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아테네 가는 배(6)
<소설> 아테네 가는 배(6)
  • 이기성 기자
  • 승인 2020.03.25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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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성
정소성

그는 빈 의자에 몸을 내렸다. 서양사가 전공인 그였기에 꿈처럼 느껴지던 그리스였다. 그 무성한 신화며, 찬란했던 신전들. 그리스의 신전들은 신을 모시거나 제사지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들의 거처였다. 이 신화와 신전의 나라로 주하는 왜 가는 것일까. 

엘리자베드와의 관계에 있어 주하가 한 말은 어쩌면 사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랑머리 아가씨를 아시아 사람이 사로잡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주하 같은 신체적 조건을 가지고는 더욱 그러하다. 피부색깔에서 오는 그들의 우월감은 뿌리 깊다. 노랑머리만 녹였는가. 아니다. 저 중국 녀석은 무엇인가.

홀 한 귀퉁이에 널찍한 스낵바가 있었다. 잠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 커피를 즐기고 있었다. 한 잔의 커피를 사 가지고 돌아오다가 종식은 홀의 들머리에 서 있는 이굉석 씨를 보았다. 
그는 콧수염 아래로 흰 이빨을 드러내면서 웃었다.
“멀미 때문에 당신을 따라 나왔소.”
그의 불어는 형편없이 서툴렀다. 그러나 그는 친근감을 느끼게 했다. 같은 문화권의 사람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전공이 서양사라고 들었는데, 학습여행이시오?”
“일종의 답사지요. 또 유학생활을 끝내면서 하는 마지막 여행이기도 하고.”
그도 커피를 한 잔 들고 왔다. 커피를 마시는 폼이 그리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중국 사람들에게 커피는 낯선 음료인 듯했다.
“이굉석 씨, 당신은 무슨 이유로 그리스 여행이오?”
“난 특별한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스를 한번 보고 싶었던 차에 주하가 간다고 해서 따라나섰지요.”
“주하를 좋아하시오?”
“주하를? 좋아한다기보다 그가 너무나 진실되고 딱한 것 같아요.”
“안 지 오래되었소?”
“한 4, 5년 넘었을 겁니다.”
“그의 불구가 그렇게 딱하시오?”
종식과 이굉석 씨는 나란히 앉았다. 노랑머리, 희색머리, 갈색머리, 적갈색머리, 회갈색머리들이 빼곡히 들어찬 홀 한 귀퉁이에 까만 머리의 누런둥이 둘이 커피를 들고 있었다. 둘레의 누구도 그들의 대화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주하는 물론 신체적 불구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불구를 의식하지 않으려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정신의 불구를 극복하려고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참 딱합니다.”
“이굉석 씨, 무슨 소리요? 정신의 불구라니? 좀 괴짜스런 데가 있긴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라 주하의 아버지는 북에, 어머니는 남에 살고 계시다는 거지요. 그분들이 지상의 삶을 다할 때까지 서로 얼굴을 대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을 놓고 주하의 지팡이는 뛰고 있습니다.”
“…….”
종식은 말을 잃었다. 주하에게 그런 감추어진 심연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가 괴짜라느니 동포 유학생들을 우습게 아느니 욕만 해 온 자신들이었다.
“주하의 아버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해 준 사람이 바로 납니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커피잔을 비웠다. 그는 졸리는지 하품을 해 댔다. 신통찮은 불어로 의사표시를 하느라 그는 꽤나 허둥댔다. 수사적인 문장이나 관용어구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어느 정도 자신의 의사표시를 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괴이쩍은 일은 주하가 그런 집념을 안고서 뛰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동포 유학생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다만 그들은 주하에게 홀어머니가 있다는 사실만 알 따름이었다. 그는 왜 동포 유학생들에게는 그런 말을 비치지도 않았을까.
“그래 어떻게 확인하셨소?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이라도 하던가요?”
“그야 물론이지요. 나는 복건성 사람이오. 홍콩에서 멀지 않지요. 복건성 진강땅에 아버님이 사시는데, 편지로 아버님께 좀 알아봐 달라고 했었지요. 아버님의 편지는 물론 한문으로 썼겠지요.”
“주소는 어떻게 알고?”
“그게 참 기막힙디다. 30년도 더 전 주소를 쓴 편지가 그대로 들어갔다는 겁니다. 중국 땅에서 온 편지니 특별배달을 했을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편지가 자신을 떠나서 회신되기까지 근 반년이 걸렸다고 그는 덧붙였다. 답신은 한문으로 씌어 있었으며 문장이 유려했다고 설명했다.
“주하의 아버님이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그 편지로 알아볼 수 없었소?”
자신의 부모에 대해 일체 언급을 않는 주하이기 때문에 그분에 대해 알려진 게 없었다.
“네,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편지 겉봉에 무슨무슨 의원醫院이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의사인 듯했습니다.”
“무슨 의사인데요? 의원이라는 글자 앞이 그냥 고유명사던가요, 무슨 전공을 밝히는 글자가 있던가요?”
종식은 이상한 호기심이 자신을 엄습함을 느꼈다. 이굉석 씨는 가물거리는 기억을 더듬듯이 눈을 깜박거렸다.
“아, 네, 기억이 납니다. 무슨 결핵이라는 글자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근데 한 가지 기이한 것은 복건성에서 발송된 편지의 주소는 확실히 평양시 무슨 동이었는데 답신된 주소는 황해의 무슨 섬인 듯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주하의 사정에 그렇게 관심을 둘 때가 아니라 유심히 살피진 않았지만…….”

그는 자신의 기억이 틀림없다고 무릎을 쳤다. 그렇게도 아버지가 보고 싶으면, 이굉석 씨 자신이 귀국해서 그분을 프랑스로 모셔 오겠다는 농담을 했더니 주하는 질겁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고 했다.
“아, 복건성에서 황해야 멀지 않은데,  뗏목을 타도 어렵지 않다고 했더니, 그의 눈빛이 이상하게 광채를 냅디다. 그러면서 그분을 보려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기적소리가 멀리 울려갔다. 기적소리에 넓디넓은 지중해의 전 공간이 공명하는 듯했다. 그 공명의 음향은 종식의 머릿속을 뒤흔들고 영혼의 깊은 바닥으로 흘러드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기적소리에 맞춰 가슴의 바닥이 실감나게 저려 왔다.

연로하신 아버님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주하 자신이 아니라면 누구란 말인가. 주하의 어머니뿐이다. 그러나 그녀는 프랑스에 있지 않다. 용산 어느 시장터에 살고 있다고 했다.

이굉석 씨는 더 견디지 못하고 잠으로 떨어졌다. 종식은 그를 깨워 침대칸으로 가서 자게 하려고 했으나 그가 워낙 곤하게 자기 때문에 버려두었다.

혼자 남은 종식은 피로와 졸음을 느꼈다. 그러나 '지중해의 전 공간이 공명하는 듯한' 감각이 그를 잠으로 떨어지도록 버려두지 않았다. 이 감각은 지중해의 물리적 공간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공간, 축적된 역사의 공간까지도 내포되어 있는 듯했다. 은은히 들려오는 파도소리는 어떤 망각의 영역으로 떨어져 가는 역사의 파편을 그에게 줄줄이 일깨워 주었다. 저 멀리 어둠의 공간 속에 일어선 세월의 파편들은 소리 없는 함성을 지르고 있는 듯했다.

넘어지면, 엎질러진 물처럼 땅바닥으로 잦아드는 주하의 정체가 조금씩 설명되어지는 듯했다. 종식과 주하 사이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무엇이든지 직접적으로 물어 볼 수 있다. 그러나 주하는 뭔가 빡빡하고 비밀스러운 데가 있어서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 왜 그럴까.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자신만의 무엇을 가지고 있는 탓이 아닐까. 그는 그것을 위해 아무런 설명도 없이 뛰고 있지나 않을까.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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