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아테네 가는 배(12)
<소설> 아테네 가는 배(12)
  • 이기성 기자
  • 승인 2020.06.24 14: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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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성 / 성동문인협회 고문
정소성

그리스인들이 사라지자 짙은 침묵이 밀려왔다. 침묵은 또한 파도소리를 밀고 왔다. 종식은 말없이 앉아 있는 이굉석 씨를 생각했다. 그와 주하와 엘리자베드가 공동으로 무슨 일올 추진하고 있다면, 무슨 일인지 확연히 알 수는 없으나 엘리자베드는 어쩐지 낄 만하다는 수긍이 갔다. 그러나 이 중국인은 무슨 연유일까. 주하와 무슨 공동의 일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중공이 북한과 밀착되어 있는 나라니까 주하의 요구대로 그의 아버지를 연결지어 줄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 이상 또 무슨 일을 더 깊이 추진할 수 있단 말인가.
“주하, 저기 중국 사람 수염 말이오. 참 괴상스럽소.”
 종식의 목소리는 낮았다. 이굉석 씨는 이편의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가짭니다. 걔들은 여권을 낼 때 가기로 한 그 나라 이외의 나라를 여행하려면 대사관의 허락이 필요하답니다. 만일의 경우, 신분을 감추려는 의도지요.”
“그래요! 신분을 숨기면서까지 여길 따라온 이유는 뭐요?”
“글쎄요, 의리겠지요. 되놈들 의리 하나는 기똥차대요.”
“의리라니? 무슨 소리요?”
“그와 나는 뭔가 오래전부터 같이 추진해 온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곧 결말이 나려는 참이지요. 그러니 그가 빠질 수 없다는 겁니다. 자신도 당사자라는 거지요. 중국 본토 되놈들,  6·25 때 우리를 죽이려고 총질을 했던 녀석들이지만 밉지 않다고 그는 덧붙였다. 그는 이른바 민족감정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정치 현실과 민족감정은 사뭇 다를 수 있다고 했다. 종식은 프랑스 지식인들의 친소 감정과 정치적 현실로서의 적대감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이굉석 씨도 정치적 현실감을 앞서는 어떤 친밀감을 주하에게서 느끼고 있단 말인가. 엘리자베드와 이굉석 씨는 저쯤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주하, 주하 어머님은 용산에서 뭘 하시고 계시오?”
 종식은 느닷없이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그것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내면에서 오래전부터 준비되어진 질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종식은 질문을 던져 놓고서야 그런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하, 우리 어머니요? 뭘 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하도 오래전이라.”
“아니, 주하가 한국에 있을 때까지만이라도…….”
“어머님은 삼촌의 빌딩 한 간을 얻어 수예점을 내고 있었습니다. 삼촌은 도산했지요.”
그는 목발을 끌어안고 모래밭으로 벌렁 드러누웠다. 앙상하고 볼품없는 그의 두 다리가 어둠 속에 드러났다.
“수예점을?”
“네, 수예점을. 그 뒤로는 잘 모르겠어요. 삼촌이 도산하자 숙모가 달아났다는 이야기를 편지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삼촌은 그 뒤 중풍으로 쓰러졌는데, 무슨 짓들인지, 의지할 데가 없어 어머니한데 얹혀산다는 겁니다.”
“삼촌은 피붙이가 없소?”
“그러니 말입니다. 두 분 다 자식복은 없는 분들이지요.”
 주하는 이야기를 더 계속하고 싶지 않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그는 몸을 돌려 누우며 목발의 위치를 손으로 확인했다. 숙모는 뭔가 가족들에게서 동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덧붙였다.
 종식은 주하에게로 쏠리는 호기심을 절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도 가 보고 싶었던 그리스 땅에까지 와서 자질구레한 주변적인 일로 시간을 쪼개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모래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도는 더욱 거세져 있었다. 유스호스텔 침대에 누우니 파도소리는 더욱 절절하게 들렸다. 사방이 조용했기 때문이다. 모기가 덤벼들어 종식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옆의 침대에 누운 이굉석 씨도 몸을 뒤척였다. 주하는 목발을 끌어안고 잠들었다. 새벽에 비몽사몽간에 잠을 깬 종식은 두통을 느꼈다. 이굉석 씨는 엎드려 책을 보고 있었다. 기하의 풀이가 한문으로 되어 있어 신기했다. 한문은 역사나 철학이나 시 구절에나 쓰이는 줄 알고 있었다. 
 그는 종식을 보고 싱긋 웃었다. 잘 잤느냐는 뜻이었다. 종식도 웃어 보였다. 그는 종식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책이었다. 유리창 쪽으로 내밀어 보니 지도책임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을 가지라고 그는 손짓을 했다. 겉장에 『中國地圖冊』이라고 씌어 있었다. 종이 질은 형편없었다. 일반적으로 지도책은 다른 책보다 좋은 종이로 만드는 법이다. 겉장을 넘기니 '祖國在世界上的位置'란 글자가 보였다. 한반도가 조그맣게 눈에 띄었다. 
 우리 반도는 '朝鮮'이란 글자로 표기되어 있을 뿐이다. 반도가 분단된 표시는 없다. 
 이굉석 씨는 손을 내밀어 다음 장을 넘기게 했다. '中國地形'이란 글자들이 보였다. 평야와 산악을 표시한 녹황색의 지도가 드러났다. 그는 한반도의 한쪽을 지적하곤 웃었다. 
 '西朝鮮灣'이란 글자가 보였다. 처음에는 잘 깨닫지 못했으나, 거기에 바로 주하의 아버지가 계시다는 뜻인 듯했다. 여태껏 잠들어 있는 주하 쪽을 그가 턱짓했기 때문이었다. 한반도와 비교해 보면 참으로 넓은 땅이다.
“중국 참 넓소.”
“958만 평방킬로요.”
 종식은 깜짝 놀랐다. 그가 주워섬긴 숫자의 정확도는 알 수 없으나 금방 그런 숫자를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뚫어지게 종식을 건너다보았다. 숫자의 개념이 확실히 인식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인 듯했다. 종식이 기억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면적이 10만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 약 백 배의 면적이다. 촌놈 티가 덕지덕지 처발린 저 중국 사람이 그게 아니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서 깊은 그리스 여행을 하며 수학풀이 책을 들여다보는 저 되놈은 과연 누구인가? 그는 자기네 땅덩이가 크다는 사실에 대해 긍지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대만은 3만을 좀 넘습니다.”
그는 덧붙였다. 자유중국인들에 대한 콤플렉스를 땅덩이의 넓이로 극복하려는 듯했다. 그것은 약 3백 배의 넓이였다.
“굉석 씨, 아침부터 무슨 독서요?”
“수학문제풀이를 읽고 있소.”
“여행길에 무슨 짓이오?”
“귀국 전에 내가 해득해야 할 과제가 있소. 그것을 위해서요. 우리 중국 사람 미사일 만드는 기술은 세계 세 번째요.”
“세 번째라니?”
“미국, 소련 다음이란 뜻이지…….”
“그래요?”
 종식은 믿어지지가 않았다.
“사실이오. 만들어 놓은 미사일을 실을 데가 없어서 소바리에 얹어 끌고 다녀서 탈이지만.”
 그는 놀라는 종식을 보더니 꽤 으쓱해했다. 국민 생활수준으로 보아 중공은 세계 최빈국에 속한다.
“우리가 사는 L시에 아르바이트해서 남편은 피아노를 공부하고 아내는 그림을 공부하는 젊은 대만 사람들을 아시오?”
 그는 찔끔했다. 그도 종식이 말하려는 것을 이해할 정도는 되는 사람이다. 그는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이 무식한 되놈아, 땅덩이 큰 거하고 미사일 잘 만드는 게 무슨 자랑거리냐.
“근데 종식, 그 대만 아이들이 이번 구정에 우리 본토 사람들을 자기네 집에 초대한다고 했소.”
 그는 계면쩍게 웃었다. 종식도 웃었다. 3백 배는 역시 큰 숫자개념이다. 종식은 녹색과 황색으로 가득 메워진 중국 지형도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그는 이굉석 씨가 왜 자기에게 이 지도책을 주는지 생각해 봤다. 알 듯하면서도 무언가 확연히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L시의 중공인들과 대만인들은 서로를 큰집, 작은집으로 부른다.
 어둠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파트라스는 등 뒤로 지중해를 업고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종식은 세수를 했다. 그리고 화장실을 들렀다. 지저분한 세면대며 샤워 시설에 정나미가 떨어졌다. 일찌감치 잠이 깬 덩치 큰 노랑머리 아가씨들이 씨근덕대며 샤워를 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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