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스페셜 요리
<수필> 스페셜 요리
  • 이기성 기자
  • 승인 2020.04.08 14: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용순 / 수필가
서용순
서용순

고백하지만, 나는 음식 이야기만 나오면 주눅이 든다. 열일곱 살부터 시작한 자취생활까지 치면 주방장 경력이 얼마인데, 그리고 그동안 먹어 본 음식만 해도 헤아릴 수가 없는데, 흉내를 내도 내련만 머리가 안 좋은 건지 소질이 없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아들아이가 중학교 때 일 년 반 넘게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다. 하루는 먹다 남은 도시락을 내놓으며 녀석이 진지하게 물었다.
“엄마! 엄마가 잘 할 수 있는 요리가 뭐예요?”

나는 숨기고 싶은 비밀을 들키기라도 한 듯 무안해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미안해. 엄마 솜씨가 없어서….”

이렇게 말끝을 흐리는 내게 녀석은 “그럼 노력해 보세요”하고, 내가 늘 놀기만 하는 저에게 기를 죽이듯 내뱉던 말을 천연덕스럽게 던지고는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처음에는 한 방 얻어맞은 것처럼 멍했지만 슬슬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다른 집 엄마의 음식 솜씨가 부러워도 그렇지, 제 엄마의 취약점을 고렇게 건드릴 건 뭐람.

그런 일이 있은 후 요리책을 펴놓고 따라해 보기도 하고 눈동냥 귀동냥을 해서 흉내를 내기도 했건만, 아직도 음식 이야기만 나오면 주눅이 드는 것을 보면 그런 얘기를 또 들어도 억울할 것은 없겠다.

사남매의 막내인 나는 일찍 자취생활을 했지만 두 언니의 그늘에 많이 의지하여 지내다가 결혼을 해서는 손위 시누이의 각별한 애정을 받았다. 김치와 갖가지 밑반찬은 물론이고 철철이 별식까지 가만히 앉아서 얻어먹었다. 동생네까지 그렇게 마음을 써주는 시누이가 있었으니, 나의 주방장 경력은 햇수만 늘었을 뿐이다.

그래서 정말 김포댁(김장을 포기한 주부)이 되고 말았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배춧값이며 양념값이 어쩌고 해도 남의 얘기같이 흘러 넘겼다. 그런데도 나중에 보면 김치가 넘쳐서 오히려 이웃집에 나눠 주고 인사를 듣곤 했으니, 살림 못하는 것도 이 무슨 복인가 싶을 때도 있었다. 이러면 다들 '복은 무슨 복?' 하고 비웃을 테지만.

음식 잘하는 부인을 둔 남편은 행운아 중의 행운아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또 남편을 일찍 죽게 하려면 맛있는 음식을 자주 해 먹이라는 말도 들었다. 앞의 말은 음식 솜씨 없는 아내들을 주눅들게 하고, 뒤의 말은 음식 솜씨 좋은 아내들을 주저하게 할 것이다. 헌데 '맛있는' 음식이 성인병을 부추기는 기름진 음식이 아니라 웰빙 시대에 맞는 건강식이라 한다면 음식 솜씨 없는 나는 이래저래 한숨만 나온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장을 본다. 바쁘다는 핑계로 일요일 오전에 일주일치를 한꺼번에 사다 놓고 먹는다. 그러니 야채도 과일도 생선도 신선도가 떨어지는 것은 불문가지다. 냉동실에 들어갔다 나온 생선은 아무리 바싹 구워도 제 맛이 나지 않는다. 

또 반은 가공된 재료를 데우거나 튀겨서 내놓으니 손맛이 배어 있는 맛깔스런 음식을 식구들이 그리워하는 건 당연하다. 그걸 알면서도 하지 못하는 나는 아들아이 말처럼 음식 솜씨가 노력해서 되는 것인지, 타고나야 하는 것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이러면 내가 무슨 대단한 일을 하거나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사는 사람인 줄 오해할까 걱정이 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음식 만드는 것은 겁을 내는 내가 그릇엔 퍽 관심이 많다. 그릇 중에서도 '본차이나'같이 세련되고 매끈매끈한 것 말고 겉이 테석테석한 질그릇을 좋아한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것보다 투미하고 둔팍한 그릇이 만만해 보여서일까? 아니다. 흙을 잘 개어 실팍하게 빚어 낸 그릇에서 따스한 인간미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질박한 그릇에 맛깔스런 요리를 담아내는 솜씨만 있다면 말 그대로 사랑받는 엄마와 아내가 될 수 있을 텐데….
오늘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내 뒤꼭지에 대고 아들아이가 “엄마! 뭐 스페셜 한 거 없어요?”한다. 

한창 나이의 아들이 먹고 싶어 하는 스페셜 메뉴가 얼른 떠오르지 않아 또 난감하다. 냉장고 문을 열고 피자맛 나는 돈가스와 새우 몇 마리를 꺼냈다. 이것으로 어떻게 스페셜 요리를 만들어야 할까?

영국 속담에 '하루가 행복하려면 이발을, 일주일이 행복하려면 결혼을, 평생을 행복하려면 일류 요리사를 두라'고 했다는데, 오늘따라 이 말이 가시처럼 목에 걸린다.

<서용순 프로필>
·(사)한국문인협회 광진지부 명예회장
·에세이문학작가회 부회장
·이지출판사 대표
·저서:《갈망의 노래》《Colors of Arirang”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 특별시 광진구 용마산로128 원방빌딩 501호(중곡동)
  • 대표전화 : 02-2294-7322
  • 팩스 : 02-2294-732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주연
  • 법인명 : 성광미디어(주)
  • 제호 : 성광일보
  • 등록번호 : 서울 아 01336
  • 등록일 : 2010-09-01
  • 창간일 : 2010-10-12
  • 회장 : 조연만
  • 발행인 : 이원주
  • 자매지 : 성동신문·광진투데이·서울로컬뉴스
  • 통신판매 등록 : 제2018-서울광진-1174호
  • 계좌번호 : 우체국 : 012435-02-473036 예금주 이원주
  • 기사제보: sgilbo@naver.com
  • 성광일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성광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sgilbo@naver.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