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아테네 가는 배(5)
<소설> 아테네 가는 배(5)
  • 이기성 기자
  • 승인 2020.03.10 16: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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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성 / 성동문인협회 고문
정소성
정소성

주하가 짚고 있는 목발의 아랫단이 브린디지역 플랫폼의 시멘트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더욱 크게 울렸다. 그것은 어떤 공명을 갖고 있었다. 그를 따르는 낯선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등가방을 하나씩 메고 있었다.

“형님, 인사하십시오. 엘리자베드입니다. 그리고 이분은 이굉석 씨로 남경대학 전임연구원이랍니다. 오얏 리 자, 넓을 굉 자, 박식할 석 잔데, 중국발음은 리흉숴어라고 하지요. 이여송 장군 65대째 자손입니다.”

종식은 그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엘리자베드는 한눈에 동남유럽인임을 알 수 있었다. 눈빛이 검었다. 그런데 그리스인에게서는 드물게 금발이었다. 그리스인 중에 금발은 드물다. 역시 그녀가 불가리아계라는 말이 떠올랐다.

엘리자베드가 결혼을 조른다는 주하의 이야기는 완전히 지어낸 게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이야기를 우습게만 여길 게 아닐지도 몰랐다. 그녀는 조그마한 몸집에 귀여운 얼굴을 한 아가씨였다. 이굉석 씨는 콧수염을 달고 있었다. 그들은 플랫폼을 빠져나갔다. 주하의 목발에 갑자기 힘이 주어지는 듯했다.

대합실을 빠져나왔다. 좁다란 광장이 펼쳐져 있었다. 항구도시에는 밤안개가 짙었다. 이굉석 씨의 콧수염은 코에서 나오는 김발 속에 묻혀 있었다.

멀리서 뱃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출렁이는 바다, 떠나는 배, 다리 저는 바이런, 터키인들의 총칼에 처참히 죽어 가는 그리스인들의 단상이 종식의 뇌리를 흘렀다.

지팡이에 온몸을 실은 주하가 이런저런 사람들을 데리고 아드리아해의 물결을 안고 있는 브린디지 항을 걷고 있었다. 주하는 무엇 때문에 그리스로 가는 것일까. 더욱이 불가리아계라는 딱지가 붙은 엘리자베드와 중국인을 데리고. 종식 자기를 따라나섰다 하지만 납득되지 않았다. 그는 무엇인가 자산이 기획하고 추진하는 일이 있는 듯했다. 엘리자베드와 이굉석 씨도 그 일을 위해 동원된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서 해야 할 일 중에서 학위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주하가 한 말이 그의 이번 여행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형님, 배고프지 않습니까? 일단 배를 타면 24시간 넘게 가야 하니 먹을 것을 좀 마련하죠.”

이굉석 씨는 연방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둘레를 살피곤 했다. 그는 마치도 쫓기는 사람 같았다. 그의 콧수염이 자연스럽지 못해 가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바다를 향해 걸었다. 뱃고동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역 앞 광장에서 동쪽으로 뚫린 대로가 그 방향이었다. 그 여행자들 가운데에는 이탈리아어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주민들은 아무도 영어와 불어를 할 줄 몰랐다. 행색을 보고 그들은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고, 그쪽에서는 뱃고동 소리가 울려왔다.

도중에 빵집에 들러 여러 가지 빵을 한 보따리 샀다. 항구의 밤거리에 의자를 내놓고 나앉은 사람들이며 빵가게 손님들은 이 심상찮은 일행을 눈여겨보았다. 주하의 지팡이 짚는 소리는 적막 속으로 빠져드는 항구의 밤을 조용히 흔드는 듯했다.

출국절차를 밟았다. 거대한 선박이 정박해 있는 선창가 출입국사무소의 건물은 너무나 작았다. 선창을 때리는 파도소리가 가슴을 적셔 왔다. 출국절차라야 별것 없었다. 배표를 보여 주고 여권을 제시하면 된다. 주하가 내민 여권을 받아 든 관리는 한참 들여다본 뒤 두툼한 책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뭔가 확인해 보기 위해서인 듯했다. 관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코리아라…… 북이냐, 남이냐?”
“남이다.”
“남이라… 비자협정이 되어 있는 쪽이 북이더라 남이더라?”

책은 두텁기만 했지 그 관리의 의문을 풀어 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사내의 영어는 형편이 없었다. 이탈리아에만 와도 확실히 이등국에 온 느낌을 받는다. 주변이, 풍요로움과 긴 세월에 의해 잘 다듬어져서 느끼게 하는 어떤 위압감을 주지 않는다. 로마 문화의 난숙한 유적들이 여기저기 버려지듯 흩어져 있으나, 궁핍의 흔적을 감추지 못한다. 주하는 더듬거리는 사내의 영어를 여유 있게 들어주고 있었다. 사내가 하려는 이야기를 주하가 말해 주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물론 남이지. 북은 공산당이잖느냐?”
“공산당? 우리나라에도 공산당이 있는데….”
“서울을 아느냐, 서울을?”
“서울? 알지. 벤베누티가 깨진 데지.”
“그 서울이 남쪽의 수도다.”
“아, 맞았다. 맞았어. 통과다, 들어가라.”

관리는 손을 털고 웃음을 지었다. 먼저 들어간 엘리자베드는 저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주하가 들어가고 종식이 뒤따랐다. 이굉석 씨가 또 걸렸다. 관리는 여권과 이굉석 씨를 대조했다. 몇 번이나 얼굴을 돌려 가며 살폈다. 여권에 붙은 사진과 실제 인물이 똑같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이굉석 씨는 웃음을 머금고 그를 가만히 버려두었다. 관리는 결국 고개를 끄덕거렸다. 들어가라는 뜻이었다.
“왜 저러오?”
“여권사진에는 아마 콧수염이 없을 겁니다.”

주하는 엘리자베드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배는 꽁무니를 열어 놓고 승객들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떠날 시간이 되었다는 듯 기적을 가끔 토했다. 기적소리는 먼 바다로 퍼졌다. 바다는 아드리아 해였다. 주하는 왜 여길 왔을까, 새삼스런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저 엘리자베드라는 금발아가씨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그리고 괴상스런 콧수염을 단 저 되놈녀석은. 종식은 찬란한 역사의 현장으로 가는 자신의 감격이, 어쩐지 예기치 못한 일행들에의 호기심 때문에 얼마쯤 흐려지는 듯 느껴졌다.

선체 안으로 들어선 주하는 객실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다가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이마 앞에 성호를 그은 엘리자베드는 뛰어내려 그를 다시 부축했다. 주하는 그냥 자빠지는 게 아니고, 엎질러진 물처럼 맨 밑바닥으로 지팡이를 끌어안은 채 나동그라진다. 승객들은 그 꼴을 보고 말없이 놀라움을 나타냈다. 이굉석 씨와 종식도 뛰어갔다.

한 사람에 60프랑(육천 원)씩 더 내고 침대칸을 하나 얻어 들었다. 침대가 마침 네 개였다. 기차간과 같은 구조였다. 커튼을 들추니 전깃불 빛이 기름처럼 흐르는 바다가 보였다. 주하와 엘리자베드에게 아래 침대 두 개를 권하고, 이굉석 씨와 종식은 위로 올라갔다. 선체 안에는 승객들이 붐벼서 무슨 축제장 같았다. 어떤 이는 벌써 샤워장을 다녀 나오기도 했다.

뱃고동 소리가 거세게 몇 번 울리고 어느 틈에 선체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하는 머리맡에 목발을 세워 놓고 누워 있었다. 눈은 감은 채였다. 서 있을 때와 달리 구겨진 바지천의 선으로 드러나 뵈는 그의 두 다리는 말라 버린 칡넝쿨 같았다. 아까 넘어진 것이 물리적인 충격을 준 듯했다. 엘리자베드는 이마에 성호를 그으면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곤 했다.

종식은 주하를 내려다보던 눈길올 거두었다. 그는 천장을 바라보며 반듯이 누웠다. 건너편의 이굉석 씨도 피곤한 듯 반듯이 누워 있었다. 종식은 이런 큰 배를 처음 타 보았다. 겪어 보지 못한 뱃멀미가 일기 시작했다. 몸을 뒤적이며 커튼을 젖혔다. 밤바다 저 멀리 이탈리아 땅이 멀어져 갔다. 브린디지항은 어둠에 묻혀 갔다.

누워 있으니 멀미가 더한 것 같아 종식은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침대칸 밖으로 나갔다. 복도를 지나 계단께에 이르니 청바지 차림의 학생들이 모포를 깔고 여기저기 누워 있었다. 시계는 벌써 자정을 지나고 있었다. 종식은 의자가 극장처럼 들어선 삼등칸으로 갔다. 그는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빈 의자가 거의 없을 만큼 사람들이 꽉 들어찼고, 그들 대부분은 모포 따위를 덮어쓰고 잠자고 있었다. 침대칸에 들 돈이 없는 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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