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아테네 가는 배(10)
<소설> 아테네 가는 배(10)
  • 이기성 기자
  • 승인 2020.05.26 17: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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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성 / 소설가
정소성 / 소설가

“나폴레옹 3세에게 잘못 보인 거죠.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보들레르가 읊은 「백조」는 물론 앙드로마크를 말하는데, 고향을 잃어버린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해요.”
“거 참!”
종식은 알지 못할 감동이 가슴을 적셔 옴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한번 뒤흔들어 보았다. 뭔가가 뚜렷이 잡히지는 않지만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듯한 어떤 울적한 감각을 그는 느끼고 있었다. 그는 갈증을 느꼈다. 맹물로 해결할 수 있는 갈증은 결코 아니었다.
“위고의 귀양생활은 19년이나 계속되었어요.”
“19년이나…….”
“국외에, 그것도 영불해협에 있는 게르네지 섬에서……. 
그러나 그에게는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와 동조자들이 있었죠. 그는 시대정신의 대변자였어요.”
종식은 고된 유학생활 중 너무나 고국이 그리워 괴롭던 세월이 생각났다. 그는 보들레르가 왜 위고에게 「백조」라는 시를 지어 보냈을까 생각해 봤다. 

사실 그는 문학하는 사람들의 세계에 대해 절벽을 느끼고 있었다. 쓸데없이 감정에 휘몰리는 나약한 사람들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는 끝내 갈증을 참지 못하고 위스키 한 잔을 시켰다. 한 모금의 독주는 상쾌감을 주었다. 또 한 모금을 마셨다. 빈속이라 금방 취기가 돌았다. 뭔가가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자신은 그리스 여행을 하는 게 아니라, 다가오는 어떤 것을 보고 증언하기 위해 이 배를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느낄 아무 이유도 없다. 그러나 주인공은 절대로 자신이 아니었다. 주하, 엘리자베드, 이굉석 씨 이들이 주인공이었다. 이들 세 사람 중에서는 누가 또 주인공인가. 물론 주하다. 두말할 여지가 없다. 주하,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너덜거리는 두 다리를 목발에 매달고 다니지만 반짝이는 두 눈을 가진 너, 언제 어디서나 독특한 몸으로 얼마든지 오토 스톱할 수 있는 너는 그래서 어디를 그렇게 쏘다니는가.

종식은 술기운에 몰려 의자에 기댄 채 잠으로 떨어졌다. 엘리자베드도 잠들었다. 그들은 그들을 실은 여객선 '이오니안스타'호가 그리스 서해안 북단의 항구도시 이구메니차에 입항한 것도 몰랐다. 

이구메니차는 꼬르푸와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 섬에서 육지로 건너가려는 사람들이 떼를 지어 올라탔다. 그러나 그들은 금방 내릴 사람들이라 공동휴게실이 있는 데까지는 올라오지도 않았다. 배는 금방 항구를 떠났다. 배는 기적소리를 내며 마구 어둠을 헤쳤다.
여명이 선창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실내를 꽉 메운 전깃불은 조금씩 퇴색해 갔다. 잠을 깬 여행자들은 다들 갑판으로 올라왔다. 그러나 종식과 엘리자베드는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주하는 잠에서 깨어났다. 어젯저녁에 끼니를 걸렀다. 주하뿐만 아니다. 모두 저녁을 걸렀다. 피로와 멀미에 지쳐 끼니를 제대로 챙길 여유가 없었다. 그는 딱딱한 빵조각을 씹는다. 빵을 씹다 말고 그는 뭔가를 잊은 듯 잽싸게 웃옷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는다. 무슨 물체가 만져진다. 그는 안심하는 표정을 짓는다. 돈지갑이라도 들었다는 뜻인지.

그는 빵조각을 씹으면서 눈길을 창으로 보낸다. 바다에는 어둠이 물러가고 있다. 멀지 않은 데 해안선이 보였다. 해안은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그리스의 허리뼈라 할 수 있는 핀두스산맥이 서편으로 치우쳐져 있기 때문이다. 

수평선 여기저기에는 작은 섬들이 떠 있었다. 코린트만 바깥에 흩어져 있는 이오나아제도 북단이었다. 섬들에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아 소문난 이오니아해의 아름다운 풍경은 볼 수 없었다. 

이굉석 씨도 잠을 깼다. 그래도 그는 꽤 깊이 잔 듯했다. 기지개를 켰다. 그도 빵을 찾았다. 
주하와 이굉석 씨는 양치를 하려고 했다. 세면실을 찾아나섰다. 근 11시가 거의 되어서야 종식과 엘리자베드가 객실로 나타났다. 그들은 빵을 나누어 씹고 커피를 사서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지루하면 갑판에 올라갔다. 지나는 길에 일등실 식당 안을 곁눈질해 보기도 했다. 꽤 고풍스런 의자에 젠 체하는 사람들이 앉아서 식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용휴게실과 갑판에는 사람들이 활기를 잃고 길게 뻗어 있었다. 지난밤보다 더 활기가 없어 보였다. 하룻밤 사이에 지친 듯했다. 

어젯밤에 대화를 거들었던 트럭 운전사는 종식과 엘리자베드를 만날 때마다 눈을 찡긋거렸다. 주하와 이굉석 씨와 맞부딪혀서는 먼저 손을 내밀어 자기소개를 했다. 

높이 떴던 해는 다시금 기울기 시작했다. 해안선의 절벽들이 기우는 햇살을 받아 찬란한 반사광을 창공에 뿌렸다. 뚜― 하는 기적을 내면서 '이오니안스타'호는 마구 내달았다. 밤 10시쯤 되어서야 배는 코린트만 입구에 자리한 그리스 서안 최대항구 파트라스에 닿았다.
배에서 내린 사람들은 한결같이 주눅 들어 있었다. 24시간 꼬박 뱃멀미에 시달렸다. 여행객들은 줄서서 입국수속을 밟았다. 입국수속이라야 별것 없었다. 여권을 보여 주고 배표를 반환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니 줄은 줄어들지 않았다. 주하는 여태껏 목이 아픈지 끙끙댔다.

건물을 빠져나온 그들은 마침 배에서 내린 여행객들을 위해 문을 열고 있는 여행사로 갔다. 안내서를 한 장씩 받았다. 그들은 안내서를 펼쳐 들고 유스호스텔을 찾아 나섰다. 부두에서 멀지 않았다. 개인저택을 유스호스텔로 전용해 쓰고 있었다. 건물 앞에는 해안을 따라 뻗은 도로가 보였다. 도로 저편에 바다를 뒤로하고 컴컴한 공간에 대형 트럭들이 주차해 있었다. 먼저 투숙한 여행자들이 간편한 차림으로 마당에 나와 있었고, 백열등 두 개가 마당 구석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현관 안으로 들어가니 좁은 복도가 나 있었고, 복도 구석에 젊은 사내가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국제학생증을 내놓고 세계연맹 회원증을 제시했다. 남녀 방이 구분되어 있었다.
종식은 주하를 부축해 배당된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숙박 손님을 받기 위해 만든 방이 아니었다. 상하단으로 된 철침대가 넓은 공간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침대에는 매트는 물론이고 담요 한 장 놓여 있지 않았다. 유럽대륙에서 이렇듯 유스호스텔 시설이 엉망인 나라도 찾기 힘들다. 이 나라의 가난이 피부로 전해졌다. 관광자원을 팔아먹고 사는 나라가, 유럽 고객의 대부분이 들락거리는 이 외항의 유스호스텔 시설을 이렇듯 방치한다는 사실은 그들 경제력의 한계를 말한다. 방 안에서는 모기 나는 소리가 들렸다.

종식은 주하를 데리고 정원으로 나왔다. 엘리자베드는 벌써 나와 있었다. 그들은 정원을 나와 큰길을 건넜다. 자갈발이 있고 바다가 그 너머로 펼쳐져 있었다. 지중해의 함성이 고막을 찢으며 들려오는 듯했다. 먼 데 항구의 건물들에서 흐르는 전깃불들이 망막한 바다 위를 적시고 있었다. 
사실 인류의 역사가 대서양, 태평양에서 이룩된 것은 최근세의 일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신대륙의 발견에서 기인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반만년 역사는 어쩌면 거의 언제나 이 지중해에서 명멸하였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의 뒤를 잇는 로마제국의 건국도 함락된 트로이 왕족 한 사람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 지중해로 도망쳐 바다 위를 떠돌다가 이탈리아 반도에 상륙함으로써 가능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의 사실성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수많은 그리스 신화, 그것은 그 허구성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인류 정신사에 한몫을 감당해 왔다. 그중에는 얼마쯤 사실성이 인정되는 신화도 있다. 트로이 전쟁담이 바로 그것이다. 트로이가 그렇게 빨리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올림포스의 여러 신들이 양 파로 갈라져 저마다 다른 편을 응원했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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