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아테네 가는 배(2)
<소설> 아테네 가는 배(2)
  • 이기성 기자
  • 승인 2020.01.22 10: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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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성/성동문인협회 고문
정소성/성동문입협회 고문
정소성/성동문입협회 고문

주하가 사지를 버둥거리며 어디를 그렇게 돌아다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더욱이 재작년에 학위논문을 발표하고 난 뒤부터 그는 부쩍 더 자주 기숙사촌에서 자취를 감추곤 했다. 한국인 유학생들은 그의 거취에 대해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힘든 학위를 받았으면 서둘러 귀국하는 게 순리였다. 이곳에서 무슨 직업을 찾은 것도 아니고, 노랑머리 아가씨와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이 낯선 땅에 10년 가까이 남아서 무슨 생각을 하며, 무엇을 할 작정인가.

“주하…….”
종식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삐끗해서 퍼드러지면 사정없이 엎질러진 물이 되는 주하. 브린디지와 바이런. 바이런과 주하. 주하와 브린디지. 그가 지금 목발 위에 윗몸을 얹고 흐물거리는 두 다리를 그대로 내려뜨린 채 여기 브린디지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목발을 앞으로 내밀어 몸을 전진시켰다. 플랫폼의 수은등이 밝다고는 하지만 밤이라 그의 표정을 살필 수는 없었다. 어둠 속에 드러난 그의 옷차림은 여느 때와 달랐다. 놀라운 사실이었다. 종식은 주하를 안 지 5년이 지났지만 새 옷으로 갈아입은 그를 별로 본 적이 없었다. 꺼무레한 진바지에 가지 색깔의 점퍼 차림은 변할 엄두를 내지 않았다.

달포 전 종식이 그리스 여행을 떠난다는 소문이 한국 유학생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다. 꽤 이슥해진 밤에 주하가 찾아왔다. 그의 목발이 바닥 때리는 소리를 더욱 요란스레 냈다.
“아니, 그게 정말입니까?”
방문을 밀고 들어서자마자 주하는 대답을 다그쳤다. 그의 행차는 거창하다. 언제나 큼지막한 두 개의 목발이 따르기 때문이다.
“주하,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오?”
종식은 의아해서 물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믿어지지 않을 정돕니다.”
“무슨 소리요? 여기 프랑스에 앉아서 아테네 여행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대단한 일이지요. 대단한 일이구말구요.”
심상찮은 주하의 방문부터가 종식의 마음을 켕기게 했다. 게다가 그는 계속 뚱딴지같은 소리만 늘어놓고 있지 않은가.
“왜 대단한 일이란 말이오? 대관절….” 
종식은 불쾌감이 앞섰다. 서양사가 전공이면서 이제야 겨우 그리스 여행을 떠나는구나 하고 놀려 대는 듯했다.
“아드리아 해를 배 타고 가니까요.”
“나 참 ! 내가 뗏목을 타고 단독 항해라도 한단 말이오?”
“히야? 그리스 여행이라?.”
주하는 계속 기성을 뱉었다. 종식은 별다른 신통한 대답을 않는 주하가 얄미웠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찾아온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한국 사람들을 피해 다니던 주하가 아닌가. 그의 얼굴은 늘 일그러져 있었다. 여느 때 종식에게만은 무슨 까닭에서인지 꽤 아는 척했기로서니, 이렇게 자진해서 찾아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는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 순간 뭔가 가슴에 당겨지는 어떤 섬광 같은 것을 종식은 느꼈다. 세계인의 관심에서 거의 잊히다시피 한 나라 그리스. 몇몇 선주들의 사생활만이 관심을 끌 뿐인 나라지만, 역시 이 나라는 세계의 값진 보물을 애오라지 가슴에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그의 뇌리를 때렸다.

조악한 산악이 빼곡히 들어찬 이 나라에 갑자기 끝없이 넓고 두터운 숲이 들어선 듯했다. 그것은 무언의 숲이었다. 그러므로 상징의 숲일 수가 있었다. 거기에서는 상징의 섬광이 솟구칠 수 있었다. 주하는 여기에 녹은 것인지도 몰랐다. 무언의 숲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래도 무궁하게 이 땅에 서려 있는 신화들의 존재 때문이리라.

“나도 좀 데려가 주실 수 있는지?”
“무슨 소리요? 주하…… 누가 누굴 데리고 가고가 어딨소? 가고 싶으면 그냥 가는 게지. 또 떠나는 날짜가 같으면 동행이 될 수도 있고…….”
“형님은 이번 여행을 마치면 귀국하실 게 아닙니까?”
“그럴 작정이오.”
“하 참! 기막힌 우연입니다…….”

그러나 종식은 주하가 결코 그리스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스까지의 교통요금을 주하는 가지고 있지 못했다.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유고, 알바니아로 빠질 수 있다면 오토 스톱의 명수인 주하가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대한민국 여권으로는 유고와 알바니아를 지날 수 없다. 적발되면 하차되어 한반도 북쪽나라 대사관으로 인도된다. 이탈리아 동남에서 배를 타고 아드리아 해를 건너 아테네의 외항 파트라스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배는 오토 스톱이 안 된다. 승선권이 없으면 배에 오를 수 없다. 돈 없는 주하가 아무리 날고뛰는 재주를 가졌더라도 그리스 여행을 할 수는 없으리라.

종식의 그리스 여행에 대해 그렇듯 궁금해하던 주하가 대학촌 기숙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종식은 궁금했다. 자기를 데리고 떠나 달라며 꽤 적극적으로 나오던 그가 종식 자신의 출발을 보기도 전에 잠적하다니 납득되지 않았다. 그렇게도 간절히 떠나는 날짜를 캐묻지 않았던가. 어디로 사라졌을까. 이 낯선 땅 어느 구석으로 너덜거리는 두 다리를 쑤셔 넣었을까. 짐작 가는 데가 없었다. 그러나 워낙 많은 곳을 싸돌아다니는 주하인지라 갈 곳은 있을 듯했다.

기이하게도 그는 가톨릭인가 하면 프로테스탄트였다. 성당에도 다니고 교회에도 다닌다. 이 분야로 여러 가지 아는 것이 많았다. 알고 지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아마 이번에도 이들의 초대를 받았거나 자진해서 찾아 나선 듯했다.

“주하, 당신 성당이야 교회당이야? 어느 것 하나만 하라고. 하느님이 화내시지 않아?”
“그게 그거지요. 사실 뭔가 풍성한 것은 프로테스탄트 쪽입니다. 자유롭고 미국식이지요. 하지만 여기 바닥은 단연코 가톨릭입니다. 거의 90프로죠. 이 바닥에서 행세깨나 하는 사람은 다 가톨릭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프로테스탄트 하나 가지고서는 안 되지요. 양수겸장으로 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하, 무슨 소리요? 도대체 적대관계에 있는 두 교파를 아울러 믿다니?”
“난 교파를 믿는 게 아니라 주님을 믿습니다.”

주하는 신·구교의 여러 가지 행사에 부지런히 참석했다. 목발소리도 요란한 그의 모습이 비치지 않는 그네들 모임이란 없을 지경이었다.
종교에 관련된 주하의 행적은 종식에게 꽤 신비로운 미지의 장이었다. 그가 갑자기 자취를 감추면 종교적인 이유에서일 거라고 추측해 볼 뿐이었다.

종식이 로마행 밤기차를 타기 위해 해거름 녘에 기숙사촌을 떠날 때까지 주하는 돌아오지 않았다. 기차는 그로노블을 거쳐 샹베리에 닿았다. 깊은 밤 장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까마득히 높은 알프스가 흰 눈을 이고 어둠 속에서 다가서고 있었다. 유럽에서도 고지대로 소문난 프랑스의 사브와 지방이었다. 파리에서 로마로 빠지는 야간 급행열차는 시간을 두고 좀 기다려야 했다. 어둠의 장막을 깔아뭉개며 알프스의 웅자가 가슴을 짓눌러 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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