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 민주화 운동 40주년에: 집단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하여
5·18 광주 민주화 운동 40주년에: 집단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하여
  • 정성은 기자
  • 승인 2020.05.21 17: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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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석 / 건국대 철학과 교수
김 석 교수
김 석 교수

5·18 광주민주화 운동이 있은 지 벌써 40년 세월이 흘렀다. 필자가 대학을 다니던 80년대 대학은 5월만 되면 광주학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시위로 하루도 조용하지 않았다. 

교정에는 학생들이 거칠게 갈겨 쓴 현수막이 출렁였고, 입간판처럼 늘어선 게시판에는 광주항쟁 계승의지와 진상교명을 요구하는 분노의 대자보가 빽빽했다. 

곳곳에 광주학살 희생자의 참혹한 흑백사진이 강렬한 섬광을 발하고 있었다. 처음 이런 사진을 봤을 때의 충격과 공포를 기억한다. 설마 대한민국 땅에서 우리 군이 민간인들을 이렇게 처참하게 죽이고, 부상을 입혔나하는 놀라움도 컸다. 

지금도 5월이 되면 그날의 성난 함성과 매캐하게 눈을 따갑게 하던 최루탄 냄새가 교정에서 나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당시 학생운동에 참여했건 참여하지 않았건 5월 광주는 모두에게 상처였고, 트라우마였다. 하지만 시간이 한참 흐른 지난 지금도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유족들의 눈에는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광주 트라우마는 이제 광주를 넘어 대한민국 전역에서 계속되고 있다. 5·18처럼 특정한 트라우마의 여파가 개인을 넘어 집단이나 국가 등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는 사회적 트라우마를 집단 트라우마라 부른다. 

언젠가부터 트라우마는 대중에게 친근하게 회자되는 정신의학 용어의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트라우마의 본질이나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여전한 오해가 있다. 개인 트라우마나 집단 트라우마나 비슷한데 혼자 감당하기 힘든 끔찍한 사건을 경험하거나 정신적 충격이 클 때 그 사건의 후유증으로 큰 심리적 고통을 당하거나, 극복이 힘든 무력감, 우울감, 자살적 반복충동에 시달리는 것을 말한다. 

'외상'이라는 어원에서 보듯 외부로부터 오는 정신적 상처와 고통이 트라우마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트라우마 증상에 시달리는 사람은 실제로 과거 기억과 경험에 사로 잡혀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건적 인과론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경우 똑같은 것을 경험하고도 트라우마에 걸리지 않고 그것을 잘 극복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가 왜 발생하는지 설득력 있게 설명하기 어렵다. 
또 집단 트라우마 원인으로 가정되는 사건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외상적 정서와 경험이 확산되거나,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비슷한 기억과 정서가 전승되는 이유도 설명하기 힘들다.  

우리가 트라우마를 너무 의학적 모델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9·11 테러는 그 사건 당시 뉴욕에 살았고, 이를 직접 목격한 사람 뿐 아니라 미국인 모두에게 두려움과 불안을 안겨주었고, 별 상관없어 보이는 사람 중에도 테러에 대한 공포에 사로 잡혀 있는 경우가 많다. 
5·18 광주민주화 항쟁도 마찬가지다. 세월이 그렇게 속절없이 지났고, 당시 항쟁 참여자. 가족이나 지인들 중에도 돌아가신 분들도 많지만 여전히 우리 가슴에 아리게 남아 5월의 시간을 무겁게 회상시키면서 슬픔을 주고 있다.

집단 트라우마가 발생하는 원인을 제대로 알면 그것의 근본적 치유방법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의학적 관점을 넘어 트라우마를 구조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2009년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소탕 작전에 참여한 병사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한 종군기자가 이들의 심리를 추적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했는데 거기에 따르면 병사들이 사지에서 귀국한 이후 절반 가까이 트라우마에 빠졌다고 한다. 오히려 전쟁 당시에는 사기도 충천했고, 생과 사를 넘나드는 경험을 하면서도 씩씩했는데 귀국 후에, 그리고 실제 전투에 참여하지도 않은 군인들도 영구적 노동능력 상실을 호소했다고 한다. 

다큐멘터리 제작자 서배스천 융거는“퇴역 군인들에게 트라우마를 안긴 것은 참혹한 전장이 아니라 더는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회”라고 결론을 내렸다. 

집단 트라우마 뿐 아니라 개인 트라우마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어떤 충격적 사건을 경험한다고 트라우마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기억화하고, 삶에서 의미화 하느냐가 트라우마 발생에 더 중요하다. 

최초 사건이 원인임에는 분명하지만, 트라우마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고, 그 후 과정이 더 중요하다. 특히 세월호 사건, 광주 5·18, 제주 4·3 같은 집단 트라우마는 당시 충격이나 외상적 경험보다는 그 후 이것을 기억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작용하는 다른 요인이 트라우마를 발생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런 요인은 트라우마의 원인이라 할 만한 외상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평가, 그것에 대한 상징화 작업, 공동체의 연대와 지지 여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어 5·18 광주민주화 운동에서 군의 투입, 살인적 진압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누가 발포명령을 내렸는지 밝혀지고 억울하게 살해당하고 폭도로 단죄를 받은 사람들의 명예회복과 애도가 사회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광주는 한국인의 집단 트라우마로 계속 작용할 것이다. 

치료의 원리도 여기서 찾아야 한다. 『트라우마: 가정폭력에서 정치적 테러까지』의 저자 주디스 허먼은 정신과 의사임에도 트라우마를 질병처럼 이해하는 시각을 비판하면서 트라우마 치유는 공적인 장에서 희생자들에게 공감하고 연대하면서 결속력을 높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해결책임을 강조한다. 

이점에서 이번에 대통령이 강력한 진실규명과 명예 회복을 강조하고, 모처럼 여야가 한 목소리로 광주민주화 운동을 북한의 소행이고, 폭동이라고 왜곡하는 일부 극우의 논리를 비판하면서 제도적 해결책을 강조한 것은 큰 진일보다. 공동체가 상처를 보듬어주고, 이를 모두의 책임으로 끌어안는다면 어떤 재해나 충격도 이겨낼 수 있다. 트라우마는 개인이 아니고 사회가 치료해야 하는 증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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