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엄마의 엄마
<수필> 엄마의 엄마
  • 성광일보
  • 승인 2020.04.21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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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순 / 수필가
서정순
서정순
-광진문학 수필부문 신인상
-느티나무문우회 회원
-수필집 ⟪60, 내 생의 쉼표⟫ 외 공저 다수
 

나는‘할마’다. 누가 만든 말인지는 몰라도 할마는 할머니와 엄마의 합성어라고 한다. 육아 독박도 있다고 하니 웃픈 이름이다. 오전 여섯 시 반부터 울리기 시작하는 할마의 전화기에는 알람이 열 개 정도 맞춰져 있다. 요일마다 달라지는 알람은 깜박깜박하는 할마의 정신줄을 잡아당겨 주곤 한다. 알람인 줄 뻔히 알면서도 울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나는 4년 차인데도 아직 적응이 안 돼 실소를 짓곤 한다.

할마는 직장인처럼 달력의 빨간 날은 쉬고 보너스로 딸이 쉬는 날 또 쉰다. 며칠 전 화요일은 징검다리 공휴일이었다. 월요일 같은 수요일 아침, 좀 서둘렀다. 딸과의 아침 인사 톤이 하이 소프라노다. 할마는 자고 있는 연우, 지우를 깨운다. 옷을 갈아입히고 아이들이 아침을 먹는 동안 머리를 빗겨 준다. 고무줄을 여러 개 이용해 묶어 놓은 머리 위에 꽃이 피어난다. 뒤에서 한 번, 앞에서 한 번, 쳐다보는 할마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참 예쁘다.

“할머니, 나는 언제쯤이면 혼자 갈 수 있어”하고 묻는 초등학교 2학년 지우는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큰 소리로 외치며 달려가는 4학년 언니와 혼자 등교하는 아이들이 부러운 모양이다. 그런다고 할마는 혼자 보내지 않는다. 하지만 하교 시간에 교문 앞에 서 있는 할마를 발견한 지우는 온몸으로 웃으며 달려와 안긴다. 사랑스럽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여행 가고 싶으면 훨훨 다니던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는데, 손녀들과의 신경전으로 체력이 차츰차츰 소진되었다. “예쁜 거는 예쁜 것이고 힘든 것은 현실”이라는 말처럼 두 손 들고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취직했다 치고 최선을 다하자”는 주문을 외운다. 그리고 이제는 손녀들과의 기선 잡기 신경전도 평정했다. 평화로운 날이 많아지고 손녀들이 하굣길에 전화를 걸어 “할머니, 저 수학 백점 맞았어요” 하면 정말 행복하다. 간식을 준비하는 손길에 신바람이 난다.

오십 대에 가장 잘한 일은 운전을 시작한 거였다. 오래 신어 편안한 신발 같은 자동차는 나의 기동력을 온전히 대신해 준다. 손녀들을 학원이나 병원에 데리고 다닐 때 운전하는 할머니가 좋아보였나 보다. 지우가 운전면허를 따면 할머니 차를 자기에게 달라고 한다. 그때가 되면 할머니 차는 헌차가 되니 새 차를 사준다고해도 할머니 차가 제일 좋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뿌듯하다.

이 손녀들을 돌보느라 환갑 넘긴 나이에 훨훨 날던 날개를 접었다. “얘들 보면 늙는다”는 주변의 우려에도 피할 수가 없었다. 내 감정이 요란하게 부딪칠 때마다‘가장 좋은 일은 가장 하기 힘들다’는 글귀를 떠올리곤 한다.

 

할머니에서 할마가 되는 시간을 끌어안으면서 나름 요일별 동선을 만들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아침운동, 문화센터, 주민센터로 뛰어다니고, 하교 때 교문 앞에서 매일 만나는 할마들과 벤치 데이트를 즐기기도 한다.

세상에 좋은 결정인지 아닌지 미리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그게 좋은 결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노력할 뿐이다. 이제 육십 대에 가장 잘한 일은 할마가 된 것이 아닐까. 알람소리에 화들짝 놀라면서도 하루하루가 웃음으로 윤택해진 지금의 일상이 이제는 몸에 딱 맞는 옷과 같이 편하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들었다”고 하지 않던가. 딸의 딸이라고 말하는 연우, 지우는 할머니를 엄마의 엄마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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