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사·모·곡(上)
<수필> 사·모·곡(上)
  • 이기성 기자
  • 승인 2020.02.25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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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박 / 성동문인협회 수필분과장
손자와 함께 김종박
손자와 함께 김종박

어머니가 소천하신 지 거의 5년이 다 돼 가고 있습니다. 고아가 되어 살면서 어머님 생각이 간절합니다. 살아계셨으면 금년에 90세가 되셨을 것입니다. 집에서 혼자 식탁에 앉아 점심 식사라도 하게 되는 날이면 부쩍 생전의 어머님 생각이 납니다. 

  공직에서 강제 명퇴당해 집에서 어머님과 함께 단둘이 점심 먹던 서글픈 그 모습이 떠오르고 늙으신 어머님 생전의 얼굴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그럴 땐 나도 몰래 갑자기 눈물이 왈칵 솟아 한동안 멍해지고 먹는 밥숟가락이 멈춰지기도 하니 칠순인 내가 찰딱서니 없는 어린애가 된 기분이 들곤 합니다.

어머님께서 사회복지관 등에 가실 때 자주 이용하셨던 지하철을 어머님의 자식으로서 어머님을 닮아서인지 지공거사(地空居士)가 된 뒤부터는 저도 자주 이용합니다. 그리고 핸들을 놓은 지 오래된 저로서는 그게 편하기도 합니다. 머리가 허예지다 보니 저도 어느덧 경로석 애호자의 한 사람이 됐고 이용할 때마다, 경로석에 앉으신 하얀 머리의 여성 어르신을 볼 때면 문득 어머님 생각이 납니다만, 지하철 계단을 오르는 나이 든 모습들을 보게 되면, 특히 구부정한 몸으로 가장자리 버팀대를 잡고서 하나둘 힘들게 쉬엄쉬엄 계단을 오르시는 어머니들이 눈에 띄면 어머님 생각이 납니다. 가끔 실버타운에 계시는 장인장모님을 뵐 때, 늙으신 장모님을 뵐 때 생전에 그분들과 같이 계셨던 모습들이 아른거려, 병골이신 장모님보다 더 건강하셨던 어머님이 먼저 가셔서 서럽도록 어머님 생각이 납니다.

어머님을 그리다가 보면 저의 초등 2학년 말 무렵이 생각납니다. 어머님이 그해 추운 1월 달에 서울로 홀연히 올라가셨지요. 언젠가 장성해서 생각해보니 어머님 연세 서른이 되면 살던 집을 등지고 떠나기로 전부터 독하게 마음먹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들인 저 혼자만 남겨 두고 갑자기 어려운 상경을 결심하기엔 여느 사람들에게는 잘 이해가 가질 않아서입니다.

아마도 그 결심은 아들인 제가 초등 1학년을 마친 후 생각지도 못한 우등상을 받아 오니 깜짝 놀라시고 어떻게든 자식을 크게 가르치시겠다고 굳게 마음먹으셨고 여자의 몸으로서 이렇게 이곳 시골에서 농사만을 계속 지어서는 자식 가르치길 어렵겠다고, 아니 도저히 불가능하겠다고 스스로 생각하시고 당시로서는 여느 사람으로선 생각지도 못한 어떻게든 서울로 돈벌이 갈 비밀스런 결심을 혼자 굳혀 가고 계시다가 때가 임계점에 다가오니 집안 어른들게 단호하고 분명하게 어머님의 뜻을 천명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우등상을 받지 못했어도 젊은 어머님은 돈을 벌어서 자식을 가르쳐야겠다고 결심하실 수도 있었겠지만, 제가 우등상을 받음으로써 그것이 촉발적인 한 계기가 되어 그 결심을 더욱 확고히 굳히시게 하는 데에, 불을 붙인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아주 어렸지만 지금도 그날 밤이 생각납니다. 밤에 호롱불을 켜는 시대인데 모자(母子)가 사는 우리 방에 집안 어르신들이 모여 오셔서 어머님을 사이에 두고 심각한 얘기가 밤늦도록 오간 회의를 하면서 몇 어르신은 울고도 있었던 심상치 않던 상황을 어린 난 먼발치에서 그저 지켜만 보았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커서 생존하신 집안 어르신께 여쭤보니, 아들을 가르치기 위해 서울로 돈벌이를 꼭 가야만 한다면 집안 어르신들이 그 돈을 만들어줄 터이니 어머님에게 상경은 하지 말아 달라는 권위적인 집안 어르신들의 끈질기고 집요한 집단 설득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어머님도 설득당해 그렇게 한다고 하시고 다만 이 사실만은 알려야 하니 친정에는 다녀와야 한다고 하시기에 그것은 어르신들이 동의하셨는데, 친정에 가신 후 바로 상경을 감행하셨다고, 이미 상경 결심은 오래전에 굳어졌기에 친정에 가서 알린다는 말은 끈질긴 어르신들의 설득을 모면하기 위한 말씀에 불과했다고 전해 주셨습니다.

그때 집안 어르신들이 어머님의 상경을 한사코 반대하신 속내는 돈 벌러 서울 간다는 것은 젊은 아낙네의 속임수고 재가(再嫁)할 것이 분명하니 재가란 당시로선 가문의 큰 수치라는 꽉 막힌 세상이어서 어머님의 재가를 가장 염려했기 때문이었다고….

그래서 저는 숙부님께 맡겨져 초등학교을 마쳤고 그 후로도 친척 집을 전전했지만 어머님의 희생적인 뒷바라지로 지속된 학업을 마쳤으니, 그날의 집안 어르신들의 염려는 한낱 기우에 그쳤음을 그 후 계속된 서울의 어려운 직업전선을 줄곧 버텨 냄에서 잘 보여 주셨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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