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아테네 가는 배(9)
<소설> 아테네 가는 배(9)
  • 이기성 기자
  • 승인 2020.05.18 13: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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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성 / 성동문인협회 고문
정소성 / 소설가
정소성 / 소설가

나폴리를 떠난 기차가 브린디지항에 멎었을 때 본 미제담배 행상이 그것이다. 항구와 이 배에서 만난 그리스인들 모습에는 한결 짙은 옹색함이 찌들어 있었다. 여정은 바쁜데 볼 것을 보지 못하고 어정거릴 수도 없었다. 사실 엘리자베드의 테살로니키 행 권유도 썩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녀는 이 낯선 사내의 출현이 흥미로운 듯했다.
그녀는 주하가 궁금하다며 자리를 떴다. 싸움터를 뒹구는 주검들처럼 여행객들은 갑판 위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잠들어 있었다. 종식도 사내와 하직하고 그녀를 따랐다. 서늘한 바닷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주하는 침대 위에 목발과 나란히 누워 있었다. 눈을 감은 것으로 보아 잠들어 있는 듯했다. 어느 틈에 이굉석 씨도 자리를 옮겨 와 길게 누워 있었다. 그녀는 주하 앞에서 또 성호를 그었다. 그녀는 주하의 건너편 침대에, 종식은 2층 침대에 자리 잡고 누웠다. 시계는 벌써 새벽 2시를 가리켰다.
종식은 다시 멀미를 느꼈다. 멀미약을 준비하지 않은 게 후회스러웠다. 몸을 뒤척여 머리맡의 작은 커튼을 열었다. 밤바다가 다가서 있었다. 안내책자에 보면 배는 벌써 아드리아해로 접어들었다.

알바니아 앞바다에서 그리스의 서쪽바다로 접어들고 있는 중이었다. 전깃불을 만재한 선박 하나가 그리스 쪽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11월은 유럽대륙에서는 노동자들의 여행철이다. 여름철 바캉스로 빈 도시와 마을에 남아 그들은 산업시설의 가동을 위해 일했다. 다른 사람들이 돌아올 때 그들은 떠나는 것이다.
배가 곧 꼬르푸항에 도착한다는 안내가 방송되었다. 꼬르푸는 지독한 폐쇄 공산국가인 알바니아 남단에 떠 있는 섬이지만 그리스 영토다. 그리스는 서북으로는 알바니아 영해 깊숙이 꼬르푸 섬을 가지고, 동남으로는 터키 영해 속 깊숙이 사이프러스 섬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리스인들의 특출 난 항해술 때문이었다. 

고대 도시국가 시절의 아테네인들이 에게해를 넘어 트로이를 침공할 수 있었던 것도 이 항해술 덕택이었다. 유럽 최빈국의 하나인 그리스에 오나시스 같은 장사꾼이 있을 수 있는 이유도 그들의 선박단 때문이다. 

이오니아해 초입에 떠 있는 아름다운 섬 꼬르푸에 덴트를 치고 싶은 사람은 잠깐 내려 달라고 관광 안내방송까지 했다. 그리스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의 순으로 계속 방송했다. 많은 사람들이 내리는 모양이었다. 복도가 시끌거렸다.

종식은 더 누워 있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깨어지는 듯 아팠다. 밑으로 내려다보이는 엘리자베드는 엎드려서 무슨 책을 읽고 있었다. 머리맡 꼬마전구가 책갈피를 비췄다. 성경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종식 쪽으로 눈길을 던지더니 커피 한잔하러 가자고 제의했다. 종식은 이런 경우에 흔히 잠들지 못하는 자신을 잘 알고 있다. 그는 그 순간 아무 이유도 없이 자신의 이런 심각한 불면증도 어떤 역사정신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떠오름을 느꼈다.
종식은 2층 침대에서 다시 내려왔다. 배는 오래 정박해 있지 않고 금방 떠났다. 기적이 마구 울어 댔다.
홀에는 빈자리가 많았다. 남은 사람들은 의자에 앉아 모포를 뒤집어쓰거나 등산용 침구 속에 들어가 있었다.
엘리자베드는 커피 두 잔을 들고 왔다. 그들은 밤바다가 다가와 있는 창가에 나란히 앉았다.

“테살로니키에 가실 건가요?”
“글쎄요, 난 여정이 좀 바쁩니다.”
“주하는 가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되도록 가 보는 쪽으로 해 보지요. 그런데 주하는 왜 당신 조부모를 만나러 가는 건가요?”

종식은 내친김에 입 밖에 내어선 안 된다고 다짐해 온 말을 터뜨려 놓고 말았다. 그녀는 대꾸가 없었다. 어둠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창밖으로 눈길을 주고 있었다.
“주하는 주하라고 합시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이번 여행을 떠나게 되었소? 우리들의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 같소.”
이번에도 그녀는 대꾸가 없었다. 한참 망설이다가 그녀는 입을 열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하느님의 종이 되겠다고 굳게 다짐해 왔다. 처녀시절에 주하를 사귀고, 그가 왜 그렇게도 자주 여행을 하는지 눈치채고 난 뒤부터 이런 결심은 더욱 굳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불 지중해 연안 도시 세뜨에 있는 수도원에 들어가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세뜨는 폴 발레리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주하는 한 달에 한 번씩 자신을 찾아왔는데, 이번에도 같이 여행을 가자고 중국 사람 하나와 같이 왔다. 
마침 할아버지 할머니가 추진하시던 일이 좋은 결과를 맺을 것 같다는 편지가 있은 바로 뒤 떠나기로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무슨 일을 추진하시고 계시는데요?”
“주하가 부탁한 일인데, 말하기는 어렵군요….”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종식이 여행을 떠날 무렵 주하의 잠적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가 왜 종식의 여행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는지도 알 만 했다.
“트로이 전설을 아세요?”
그녀는 큰 눈올 뜨고 종식을 건너다보았다.
“트로이 전설? 트로이는 전설이 아니고 사실입니다. 트로이가 아테네와 왕비 납치 때문에 10년간 싸웠다는 트로이 전쟁은 사실성이 의심됩니다만, 호머가 지어낸 이야기인지도 모르고.”
“저는 역사학자의 지식을 묻는 것은 아니에요. 역사는 동서고금을 통해 늘 대결을 통한 승자의 탄생이라는 변증법의 되풀이였다고 하대요.”
“누가요?”
“주하죠.”
주하 말대로 그녀가 주하에게 결혼을 마구 졸라 댔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정신적으로 굳게 맺어져 있는 게 틀림없는 듯했다.

“역사학자에게는 그리 흥미롭지 못할지 모르지만 이런 전설이 트로이라는 고대국가와 같이하고 있어요. 나는 이 이야기 때문에 트로이란 고대국가가 인류의 정신계에서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요.”
“무슨 얘기입니까?”
아테네, 스파르타 등 그리스의 여러 도시 국가들은 동맹을 맺고 14척의 전함과 수만 군대를 이끌고 트로이로 쳐들어갔다. 트로이는 10년 넘게 버티었다. 왕자이자 용장인 엑또르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트로이는 역부족으로 멸망하고 엑또르도 전사했다. 

엑또르는 아름다운 아내 앙드로마크와 아들을 남겼다. 그녀는 에삐르의 왕 피루스에게 포로가 되었다. 피루스는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오만 금은보화를 다 선물했으나 거절만 당했다. 

그녀는 망부를 추모하기 위해 트로이에서 살던 궁궐 모형을 진흙으로 만들고, 궁권 앞을 흐르던 시모이강 모습을 손으로 파서 거기에 망부에의 그리움으로 흐르는 눈물을 뿌려 물이 괴게 했다. 

피루스도 전사하고 난 뒤 그녀는 망부의 동생인 헬레누스와 결혼했다. 시동생과의 결합은 완전 타인과의 그것보다 조금은 남편 가까이 가는 게 아니겠는가.
“거 참 슬픈 이야기군요. 난 그런 전설이 있었다는 건 처음입니다.”

“보들레르 아시죠? 너무나 시인다운 시인이지요. 병들어 굶어 죽었으니까요. 그는 이 전설에 감동되어 「백조」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어요. 앙드로마크여, 나는 너를 생각한다! 너의 작은 강물은/너의 무한히 장엄한 과부의 고통을/너무나 뚜렷이 비추어 주는 슬픔의 거울/너의 흘린 눈물로 불어난 그 가짜의 시모이강은…. 이 시를 지어, 당대의 시대정신을 대변했던 대가 빅토르 위고에게 바쳤어요. 그때 위고도 귀양 가 있었지만요.”
“위고라니, 『레 미제라블』의 작가 아니오? 『노트르담의 꼽추』도 쓰고. 왜 귀양을 갔었지요?”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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