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아테네 가는 배(11)
<소설> 아테네 가는 배(11)
  • 이기성 기자
  • 승인 2020.06.11 11: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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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성 / 성동문인협회 고문
정소성
정소성

멀리, 항구 건물에서도 하나둘 전깃불이 꺼졌다. 외등만이 쓸쓸히 어둠을 물리치고 있었다. 엘리자베드가 가지고 나온 빵조각을 씹었다.
“저기 웬 사람이 이리로 오고 있소.”
뒷전에 앉아 있던 이굉석 씨였다. 모두들 고개를 돌렸다. 한 사내가 어둠에 몸집을 숨긴 채 걸어왔다.
“하! 여기 계셨구만. 찾느라 고생했수다.”트럭 운전사였다. 그는 자신이 한 말을 실천에 옮긴 것뿐이다. 그들은 사실 그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흔히들 만나게 되는 여러 종류의 한 사람쯤으로 여긴 것이다.
“용케 오셨소. 같이 앉아서 이야기나 나눕시다.”
종식이 자리를 권했다.
“잠자리는 잡았소? 내가 뭐랍디까. 내 트럭 안에서 자는 게 더 나을 거라고 했잖소. 참! 저기 내 친구가 와 있소. 얼마나 반가워하는지…….”
사내는 모래밭 쪽을 가리켰다. 그러나 어둠 속에 우뚝 서 있어야 할 다른 사내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잡초 속에서 뭔가 삐거덕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트럭 운전사가 달려갔다. 그는 수풀 속에서 무슨 휠체어에 앉은 한 사내를 통째로 끄집어내었다. 트럭 운전사가 휠체어를 밀었다. 거기에 앉은 사내는 보기 싫지 않은 대머리였는데 수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 그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한국 사람들이라니 이 얼마나 반갑소. 난 마라차요. 한국전 때 가평전투에서 부상했소. 자들 앉으시오.”
사내는 영어로 말했는데 너무나 서툴러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들은 한 사람씩 그와 인사를 나누었다. 주하의 손을 잡고 그는 회상에 젖는 듯했다. 그러나 주하는 전쟁 부상자는 아니다.
“내일 테살로니키로 떠난다고 들었소. 나도 좀 붙여 주시오. 내 고향은 아니지만 바로 옆이오. 트라키아 지방이라고.”
“아, 그러세요? 같은 방향이군요. 그래서 성함이 마라차 씨군요.”
엘리자베드가 말을 받았다. 마라차는 그리스의 동북단 국경을 흐르는 강이다. 트럭 운전사는 괜스레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내일 내가 바캉스 보너스로 회사 지점에서 마이크로버스 한 대 빌리지. 내가 운전하면 최고야. 프랑스에서도 무사고 운전사였으니까.”
운전사는 그들을 위해선지 불어로 지껄였다. 그러고는 금방 그리스말로 친구에게 내용을 알려 주는 듯했다. 휠체어의 사내는 운전사의 손을 잡고 무슨 소리를 했다. 고맙다는 말인 듯했다.
그런데 갑자기 운전사는 휠체어의 사내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자네는 안 돼 하는 소리 같았다. 일행에 끼워 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휠체어의 사내는 순간적으로 침울 속에 빠져들었다. 우연히 만난 그들 속에 끼어 고향을 가려고 했던 것이 잘되지 않은 탓이리라. 휠체어의 사내는 운전사에게 무슨 소리를 마구 해 댔다. 제발 데리고 가 달라는 말인 듯했다. 
종식은 답답해서 무슨 소리냐고 운전사에게 물었다.
“마라차는 고향인 트라키아에 가면 안 될 이유가 있죠. 그래서 나는 그를 말렸소이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을까요. 그리스는 분단된 나라도 아니지 않소.”
“글쎄요, 그렇게 쉽게는 말할 수 없소.”
운전사는 갑자기 그답지 않게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휠체어의 사내를 곁눈질했다. 훨체어에 앉은 모습이 여간 불안해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이유인지 잘 모르지만 같이 가시지요, 운전사 양반.”
주하가 나섰다. 신체의 같은 부분이 불구라 무슨 동류의식이라도 느낀 탓인지 알 수 없었다.
“마라차를 데리고 가면 안 되는데…….”
운전사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종식은, 깊은 애수를 머금은 휠체어의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순간적으로 분위기를 압도한 침묵을 타고 파도소리가 전해졌다. 종식은 눈앞의 사내가 파도에 휩쓸려 어디론가 떠내려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 종식의 옆구리를 가볍게 건드렸다. 종식은 얼굴을 돌리지 않고서도 그가 주하임을 알 수 있었다. 이야기를 더 끌지 말라는 신호인 듯했다.
분위기가 갑자기 침울해졌다. 휠체어의 사내가 너무나 심한 불구임이 드러났다. 그는 주하와는 비교할 바가 아닌 불구였다. 그는 그냥 휠체어에 얹혀 있을 뿐이었다.
운전사는 무릎을 굽혀 친구에게 무엇을 다짐하는 투로 말했다. 휠체어의 사내는 맹세하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마라차를 데리고 가기로 합시다. 사실은 그쪽으로 가면 안 되지만…….”
그들은 내일을 약속하고 자리를 떴다. 운전사는 다시금 원기를 되찾았다.
“올여름 바캉스는 제대로 하누만. 마누라쟁이한테 파리로 전화라도 한 통 해야겠는걸. 우리 마누라 말이요, 갓 결혼해서 내가 한국전에 투입되었는데 창피스럽게도 편지를 날마다 한 통씩 해 대더라니까…….”
그가 불어로 지껄이는 것을 보아 주하 일행을 의식하는 듯했다. 그는 다시 원기가 솟구쳐 떠들어 대 다가 침묵에 빠져 있는 마라차를 보고는 찔끔했다. 그러고는 그리스말로 뭐라고 마구 지껄였다.
트럭 운전사는 헤어질 뜻을 비쳤다. 피곤할 테니까 어서 잠자리에 들라고 했다. 그는 휠체어 위에 오뚝이처럼 올라앉은 마라차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는 휠체어를 밀고 가면서 가끔 그들 쪽으로 고개를 돌리곤 했다.
그러다간 손을 번쩍 쳐들기도 했다. 그들이 향해 가는 곳에는 어둠을 머금은 트럭들이 여러 대 주차해 있었다. 갑자기 트럭 운전사가 쳐든 한 손을 어둠의 공간 속에 마구 휘둘러 대며,
“꼬레 꼬레 꼬레  따이우 따이우 따이우.”
했다. 꼬레는 프랑스어로 한국이란 뜻이지만, 따이우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주하가 목발에 온몸을 얹은 채 입을 뗐다.
“내가 보기론 그 마라차라는 사람 아랫도리가 완전히 날아가 버린 것 같습디다. 아마 틀림없이 성불구잘 겁니다.”
종식의 생각과 같았다. 엘리자베드와 이굉석 씨는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궁금한지 어둠 속에서 눈을 껌벅거렸다. 
그럼, 주하 너는 어떠냐고 물어 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사실 한국 유학생들은 주하의 남성이 정상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놓고 토론을 벌인 적이 있었다. 
주하 스스로가 밝혔듯이 그가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서 그렇게 되었다면 아무 관계가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한편 그것도 명색이 다린데 두 다리가 저렇게 되었으니 그것인들 성하겠느냐는 주장도 있었다. 세 다리의 근육은 서로 연결되어 버팅기고 있는데 가장자리 두 다리가 저렇게 마비되었으니 그것인들 어떻게 무사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여학생들은 깔깔거렸다. 그래서 힘센 자윤 씨가 뒤에서 주하의 팔을 잡고 학상 씨가 앞에서 주하의 그것을 손으로 잡아 확인하기로 했다. 
어느 날 밤, 주하의 기숙사 방으로 놀러 가는 척하고 몰려갔다. 계획한 대로 실천에 옮겼다. 그러나 학상 씨가 잡은 것은 사타구니에 뭉쳐진 옷이었다. 겨냥이 빗나갔다. 다시 잡으려는 순간 주하는 손을 빼었다. 그는 껄껄 웃으며, 
“걱정 말라고, 걱정 말라고.”
했다.
“나는 고자는 아니니께.”
학상 씨 이야기로는 그 속옷뭉치 옆에 뭔가가 있어서 뚜렷한 촉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러나 학상 씨가 잡은 게 옷 뭉치였기 때문에 그들의 의혹은 더욱 짙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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