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사 · 모 · 곡(下)
<수필> 사 · 모 · 곡(下)
  • 이기성 기자
  • 승인 2020.03.10 16: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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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박 / 성동문인협회 수필분과장
김종박
김종박

결과적으로 누구나 할 수 없는 그날의 젊은 30세 어머님의 결심이 어머님을 보통의 시골 아낙네가 아닌 줏대 있는 강한 의지의 한국 여성이요 장한 어머니로 만들었고 비록 소성(小成)에 머물고 말았었지만 그 후의 저도 만들어 내셨습니다. 옛말에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 해서 맹자의 모친은 세 번이나 이사하면서까지 아들을 잘 가르치셔서 불세출의 성현이신 맹자를 길러 냈다면, 저의 어머니는 당신 나름의 '아모상경지교(我母上京之敎)'를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세월이 흐른 훗날 답례로 우리 고향의 김해김씨 삼현파죽사공후손종친회에서는 어머님의 숭고한 노고를 높게 기려서 값진 장한 어머니상을 어머님께 수여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초등 3학년 되기 직전에 어머님과 떨어져서 지내다가 제가 장가간 후 딸 누리를 낳은 해에 합쳐서 죽 같이 살다가 2014년 8월말에 소천하셨으니, 어머님과 떨어져 산 세월이 22년이고 어머님과 합해서 같이 산 세월이 33년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떨어져 사는 동안, 앞에서 잠깐 언급한 대로 어머님의 헌신적인 뒷바라지 덕에 저는 초등학교를 비롯해 최고학부인 대학까지 졸업하였으니 어찌 보면 어머님의 당초 목표인 상경지교를 달성했다고도 생각됩니다.

 잠깐 1년 정도 다른 곳에서 일한 적도 있었지만 21년간을 종로 한일관(韓一館)에서 종업원으로 근속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를 대학까지 가르치셨고 고향의 원래 토지는 확대 보전하시면서 풍납동의 단독주택도 한 채 사셔서 아들인 저에게 물려주셨습니다. 

 떨어져 있을 때 어머님이 몹시 기뻐하시던 몇 모습이 기억납니다. 전주신흥중에서 서울 경복고 입학시험에 합격하였을 때가 처음이고, 당초의 목표인 서울대법대엔 가지 못했지만 3수 후에 서울대에 합격했을 때가 두 번째이고, 직업으로 법관 대신 공무원을 택해 2차 시험 세 번 만에야 22회(1978년) 행정고등고시에 합격했을 때가 세 번째로서, 앞의 두 번의 경우는 기쁜 얼굴만 보이셨지 말씀은 없으셨지만 행시를 패스한 저를 보시고는 고맙다고 하시며 눈물을 글썽이시던 한일관에서의 벅찬 모습이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제가 3수니 하는 것 없이 여느 학생들처럼 바로바로 해내어야만 했으나 전 그렇게 우수하지 않은데도 저를 끝까지 믿고 밀어주신 어머님이 계셨기에 공부를 지속할 수 있었고 또한 초등 2년 말의 야심회의(夜深會議)가 항상 제 머리에서 깃을 틀고 있었기에 공부 외엔 차마 곁눈을 팔 수가 없었던 것이기도 했습니다.

전공이 행정학이 아닌 국문학인데도 대학 4학년 말 행시 1차를 합격한 것을 빌미로 졸업 후 취직하지 않고 2차에 응했으나 실패, 어머님께 미안하여 다음 해 홍릉의 한국과학원(KAIS)에 직원으로 취직해 다니면서 1·2차에 응시해 2차에서 다시 고배를 마신 후 10개월 만에 사직 후 연신내의 선림사에 들어가 6개월 열공한 덕에 그다음 해 2차에 합격함으로 인해 나의 고시 여정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그 6개월 동안 어머님이 수시로 오셔서 빨래며 잔일을 챙겨 주셨기에 내가 공부에만 몰두할 수 있었으니 고시 합격도 어머님과 함께 이루어 낸 공동작품이었습니다.

함께 산 33년을 회고해 봅니다. 제가 신접살림을 차린 망우리 전셋집에서 첫딸 누리가 태어날 즈음에 당신의 평생직장인 한일관의 셰프 일을 최종 마감하시고 들어오셔서 넷이서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23년 만에 재합(再合)하여 어머님을 모시게 된 것으로 감개무량했습니다. 어머님의 연세 50대 초이시고 저는 30대 초였습니다.

어머님이 청상과부가 되신 원인은 동족상잔의 6·25였습니다. 6·25가 터지기 바로 직전에 태어난 나는 아버지 얼굴을 모른 채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는데, 당시의 남겨진 사진이 한 장도 없었기에 그렇게 되고 만 것입니다. 다만 형제인 지금은 고인이 되신 숙부님의 얼굴이 닮았다는 얘기만 많이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이장(里長)인 선친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가족 단위로 조상대대로 살아온 먹골 마을에서 안전한 먼 동네로 피난을 가 몇 개월을 지내시다가 먹골 마을의 상황이 궁금해 몇 동네 청년들과 떠나온 마을로 늦가을에 조심스레 함께 둘러보다가 갔지만 그만 졸지에 나타난 빨치산에 전부 끌려가신 후 소식이 두절됐다고. 빨치산이 물러간 다음 해 봄 마을 인근 용골산에서 모친이 선친의 시신을 발견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릴 제 늦가을 녘에 같은 날밤 우리 먹골 마을의 네 집에서 제사 지내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는데 아버지 기일을 포함한 네 집은 그날 같이 빨치산에 끌려간 날을 생을 마친 날로 보고 그날을 제삿날로 지내고 있었던 것. 어떤 집은 나와 동갑내기가 있었는데 그 어머니가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로 살 수 없다며 재가하는 바람에 큰아버지 집에서 자라고 있는 경우도 있었으니, 앞의 제 모친의 상경지교 이야기가 나왔을 때 집안 어르신들의 격한 염려도 당시로선 가능한 범주에 있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평생소원이었던 같이 사는 것이 다행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죄송하기도 했습니다. 여자 홀몸으로서 오로지 저를 가르치시느라 지난 평생 고생만 하셨으니 이제 편히 쉬셔야 했으나 실은 새로운 고생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저희 내외의 자식인 딸 누리와 아들 한해를 당신들의 손주들로서 돌봐주시고 키워 주시는 새로운 수고를 맡아주셨으니 얼마나 힘이 드셨겠나 하는 죄송스런 생각이 항상 들었습니다.

그래도 당신의 내리핏줄이라고 아주 귀여워하시고 살뜰히 잘 키워주셨습니다. 그래서 저희 부부는 마음 놓고 직장 일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누리와 한해도 우리 내외보다 할머니인 당신을 평소 더 좋아하고 더 따랐었지요. 또한 당신 회갑연때엔 손녀 어린 누리가 할머니를 위해 지칠 때까지 흥겹게 마구 춤을 췄었지요. 그러한 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셨던 기억이 많이 납니다.

지극한 정성을 담아 손주들을 애써 키워 주신 덕분으로 잘 커서 어엿한 성인이 됐고 그 손주들이 결혼한 것도 보셨습니다. 증손자 송민이도 귀여워하셨죠. 손주들인 누리와 한해는 어머님 영전에서 서럽도록 오래 울었습니다. 자신들에게 잘해 주신 생전의 할머니의 애틋한 정이 생각나고 너무 그리워서 그랬을 것입니다.
어머니 제가 당신의 손주와 증손자들처럼, 어머님 앞에서 춤도 추고 실컷 울고 싶은 그런 날입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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