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아테네 가는 배(8)
<소설> 아테네 가는 배(8)
  • 이기성 기자
  • 승인 2020.04.23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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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성 / 성동문인협회 고문
정소성
정소성

더구나 개인주의가 극도로 팽배해 있는 프랑스 같은 나라로 여행하기 위해 그쪽에서 여권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프랑스와 북한은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있지 않아 공적 업무 아닌 개인의 여행이란 지난하다. 그리고 용산 어느 시장가에 사신다는 그의 어머니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지방문 이유로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겠지만, 그 먼 여행을 하기에는 너무나 연로하고, 근 3백만 원쯤 드는 왕복항공료도 수월치 않을 것 같았다.

주하 자신 10년 넘게 프랑스에 머물면서 한 번도 어머니를 뵈러 귀국할 수 없었다. 항공료 탓이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두 분이 헤어진 그 세월이 어딘가. 30년하고도 2년이 지나지 않았는가.

양대 진영의 이데올로기 대립은 한반도를 두 동강내었고 결국 육이오를 야기시켰다. 휴전은 두 나라를 이 지구상에서 가장 먼 나라로 만들었다. 너무나 멀어서 가닿을 수 없는 나라가 되었다. 인접국가로 중공과 일본이 있으나, 중공은 공산주의국가로 우리와 외교관계가 없으며 일본은 북한과 외교관계가 없다.

국토뿐 아니라 민족도 두 동강이 나 지구상에서 가장 멀리 떨어지다 못해 영원한 이별을 하고 말았다. 

한반도 사람들은 누구나 이 헤어진 운명을 감내하는 40년의 세월을 보내 왔다. 주하 어머니도 틀림없이 그런 분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통일이 되지 않고는 절대로 남편을 만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피난길에 서로를 잃어버리긴 했지만 다행히도 남쪽으로 온 사람들은 텔레비전의 특별프로로 얼마쯤은 만날 수 있게도 되었다. 이렇게 해서 만여 가족들이 만났다고 한다. 그러나 남북으로 갈린 가족들에게는 그림의 떡 같은 이야기였다.

지금까지 그러했듯 그들에게는 다만 체념의 교훈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주하의 소망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의 주변에서는 그 소망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엘리자베드와의 결혼도 그의 간절한 소망임에 틀림없는 듯했다. 그러나 처음 들을 때의 의구심과 달리 그는 그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가 가끔 성호를 그어서 의아하게 생각되긴 했으나 주하를 생각하는 그녀의 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듯했다.

결혼 승낙이라도 받기 위해 조부를 뵈러 가는 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종식에게 있어 엘리자베드와의 결혼이 주하의 소망일 거라는 추측과 그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망이라는 명제가 던지는 의구심은 어쩐지 확연히 풀리지 않았다. 그것은 어쩐지 더 높고 더 깊고 더 두터운 차원인 듯했다.

종식은 자신을 타일러 보았다. 역사학도인 자신은 주하의 조금 남다른 행동을 너무 역사적인 안목으로만 보려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역사에 파묻혀 사는 자신이기에 어쩔 수 없는 과오가 아닐까. 그냥 내가 자기한테 잘해 주고 나이가 좀 들었기에 여자친구, 남자친구를 하나씩 데리고 따라온 것일 테지. 기왕에 그리스 여행은 한번 해 보고 싶었고. 이렇게 생각해 버리니 종식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짐을 느꼈다. 

그러나 이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나서도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는 주하의 상황은 여전히 의구심을 품게 했다.
그나저나 왜 주하는 종식 자신과 비슷하게 여행을 떠나게 되었을까가 가장 큰 의문거리였다. 종식이 여행을 떠나기 직전에 주하는 뻔질나게 종식의 방을 드나들었다. 언제쯤 떠나느냐, 그 날짜가 확실하냐, 뭘 타고 가느냐, 그 경로는 어디로냐, 무엇을 보려고 하느냐, 호텔은 예약해 두었느냐, 아테네 체류기간은 대략 며칠이냐, 그리스인을 친구로 사귀고 있느냐는 등등 주하는 오만 가지 질문을 퍼부었다.

브린디지에서 주하와 만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듯했다. 주하는 의도적으로 자신을 뒤따라온 것 같다. 무엇 때문일까. 전혀 짚이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주하가 자기에게 한 말을 곰곰이 되새겨 보면 어떤 암시적인 것이 없지 않은 듯도 했다. 
주하는 어느 날 밤 기숙사 잔디밭에 앉아 이런 소리를 했다. 역사란 잔인하지만 역사를 보는 역사학자만큼 잔인하지는 않다고. 그의 이 말이 이번 여행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주하는 종식을 역사학자로 의식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람 부는 갑판에서 웬 사내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짧은 콧수염을 길렀고 머리털은 스포츠형이었다. 푸르스름한 전깃불은 사내를 한결 완강해 보이게 했다. 결코 적은 나이는 아닌 듯했다. 작은 키의 사내였다. 그는 손바닥을 마주 대어 비벼 댔다.

“그리스 여행을 하실 참입니까?”
깨끗한 불어 발음이었다. 엘리자베드에게 말을 걸다가 그는 종식 쪽으로 힐끗 눈길을 던졌다. 몸짓이며 짙은 빛 머리칼이 일견 프랑스인 같지는 않았다.
“그럼은요. 이 배에 타고 있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 여행객들이지요.”
“그야 그렇지요. 난 그리스인입니다. 그리스하고도 아테네 시민이죠. 내가 안내해 드리리다.”
사내는 또다시 종식의 얼굴을 훑었다. 선량해 뵈는 눈길이었다. 사내의 왼편 목덜미에 짙은 화상 흔적이 어둠 속에 어렴풋이 드러났다.
“그리스인이 어디 갔다 오시는 길이세요?”
그리스인이라는 말에 그녀는 동족애 같은 것을 느낀 듯했다.
“아, 난 그리스인이지만 파리에서 일하고 있죠. 사비엠이라구 프랑스에서 제일 큰 운송희사인데, 난 거기서 트럭을 몰고 있습니다. 여름 내내 일하고 이제야 겨우 휴가를 얻었죠.”
“왜 혼자세요?”
“아, 내 마누라요? 파리에 남겨 두고 떠났죠. 파리 제일의 그리스 요리기술자라 바쁘답니다. 마누라 덕택에 나도 프랑스에서 밥벌이하고 있지만……. 일본인인가요?”

그는 지나가는 투로 종식에게 질문을 던졌다. 종식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중국인인가 물었다. 또 고개를 저었다.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난 당신을 처음 봤을 때 한국인이라고 알아보았지, 반갑소이다.”
사내는 손을 내밀었다. 어둠 속이었지만 내밀어진 손잔등은 짙은 털을 숨기지 못했다.
“반갑다니? 무슨 소리요?”
“난 한국전 참전용사요, 여기 흉터 보이지 않소?”
“그런데 왜 첨엔 일본인이냐 중국 사람이냐 하고 물었소?”
“그리스까지 오는 한국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오. 실례했소이다.”

사내는 뭣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종식은 학생이라고 대답했다. 사내는 말했다. 학생은 가난하다. 나도 괜히 돈쓰기 아깝다. 자기 회사 아테네 지점에 가면 큰 트럭들이 주차해 있는데 운전석이 일류호텔 뺨치게 안락하다. 원한다면 따라오라고 했다. 가능할지 모르지만 트럭에 당신들을 태워 그리스 전체를 여행시킬 수도 있을 거라고 했다. 제의받은 측에서 정중히 거절했다.

“그럼, 어디에서 자려 하시오?”
“학생 전문숙박소 유스호스텔 있잖아요.”
“유스호스텔, 그건 바로 우리 회사 앞에 있는데. 거 참 잘됐소이다.”
“잘되다니 무슨 소리요?”
“하, 녀석! 내 한국전 전우가 있소. 녀석 당신 만나면 꽤 신나하겠소. 녀석이 오늘 날 만나러 회사에 온다고 했소이다. 그럼 쉽게 당신을 만날 수 있을 게 아니오.”

종식은 좀 귀찮은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를 떠나 이탈리아반도를 거쳐 여기 이오니아해까지 오는 동안 이들 외국인들이 그에게 끼치는 인상은 많이도 변해 있었다. 사람들은 그만큼 천박해 가고 있었다. 이탈리아에만 들어서도 지저분하고, 여기저기 가난의 때가 묻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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