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성의 기초와 실천: 태상하지유지(太上下知有之)의 아포리즘
사회성의 기초와 실천: 태상하지유지(太上下知有之)의 아포리즘
  • 성광일보
  • 승인 2020.03.26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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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항석 / 논설위원
정항석
정항석

태상하지유지(太上下知有之)!

이 말의 의미는 이렇다. ‘가장 최고로 좋은 것(太上)’은 ‘있는지도 모르는 것(下知有之)’이다. 의사결정과 지도력에 관한 것으로 노자(老子 B.C.604?-B.C.531?)의 말씀이다. B.C. 600년경 춘추전국(春秋戰國 B.C.770-B.C.221)시대에 생존했다는 것 이외에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노자(老子)가 어디론가 사라지기 전에 어느 성문의 문지기에게 한 권의 책을 주었다고만 알려져 있다. 물론 그의 생애에 대한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의 기록마저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아포리즘의 모음집이라고 하는 <도덕경(道德經)>은 정말 그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할 정도로 여러 가지의 주해가 곁들어져 전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경>은 동양에서의 삶은 물론이고 현대의 세상사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구약과 신약으로 이뤄진 기독교의 ‘성경(聖經 Holy Bible)’과 B.C. 4-2·3세기경으로 추정되고 ‘성스러운 신’에 대한 가송(歌頌 Gita), 700구절로 된 시 형식을 띠고 있는 힌두교의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 다음으로 <도덕경>은 가장 많이 번역되었다.

수백 권의 이상의 주석서가 있으며 알파벳 문자로 된 번역본만 백여 종이 넘는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를 실천하는 이를 찾기가 쉽지 않다. 어렵지 않게 ‘가장 좋은 것이 무언인가’를 꼽을 수 있지만 이를 옮기지 못하는 우리를 발견하게 된다.

매일 같이 보는 하늘이다. 하늘에 대한 물리적 해석을 제외하고는 인간이 가지는 비구상의 상상은 그 개념을 정하는 데 일치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다만, 간결하게 함축하여 그 해석과 인식의 수용성과 그 범주를 정하는 데 사람들은 인색하지 않다. 모두 받아들이는 것을 보편성 혹은 진리라고 말한다. 아포리즘의 표현 방식이 그렇다. 정치에 있어서 대표적인 아포리즘(aphorism)은 공자의 ‘정자정야(政者正也)’이다. ‘정치는 바르게 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바른 것인가!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이 있지만, 젊은 맹사성(孟思誠 1359-1438)과 어느 무명(武名) 선사(禪師)에 관한 이야기는 ‘태상하지유지(太上下知有之)’와 닿아 있다. 1386년(우왕禑王 12년) 나이 스물일곱에 문과 을과에서 으뜸으로 장원급제하였다.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이 되었다가 어느 지방의 수령(水原 判官)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상당히 자신의 엘리트를 믿었고 그 패기 역시 매우 젊었다. 그만큼 모든 것에 자신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배움에는 끝이 없다’라는 공부하는 이들의 신념도 넘쳐났다. 그리고 그가 담당하던 근처에 이름난 승려로 마땅히 스승이 될 만한 이가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

“으-음, 그렇군. 명망이 높은 이가 이 고을에도 있다는 것이지…”

동헌에서 바라보이는 한 떼의 구름이 높이 흐르다가 힘이 드는지 산마루에서 걸려 있었다. 이윽고 야심만만한 젊은 벼슬아치는 속으로 다짐했다.

‘날을 잡아 한번 찾아가야겠군’

하루는 그렇게 마음을 다지고 민심을 살필 겸 길을 나섰다. 그런데, 길이 말이 아니었다. 꼬불거리는 좁은 길은 그렇다 치고 다듬어지지 않는 풀들 하며 작은 돌, 큰 돌들이 걸음을 더디게 하였다. 게다가 영험하다는 암자는 왜 가파르고 험준한 곳에 있는지! 따르는 아전과 군졸 몇몇이 그런대로 길을 열고 있었지만,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숨 가쁘게 두어 번 쉬고 나니 저 앞에 사람이 기거한다고 볼 수 없는 초라한 움막이 보였다. 움막은 아니지만, 지붕에 난 풀들과 기울어진 기둥들을 모면 영락없이 쓰러져가는 집이었다. 망해가는 고려의 운명과 같다고 할까! 하여튼 그랬다. 이런 모습과 달리 암자 마당과 울타리는 그런대로 정돈되어 있었다. 헛기침을 하였다. 미리 약속하고 찾아온 것은 아니어서 나름 예를 갖추었다. 그러고는 무명 선사를 불렀다.

“스님, 계신지요?”

방문이 열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수인사를 간단히 하고 선사는 젊은 맹사성을 안으로 청했다. 방은 비좁았으나 정갈했다.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앉기가 무섭게 스님에게 질문했다.

“스님, 제가 너무 젊은 나이에 이 고을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벼슬을 받아들었으나, 아는 바가 적으니 배움을 얻고자 이리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선사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말씀이 과하십니다. 저같이 보잘것없는 비구에게 배울 것이 무에 있을까요. 이 움막 같은 곳에서 한 몸 기거하는 것도 힘에 부치는 데 누구에게 가르침을 내린다는 말입니까! 허허…”

“그래도 한 말씀을 얻을 수 있을런지요…”

말은 예를 갖추었으나, 그리 신통할 것 같지 않아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한 번 더 권하였다.

“고을 수장으로서 우선하여 삼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요?”

그러자 선사의 말은 너무도 단출하였다.

“하는 듯 아니 하는 듯 좋은 일을 하시면 됩니다.”

웃으면 말하는 선사의 말에 맹사성은 당황하였다. 이런 말을 들으려고 힘들게 찾아온 것이 아닌데 하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하거나 말거나 선사는 ‘딱히 대접할 것은 없다’라고 말하면서 녹차를 따르고 있었다.

“녹차 한 잔 드시지요.”

선사의 말에 맹사성은 못마땅하였지만, 얼른 마시고 나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슨 일인지 아니면 무엇에 과했는지 선사는 찻잔에 물이 넘치는데도 계속 따르고 있었다. 어덕을 잡았다고나 할까!

“스님, 찻물이 넘쳐 방바닥이 다 젖습니다. 어찌 가늠을 못 하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선사가 말했다.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적시는 것은 아시면서, 지식이 넘쳐 인품을 망치는 것은 어찌 모르시오.”

‘아이코!’ 무언가에 부딪힌 마냥 맹사성은 그만 움츠리고 말았다 그의 속마음을 선사에게 들킨 듯하여 얼굴이 붉어졌다. 이내 부끄러워 황급히 방문을 나서려 하였다. 그렇게 허둥거리다가 그만 문틀에 머리를 찧게 되었다. 그런데 뒤따라오는 말이 젊은 맹사성의 귓가에 생생하였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는 법이 없게 되지요.”

‘아! 그렇구나!’

무언가를 깨달은 것이다. 방을 나선 맹사성은 선사에게 배움에 대한 감사의 예를 드리고 길을 나섰다. 얼떨떨하지만 무언가를 얻었다. 겸양지덕(謙讓之德)이다. 맹사성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후세 행정공무원으로서 그리고 지도층 인사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의 표본은 이렇게 태동되었다.

물론, 고려말 그리고 조선 초를 살면서 두 왕조를 섬겨야 하는 부담감도 있었을 것이나 왕조가 중한 것이 아니라 뭇 백성들이 더 많았다고 그리고 무엇이 더 귀한 것인가를 깨달은 젊은 벼슬아치이었다. 실천과는 다르지만, 우리는 흔히 이렇게 이야기한다. 체면을 차릴 줄 알고(廉恥), 나설 곳과 그렇지 않을 곳을 가려야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이다. 특히, 지도층은 더 그러하다. 일면, 모르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모르면 나서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알아야 하는 것’은 ‘모르면 물러나고(不知而知退之) 아는 이에게 맡기는 것’이 그나마 지도(指導)의 도리를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노자는 사회 지도층이 알아야 할 것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4가지로 구분하였다.

가장 높은 단계는 부지유지(不知有之)이다(太上下知有之). 최고의 지도력은 ‘지도자가 있기는 한가?’ 할 정도로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 밑의 단계는 친이예지(親而譽之)이다(其次親而譽之). 가까이하면서 칭찬을 받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칭찬은 언제든 비난으로 바뀔 수도 있다. 심사나 수가 틀리면 위아래 할 것도 없이 그렇게 된다. 그다음은 외지(畏之)이다(其次畏之). 사람들을 두렵게 하여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최하의 것은 모지(侮之)이다(其次侮之). 모질게도 한참 모자라는 것이다. 같지도 않은 이가 윗자리에 있으면 경멸하고 무시를 받게 된다.

그리고 위의 구분에 대한 까닭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믿음’에서 온다.

신용이 없어서 신뢰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신뢰를 주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故信不足焉 有不信). 삼가 조심할 일이다(猶兮). 말을 귀하게 여기고(其貴言), 공을 이루어 일을 마치되(攻成事遂), 백성이 모두 말하기를 그것이 나 스스로, 마치 그렇게 되어야 하는 듯이 해야 할 것이다(百姓皆曰 我自然).

돌아보면,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부지유지(不知有之)’는 아예 없었고, ‘친이예지(親而譽之)’는 ‘하는 척’ 혹은 흉내를 내다가 국민에게 외면되었고, ‘외지(畏之)’는 ‘총칼’에 의한 혁명과 쿠데타로 인한 비민주를 이미 경험한 바이다. 또한 ‘모지(侮之)마저 있었다’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흔하다. 그런데도, 수많은(?) 정치인과 지망생들은 각종 인기조사와 여론몰이를 하고 있다.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하여서 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떠한 구체적 정책과 비전 제시 그리고 대안과 제언을 가시화시키지 않는 채’ 이루어지고 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주요 뉴스와 언론에서 정치와 그 인사들이 등장하지만, 실천의 모습은 너무도 희박하다. 고쳐 실천하려는 모습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다시 볼 일이다! 고불(古佛) 맹사성은 ‘오류를 고쳐 실천하였다’. 사회 지도층 인사로서 그리고 정치가로서 위대하다는 것은 이점이다. 단지 평범한 이들처럼 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마음과 인격을 갖추어 ‘있는 듯이 없는 듯이’ 편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함께 어울릴 줄 알았다. 일견, 노자와 맹사성 중에 더 대단한 이인가를 가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 <사기 노자한비열전(史記 卷六十三 老子韓非列傳)>에 따르면 이름은 ‘이이(李耳)’이며 그의 관직은 주(周)나라(B.C.770-403)의 ‘서고를 관리한다는 관직에 있었다(老子者...李氏名耳字耼周守藏室之史也)’. 내직의 공무는 주로 ‘제사를 담당하는 무(巫)’와 ‘왕조의 업적과 이전의 사적 자료를 정리하는 사(史), 서(書) 등으로 구분되는 당시로 보아 행정직에 있었다는 것이 짐작된다. 하지만, 같지 않은 이들이 실천하지 못하는 ‘정치의 싫증과 염증’이라고나 할까! 노자는 세상을 등지게 되었다. 말을 하였으나 실천의 중단이다.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기야 오늘날에도 그 좋은 말들이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도덕경만 붙잡고만 있지 않는가!

사실, 겸양지도(謙讓之道)나 겸양지덕(謙讓之德)에서 도(道)는 ‘길’, ‘방향’, ‘나아가는 길’ 등을 의미하고, 덕(德)은 ‘포용’, ‘신뢰’, ‘겸손’ 등을 뜻한다. 범인(凡人)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실상, ‘네가 아는 대로 말하고, 나도 아는 대로 말한다. 그리고 그 판단과 결정은 내가 한다(侮之).’ 말 같지 않은 것이나, 이는 세상사에서 가장 흔한 일이다. 권력, 부, 학력, 사회적 지위, 그리고 때론 나이, 무지(無知)와 완력(腕力) 등에서 오는 비문명적이고 비사회적 요소에 따른 이상한 짓(?)이 난무하는 탓이다.

그래서일까? 그 많은 세계와 국내 일류의 대학에서 ‘굴지(屈指)의 학(Science)의 수료증’을 많이 찍어내고 우리는 받아오고 있다. 그리고 각 새로운 학문이 등장하고 있다. 그 무엇도 실천과의 거리가 가깝지 않다. 그렇다고 옛것을 고집하려는 것도 아니다.

위의 내용과 일화는 말한다. ‘위계를 두어 조화를 이루려는’ 유학(儒學)과 성리학의 철학과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자연과 같이 살라고 하는’ 무위사상의 경계를 두는 것은 참으로 무용하다. 비가 새는 집에서 녹미(祿米)만을 고집하고 소등을 타면서 그가 재상인지 아닌지도 모를 만큼(不知有之), 지도층의 인사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너무도 오래전에 알려주고 있다. 도덕경이 사고(思考)의 아포리즘이라면 고불(古佛)은 그 실천의 정수이다. 배우되 깨달아야 하고, 실천 없는 배움이란 ‘아니 하거나 없는 것보다 못하다(侮之).’ 처음에는 칭찬과 환호 속에 있지만, 임기 중반과 종반을 넘어서면 비난과 치욕으로 끝나는 정치의 실태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오늘날 왜 우리는 고불 맹사성과 같은 지도자를 볼 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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