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에피소드
<수필> 에피소드
  • 이기성 기자
  • 승인 2020.06.05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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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선
이예선
·광진문학 신인상 수상
·광진문학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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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엘리베이터에서 가끔 마주치는 젊은 여자가 있다. 내가 운동하러 가는 시간과 그 여자의 외출 시간이 거의 같은 모양이다. 종종 마주치니 서로 눈인사라도 하면 좋으련만 모르는 이와의 스쳐가는 인연이 어색한지 매번 다른 곳을 보며 외면한다. 솔직히 나 또한 여자의 이런 태도가 차라리 편하다.

그날은 무엇 때문인지 입구 가까이 있던 내가 그 여자보다 늦게 내리게 되었다. 여태는 내가 먼저 내려 현관문을 잡아주었는데 이제 내가 그 예의를 받을 차례다. 문을 잡고 기다려주는 시간이 길지 않도록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얼른 뒤따라 내렸다.

“쾅!”
갑자기 뭔가 세게 부딪치나 했더니 그 젊은 여자가 현관 유리문을 발로 차서 문을 여는 것이었다.

'세상에!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가 어떻게 저런 짓을….' 대놓고 말은 못하고 속으로 탄식만 했다. 유리문 깨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다음 날 그 여자를 또 만났다. 어떻게 하나 보고 싶어 늦게 내리려고 일부러 승강기 거울을 보는 척 뭉그적거리다 그 여자 뒤를 따라 내렸다. 아니나 다를까 또 똑같은 행동을 한다. 무슨 축구 묘기를 보는 것도 아니고 유리문이 깨지지도 않고 열리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양 손에 물건을 든 것도 아닌데 아니 물건을 들었어도 그렇지 그 무거운 유리문을 어떻게 발로 차서 연단 말인가. 강화유리 품질 검사를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전생에 축구선수라도 했었나? 아님 화가 많이 나서 분풀이라도 하는 건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너무나 당당한 태도에 질려 잘못된 행동을 지적할 용기도 없으니 차라리 안 보는 게 낫겠다 싶었다.

'에이, 5분 일찍 집을 나서든지 해야지.'
“안녕하세요~오”

엘리베이터를 타니 늙수그레한 중년의 아저씨가 인사를 한다. 눈은 휴대폰에 둔 채 말로만 한다.
퍼뜩 '이 아저씨 영혼 없는 인사를 하시네. 뭐, 아무렴 어때' 하면서도 “아, 네~ 안녕하세요”하고 같이 인사를 했다. 보아하니 내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엘리베이터 안 모든 사람에게 그리한 모양이다. 옆에 선 여자가 웃으며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그렇다고 알려 준다. 영혼이 있든 없든 그 말 한 마디에 마음이 가뿐해지는 느낌이다.

인사 덕분인지 밝은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다.
집에 가는 길, 운동 삼아 계단으로 올라갈까 하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기로 했다. 웬 아저씨가 휴대폰을 보고 있다. 아침의 그 아저씨다. 바깥을 숱하게 드나들었어도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웃인데 공교롭게 저녁에 또 마주쳤다. 눈길은 여전히 휴대폰에 가 있다.
쓸데없는 상상을 해본다. '얼굴 보고 인사하기 민망해서 휴대폰만 보는 거 아냐?'

내 엉뚱한 상상과 상관없이 휴대폰 아저씨는 사람들이 내리는 기척을 용케도 알아채고 인사를 한다.
“안녕히 가세요~오”

5층에서 내리는 아주머니에게도, 6층에 사는 내게도 그리 인사했으니 다른 이에게도 당연히 그랬을 게다.
어색하더라도 눈 마주치는 이에게는 같이 눈인사를 하고 그렇지 않은 이에게는 나도 같이 외면했던 지난날들. 남의 일에는 관심도 없을 뿐 아니라 내게로 향하는 남의 시선이 싫어서 알은체조차 하지 않았던 그런 날들. 반상회가 없으니 일면식이 있을 리 없고 옆집에 누가 사는지 관심조차 없는 아파트 생활에서 인사 체험을 하고 보니 생각이 조금 바뀐다.

쑥스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이웃끼리 “안녕하세요” 인사 정도는 해야 되지 않을까 하고.
오늘도 운동하러 집을 나섰다. 하강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꼭대기 층까지 올라갔다 내려온다. 타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그 여자다. 축구공 차듯 현관 유리문을 발로 찼던 젊은 그 여자.

이웃을 만나면 인사해야지 하고 결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 여자라서가 아니라 막상 상황에 맞닥뜨리니 입이 안 떨어진다.
'안녕하세요'가 입에 붙으려면 아무래도 영혼 없는 인사 아저씨를 엘리베이터에서 몇 번은 더 만나야 할까 보다.
그 여자와 내가 멀뚱멀뚱 서로 외면하고 있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1층에 도착했다.

나는 괜히 미적거리며 늦게 내리려는데 그 여자 행동이 굼뜨다. 돌아보니 다리에 기브스를 한 채 목발을 짚고 있다.
'뭐야? 유리문 대신 다리가 부러진 거야?'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유리문을 발로 차다 다리가 부러진 거라고 나는 단정하고 말았다.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으며 문을 열어 주었더니 “고맙습니다.”한다. 그래, 뭔가 사정이 있었겠지. 처음부터 과격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안녕하세요!' 한 마디에 내 하루가 밝아졌듯 이 여자야말로 안녕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여자를 뒤따라 나가며 조용히 되뇌어 본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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