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아테네 가는 배(4)
<소설> 아테네 가는 배(4)
  • 이기성 기자
  • 승인 2020.02.25 16: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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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성 / 성동문인협회 고문
정소성 / 소설가
정소성 / 소설가

그전까지 볼 수 없었던 사진틀 하나가 책상 위에 얹혀 있었는데, 비스듬히 경사진 유리 위에 전깃불 빛이 쏟아져 누구의 사진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종식은 몸을 당겨 그것을 집어 들었다. 찬찬히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주하 어머니 사진임을 알 수 있었다. 파파할머니였다. 희디흰 머리칼이 인상적이었다. 자세히 보니 백발 때문이지 팍삭 늙지는 않았다. 아울러 깨끗한 용모였다. 사진은 볼수록 그 주인공이 아직 완전한 늙은이는 아니고, 그런대로 고운 얼굴의 소유자임을 알게 해 주었다.

“이 사진 언제 찍은 거요?”
“지난봄에 찍으셨대요.”
“백발에 가려 연세를 짐작하기 어렵겠소이다.”
“예순을 갓 넘으셨을 겁니다, 아마.”
주하는 대화가 엘리자베드에게서 자기 어머니로 넘어가 좀 마음 놓이는 표정을 지었다.
“대개 염색을 하시지만 이 사진만은 그대로 찍으셨네요. 날 빨리 들어오게 하려고 그러신 것 같기 두 합니다만.”
백발이지만 숱이 짙어 컬의 흐름이 풍부해서 멋있어 보였다.
이마 부분 머리털 뿌리께가 검어 백발과 조화를 이루었다. 큼지막한 눈망울에 가느다란 목줄기가 눈에 들어왔다.
“젊었을 때는 이쁘셨겠소. 그래 홀어머니에 외아들이오?”
“나 참, 10년 넘게 이러고 있습니다. 이젠 밉다고 돈도 안 부쳐 주시지요. 오래되었습니다.”
“주하, 당신 여기서 뭣 하는 거요? 학위 끝난 지 벌써 몇 년이 되었소? 유학생이 학위 끝나면 돌아가야지….”
“학위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주하는 맥없이 두 다리를 흔들어 대며 거푸 잔을 비워 냈다. 학위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니 납득되지 않았다.
“아하! 엘리자베드라도 하나 꿰차자는 거요!”
주하는 웃음을 터뜨렸다.

“형님, 날 좀 웃기지 마십시오. 난 형님을 좋아합니다. 뭔가 탈진한 듯한 모습과 생각을. 청혼하는 것은 저쪽입니다.”
“무슨 소리! 주하 당신이 매달리고 있어! 치사하기는!”

종식도 술기운이 올랐다. 주하는 꽤 취하는 모양이었다. 술주정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붉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과는 달리 두 눈동자에는 총기가 빛을 더해 갔다. 그는 지나는 말로 이북에 아버님이 살아 계시다는 이야기를 했다. 엘리자베드가 불가리아계니 뭐니 하면서 욕을 해 대기도 했다. 양년들 체모가 금발이라 영 기분 잡친다고 씨부려 대기도 했다. 그러고는 낄낄 웃어 댔다.

주하에게 청혼했다기에 의아하게 생각되던 엘리자베드가 다른 각도에서 종식의 눈앞에 부각되어 왔다. 그녀가 불가리아계라는 사실이었다. 불가리아라면 공산권이다. 우리는 가 볼 수 없는 나라다. 그러나 불가리아는 종식이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그리스와 인접해 있다.

세계 식민지통치사에 있어 터키인들의 그리스 통치만큼 가혹했던 것도 흔치 않다. 조금이라도 능력 있어 보이는 그리스인 남자는 단번에 살해해 버렸다. 저항의 씨를 잘라 버린 것이다. 부인과 어린이들은 노예로 팔렸으며, 농민은 터키인 영주에게 토지를 헌납하고, 자신은 농노가 되어야만 했다. 가톨릭교도에게는 인두세가 부과되어 국고의 중요한 재원이 되었다.

그리스인 대량학살은 바이런을 불렀다. 그리스의 터키 항쟁에 도움을 준 나라가 불가리아였다. 그들은 발칸동맹으로 뭉쳤다. 그리고 불가리아인의 그리스 유입이 시작되었다. 한창때는 북부 그리스 트라키아 지방에 15만에 가까운 불가리아인들이 살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이들 불가리아인들은 자기 나라로 돌아갔으나 잔류인들은 결코 적지 않았다.

종식은 엘리자베드가 이 불가리아계 그리스인이 아닌가 여겨졌다. 오늘날에도 불가리아와 그리스는 서로 내왕하면서 지낸다. 자신의 그리스 여행계획을 소문으로 듣고 홍분해서 찾아온 주하의 태도가 조금은 심상치 않았다. 그것이 엘리자베드의 혈통과 어떤 관계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종식의 머리를 스쳤다. 오늘날 그리스와 프랑스는 사상 최대의 밀월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두 나라 다 서구 지향적 사회당 정권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유창한 불어를 구사하는 그리스 유학생들을 기숙사촌에서 자주 만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지답사를 그리 해 보지 못해 그야말로 책상물림 서양사학도지만, 종식의 이 추측은 틀림이 없을 듯했다. 신·구교의 울타리를 넘나드는 주하가 그리스정교의 뒷마당이라고 마다했을 리 없었다. 터키 제국은 강력한 징세책의 하나로 그리스정교회의 존속을 눈감아 주었다. 교회에 세금을 호되게 매기자는 생각이었다. 프랑스로 흘러든 엘리자베드가 계율이 엄격한 구교보다 신교의 유혹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면, 그녀와 주하 사이에 목사의 존재가 끼어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주하!”
종식은 고함을 꽥 질렀다. 그가 취해서 해롱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눈을 치떴다. 그의 눈은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불가리아계라니? 무슨 소리야….”
“어이쿠! 불가리아 사람은 아닙니다. 걱정은 관두쇼!”

그는 심한 반발감을 내보임으로써 그쪽으로 대화가 이어짐이 편치 않다는 의사표시를 했다.
기차가 알프스를 넘었을까 생각해 봤다. 그는 머리맡의 유리창으로 손을 뻗어 커튼을 들춰 보았다. 시야는 어둠에 차단되어 있었다. 기차간에서 흘러내리는 전깃불만이 조금 시야를 터놓을 뿐이었다. 좁은 시야 속에는 아름드리 침엽수만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종식은 커튼을 다시 내리고 몸을 돌렸다. 금발의 침입자는 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배낭을 내리고 구두를 벗었다. 두터운 등산복을 하나씩 벗었다. 그녀는 춥지도 않은지 바지까지 벗었다. 종식은 눈길을 돌렸다. 별난 잠버릇을 가진 사람도 있는 법이다. 침대 속에 들어가 잠을 청할 줄 믿었던 그녀는 뭔가를 꺼내어 머리맡 꼬마전구 앞에 세워 놓았다. 성모 마리아 상이었다. 그리곤 책을 펼치고 읽기 시작했다. 흘러내리는 금발을 한 손으로 연방 추슬러 올리곤 했다. 머리맡의 꼬마전구 불빛은 책과 그녀 얼굴을 비추고 그대로 종식에게까지 솟구쳤다. 금발의 가장자리에 전깃불로 황금의 띠가 둘러쳐진 듯했다. 그녀는 몸을 돌려 똑바로 누웠다. 어깨너머로 불빛을 받아 계속 책을 읽어 나갔다. 그녀는 책을 치우더니 종식에게로 웃음을 보냈다.

“아시아 사람?”
서툰 불어였다. 목소리는 그런대로 맑은 편이었다. 깊은 밤, 눈 덮인 알프스를 넘어가는 기차의 침대칸에서 그녀와의 대화는 기연이었다.
“그렇소.”
“어디로 가시죠?”
“이탈리아, 그리스를 여행 중이오.”
“일본 사람이에요, 중국 사람이에요?”
“한국 사람이오, 난.”
“북쪽인가요, 남쪽인가요?”
“그야 남쪽이죠.”
“난 동쪽입니다, 동독.”
“동·서·남·북 중에서 동·남이 만났소이다.”
그녀는 짧게 웃었다. 꽤 깔깔거렸다. 그 표현이 그녀를 웃긴 모양이었다.
“아가씨는 어디로 가시오?”
“같은 여정이군요, 우리는.”

그녀는 잠을 청하는 듯 눈을 감았다. 군가만 있고, 노동자들의 폭동이 끊일 날 없고, 메달 획득을 위한 운동선수들의 강훈만 있는 나라로 종식에게 인식된 곳에 저렇게 아름다운 아가씨가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나폴리에서 내리지 않고 반도의 남부를 보고 싶다며 내처 내려갔다. 그녀가 브린디지에 도착하려면 한 사나흘은 더 있어야만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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