는 한이 있어도 종이쪼가리를 하나 받아 오라고.”

“…….”

노은사는 공항까지 나왔다. 5년이나 버티는 동안 장학금은 끊어졌다. 이른바 학위라는 종이쪼가리를 한 장 받기는 했다. 이 종이 한 장이 그에게 대학에서의 정식자리 하나를 마련해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왠지 자신이 없었다. 애늙은이처럼 되어, 모든 것을 지레짐작해서 포기해 버리는 습관이 생긴 그였다.

서양사가 전공이었지만, 그리스 여행은 처음이었다. 남이 들으면 놀랄 일이다. 다른 이유는 없고 다만 하루하루 삶에 여유가 없었다. 학업을 따라가기 위해 밤낮없이 책을 읽어야 했고, 틈만 나면 살기 위해 노동을 해야 했다.

플랫폼 어디선지 누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귀에 익은 듯한 목소리였다.

“형님—.”

목소리 주인공은 분명 주하舟河였다. 종식은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개의 목발 위에 윗몸을 얹은 그가 수은등 불빛 아래 푸르스름하게 서 있었다.

여기서 그를 만나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종식을 ‘형님’이라고 부르며 유난히 따랐다. L시의 한국인 사회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주하였다. 평범하게 섞여 놀지 않기 때문이었다. 괜히 젠 체한다는 것이다.

주하는 사실 좀 역겨움을 주는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뭐니 뭐니 해도 그의 맥없이 흔들거리는 두 다리가 그랬다. 복도를 걸을 때면 두 개의 지팡이가 시멘트 바닥과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따악따악 하는 음향은 듣기에 끔찍했다. 두 다리에 버티는 힘이 조금이라도 있어서 어딘가에 기댈 수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못하다. 지팡이를 치우면 그는 엎질러진 물처럼 땅바닥에 퍼드러져 버린다. 자신의 지팡이 위에 그대로 퍼드러질 때도 있었다. 좁은 기숙사 방에 주하가 찾아오면 여간 거추장스럽지 않았다.

게다가 주하는 자신의 유창한 프랑스어 실력을 어느 누구를 위해서도 써먹지 않는다. 종식이가 보기 에 주하의 프랑스어 실력은 그리 대단하지는 않다. 프랑스 초등학교 5학년 어린이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9년째 이 나라에 머물고 있지만, 텔레비전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만큼 귀의 훈련은 힘들다. 하지만 20여 명 남짓한 한국 유학생들 가운데 프랑스어 말귀를 알아듣는 사람은 그 하나뿐이었다. 시청에 체류카드를 내러 가거나, 까다롭기 짝이 없는 신학기 등록을 하거나, 시험등록을 할 때 주하를 앞세우거나 도움받지 않을 수 없었다. 자비 유학생들의 셋방 구하기, 국비 유학생들의 학생 후생센터 접촉, 교내 식당권 사기 등 주하가 나서지 않으면 골탕 먹을 일들이 허다했다. 그러나 주하는 쉽사리 동포 학생들의 통역 요구에 응해 주지 않았다. 귀찮아했다. 그는 뭔가 되통스런 인상을 교포 유학생들에게 주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기벽을 가졌다. 거의 언제나 정오가 지나서야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오전 중에 기숙사 방을 찾아가는 사람은 무조건 면회 사절이었다. 새벽 네다섯 시까지 이것저것 들척거리며 시간을 보내다가 먼동이 틀 무렵에야 잠으로 떨어진다.

또 그는 끝없이 여행을 떠나곤 했다. 너무도 가난하게 사는 그가 무슨 돈으로 그렇게 자주 여행을 떠나는지 알 수 없어 모두들 궁금히 여겼다. 알고 보니 그는 완전 오토 스톱으로 온 유럽을 돌고 있었다. 프랑스 동남부에 자리한 L시에서 노르웨이의 오슬로까지 48번이나 오토 스톱을 해서 다녀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가 아침나절을 잠으로 때우는 것은 아침 한 끼를 아끼기 위해서라는 이야기도 있었고, 바다 위롤 떠도는 한 척의 작은 배라는 뜻을 가진 주하라는 이름이 본명이 아니라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들은 확인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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