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판 납속(納粟)에 대한 고민
21세기 판 납속(納粟)에 대한 고민
  • 성광일보
  • 승인 2020.05.06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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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수(건국대 사학과교수)
한정수(건국대 사학과교수)
한정수(건국대 사학과교수)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오만가지의 일이 늘 벌어진다. 우리가 벌이는 일이 태반이고, 나머지는 자연의 뜻이다. 자연과 우리가 벌이는 일은 당연히 상관관계가 있다. 때문에 옛사람들은 하늘의 뜻이 자연현상에 깃들어 있다고 믿었고, 인간은 그에 순응해야 한다고 하였다. 자연현상을 꼼꼼히 살피고 이를 기록에 남기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은 것은 이로 인해서였다. 점복과 천문,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의 등장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한 사관이 기록하여 우리가 해석하고 정리한 역사를 보면 왕조의 역사는 늘 흥망성쇠가 있다. 오늘날이라고 다른 것이 아니다. 현재의 시민국가 체제에 살고 있기에 잘 와닿지 않으면 기업을 보라. 주가가 하늘꼭대기까지 무서운 줄 모르고 치올랐다가도 급락하며 결국 기업해산의 위기에 처하곤 한다.

그들은 왜 그러한 운명에 처했을까? 우리를 둘러싼 혹은 기업을 둘러싼 혹은 국가를 둘러싼 환경은 매우 유동적이다. 정치는 생물이라고 한 표현이 이에 적절할 것이다. 그렇다. 인간의 정치와 자연의 환경이라는 생물은 수많은 변수들이 상호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것이기에 예측이 거의 불가능하다. 빅데이터가 쌓이고 있는 현재 이를 AI가 분석하여 해법을 내놓는 시대가 되었지만 아직은 그러하다.

오늘날 우리는 WHO에서 선언한 COVID-19 펜데믹 속에서 살고 있다. 이로 인해 지구는 BC와 AD 혹은 AC로 시대구분을 하고 있기도 하다. 참고로 B는 Before, A는 After이며 C와 D는 코로나(Corona) 대재앙(Disaster, Disease)을 말한다. 글로벌 지구촌 사회에서 살고 있는 지금 COVID-19는 급속도로 전세계에 퍼졌고, 5월 6일 오전 9시 기준으로 본다면 확진자 3,686,314명, 사망자 257,965명, 치사율 7.00%로 확인된다.(코로나19(COVID-19) 실시간 상황판 https://coronaboard.kr/) 의료 및 과학문명의 시대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야말로 21세기 공포의 시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지속적으로 이 같은 상황이 반복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도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일은 어제 오늘의 일만도 아니고 다가올 내일에도 발생할 수 있다. 과거의 역사 속에서는 이를 어떻게 극복하였을까? 혹은 살아남았을까? 인간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은 필요에 따라 협력을 하고 창의성을 발휘하며 분석하고 체계화할 줄 안다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를 파악하고, 그와 관련한 데이터를 쌓아 분석하며 문제 해결에 가장 합리적 방안을 찾아 실험하고 또 실험하여 99% 이상의 완치율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 이 같은 과학적 경향은 화학이나 생물학, 물리학, 천체물리학 등이 발전한 근대 이후에나 가능하게 되었다. 그렇더라도 분명히 인류는 재난 속에서도 살아남아 재난 이후 더 큰 발전을 이루었다. 과학문명이 발전하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이러한 면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필요에 따라 협력을 할 줄 아는 인간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라 본다. 다만 개인 간의 협력은 규모 면에서 한계가 당연히 있다. 때문에 공동체, 지역, 국가적 차원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전 지구적 차원은 아니더라도 우리 한국 역사 속에서 이를 보면 참고할 것이 있다. 본래 나라에서는 기본적으로 재난 상황을 대비해 창고에 곡식을 축적했다가 어려움이 닥치면 이를 풀어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휼하곤 하였다. 또는 세금을 줄이거나 면제해주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소위 진휼정책이 이에 해당한다. 그런데 때로는 이 같은 진휼정책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위기가 겹쳐서 오는 경우가 있다. 가뭄과 한발, 우박, 전염병, 홍수, 태풍, 외적 침입 등이 셋트로 오는 것을 상상해 보라. 사실 이는 상상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발생하곤 하였다. 때문에 먹을 것이 부족해 아끼던 가축을 도축하고 이어서는 초근목피라도 먹거나 그래도 어려우면 있어서는 안 될 ‘인상식(人相食)’의 비극이 나타났으며, 길거리에는 해골이 나뒹굴었다는 표현이 나왔던 것이다. 유랑민이나 도적의 출현은 당연한 것이었고 이것이 대규모화되면 나라가 바뀌는 일까지 등장하곤 하였다. 이는 흥망성쇠에 자연과 인간의 대처가 어떠한 영향관계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인 것이다.

따라서 위정자는 이러한 일이 있을 때는 먼저 반드시 신하들의 의견을 수렴하였고, 이어서는 자신의 덕이 부족함을 자책하였다. 그리고 반성하면서 덕을 닦는 정치 즉 수덕(修德)과 은혜를 베푸는 ‘혜화(惠和)’를 행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결이 안 되는 일이 발생하곤 한다. 제한된 재정 속에 환곡을 나눠준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겠는가? 단적으로 말하면 어렵다. 농사에 투자할 곡식을 남겨야 하건만 일차적으로는 살기 위해 식량으로 소비해 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라에서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백성의 생계 안정과 국가시설 정비 등을 도모하곤 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여유가 있는 이들로부터 소위 ‘기부’를 받는 것이었다.

옛날에는 이를 ‘납속(納粟; 곡식 등을 나라에 바치면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지급하는 것)’이라 하였다. 고려 충렬왕 원년(1275) 12월에 도병마사에서는 국가재정이 부족해지자 은을 바치게 하고 그 대가로 관직에 임명하는 조치를 취한 바 있었다. 기록상으로는 납은배관(納銀拜官)이라 하고 있으나 내용상은 납속보관(納粟補官)을 한 조치였다. 이때는 재정 부족이 그 이유였지만 한 번 이렇게 열린 문은 재정부족 때마다 언급되고 납속보관의 명이 내려지곤 하였다. 때는 왕조시대이자 신분제 시대인지라 이런 상황이 있게 되면 신분제의 변동이 잇따르게 되었고, 이에 대한 주의가 요구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위정자들은 납속보관의 조치는 어쩔 수 없는 위기 상황에서의 임시방편 즉 ‘권도(權道)’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현대사회에 들어와 기부문화가 확대되면서 상호부조의 틀이 마련되었다. 기부금제도가 이에 해당한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기부금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 내는 법정기부금, 문화예술 및 환경보호 단체 등에 내는 지정기부금(공익성기부금)으로 나뉜다. 이렇게 기부금을 댓가없이 자발적으로 내는 것이기에 국가에서는 이에 대한 세제 혜택을 통해 장려하는데, 연말정산 때 이를 반영하고 있다. 물론 옛날의 납속보관처럼 관직에 임명하거나 노비 신분에서의 해방 등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2020년은 COVID-19 펜데믹으로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세계경제의 혼란이 예정되어 있다.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자연의 힘으로 이루어지면 가장 좋겠으나 신의 뜻은 그렇지 않다. 인간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우리는 이에 대해 과학적으로는 당연히 백신 개발을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 번째는 위정자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내 탓이요’나 ‘부덕함’을 통해 자기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신중함이 생기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유덕자(有德者)’인 정치지도자가 하늘의 뜻을 잘 받들도록 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정치현실은 이와 맞닿아 있다. 세 번째는 수덕(修德)의 정치와 협력을 통해 극복해야 한다. 맹자는 천시(天時)와 지리(地利), 인화(人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인화라 하였다. 인화의 가장 큰 바탕은 겸손과 양보와 배려일 것이다.

사회에는 현재 21세기 판 납속(納粟)을 할 것이냐 아니냐로 논란이 있다. COVID-19 펜데믹 극복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위정자의 ‘수덕’과 납세자의 21세기 판 ‘납속’이 인화의 큰 방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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