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쓰다] 자기 밥, 자기가 차려 먹는 사람들
[청년, 쓰다] 자기 밥, 자기가 차려 먹는 사람들
  • 성광일보
  • 승인 2020.07.28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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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덕 / 자유기고가
권경덕
권경덕

6인용 스테인리스 압력밥솥을 주문했다. 버튼만 누르면 되는 전기 압력 밥솥이 아니라 단계마다 가스 불을 조절해야 하는, 처음엔 센 불로, 중간엔 약한 불로, 마지막엔 10분 정도 뜸을 들여야 하는 압력 밥솥이었다. 

어렸을 적, 압력밥솥 뚜껑에 달려있는 신호추 소리는 밥때를 알리는 알람 소리이기도 했다. 신호추가 칙-칙-칙 하며 돌아가는 소리는 바퀴를 서서히 굴리는 증기 기관차 소리 같았다. 조금 더 지나면 치기-지기-치기-지기-하며 좀 더 빠르고 리드미컬한 소리가 들려오고, 어쩌다 삐끗해서 신호추가 넘어지면 취--이-- 하며 김을 한껏 토해내는 소리가 들렸다. 그다음에 들려오는 소리는 어김없이 엄마의 목소리였다. "밥 드세요!", "밥 먹어라!"

'그 소리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며 어릴 적 노스텔지어 때문에 압력 밥솥이 생각난 건 아니었다. 최근, 초심에 대해 생각했다. 초심, 처음의 마음. 많은 종류의 처음이 있겠지만, 요즘 생각하는 처음은 자취를 시작하고 처음 밥을 지어먹었던 순간이다. 독립하기 전까지는 집 안에서든 집 밖에서든 차려진 밥상 앞에 앉아 좋아하는 반찬이 있으면 맛있게 먹고, 좋아하는 반찬이 없으면 주방장(어쩌면 엄마)에게 섭섭한 마음(어쩌면 불만)을 조금 갖는, 고작 그 정도의 인간이었다. 어마어마하게 먼 거리의 탄소발자국을 남기며 건너온 식재료들과, 엄마의 노동으로 차려진 식탁 위 음식들의 배경에서 심각하게 기울어진 세상을 보게 된 건 나중 일이었다. 부엌 일이 왜 엄마 몫이었는지, 수십년 동안 밥을 해왔는데 밥하는 일은 왜 경력이 인정되지 않는지, 왜 많은 엄마들이 "경단녀"로 불리게 되는지도 조금은 알게 되었다. 책에서 이런 구절도 보았다.

"장소가 의미 있으려면 소속감을 느끼고 나를 인정받는 곳이어야 한다. (...) 바깥사람, 바깥일 하는 사람은 '돌아갈 집', '기다리는 집밥'을 생각하며 버틴다지만, 부엌에 매인 사람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다. 안락을 낳는 장소에서 거기에 속한 사람은 정작 안락이 없다." -여자들은 다른 장소를 살아간다「부엌」중에서-

옥탑방에서 자취를 시작하고부터 스스로 밥을 짓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구입한 밥솥은 작고 통통하게 생긴 4인용 빨간색 전기밥솥이었다. 주로 백미를 먹었다. 반투명하고 딱딱한 맵쌀이 김이 모락 모락 나고 쫀득한 밥이 되는 장면은 은근히 감격스러웠다. 엄마가 옥탑방에 왔을 때도 밥을 지었다. 엄마 앞에 밥상을 차리는 기분이 묘했다. 

나는 분주하고 엄마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어서 좋았다. 원룸이라 "엄마 밥 드셔!" 하고 부를 필요는 없었다. 밥을 푸고 반찬을 올렸다. 엄마는 그날 조금 울었는데 독립한 자식이 차려준 따뜻한 밥상에 감동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하라는 취업 준비는 안 하고(당시 엄마가 말하는 취업은 대기업 or 공무원) 뭔지 모를 활동들을 하며(당시 알바를 하며 독서 모임 운영을 하고 있었으나 엄마에겐 일로 보이지 않는) 좁은 옥탑방에 살고 있는 자식이 못마땅해서, 진로 문제로 뾰족한 말을 주고받은 후 속상한 마음에 흘린 눈물이었다. 다행이, 밥은 무사히 잘 드셨다. 

빨간 밥솥은 1년이 지나 고장 났고, 그다음에 산 밥솥은 조금 더 큰 6인용 전기밥솥이었다. 지금까지 쓰고 있는데 안쪽 코팅이 많이 벗겨져 보기 흉하고 밥맛도 덜해졌다. 왠지 그 모습이 점점 밥하기 귀찮아하고 인스턴트 음식을 자주 먹는 내 꼴을 보는 것 같았다. 3분 카레와 라면을 먹고, 햇반을 데워 먹을수록 나는 점점 부끄러워졌다. 스스로의 밥도 잘 못 지어먹을 때,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미안해졌다.
밥에 집중하고 싶고 조금은 수고롭고 싶어서, 또 맛있는 밥을 짓고 싶어서 스테인리스 압력밥솥을 주문했다.

쌀도 백미보다는 현미를, 맵쌀과 찹쌀을 고루 섞고 잡곡을 불려 먹을 줄 아는, 한번씩 감자와 고구마, 그 외 재료도 넣어 능숙하게 밥을 짓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그렇게 '비혼 밥 마스터'라고 부를 수도 있는 원대한 꿈을 꾸며 주문한 밥솥을 기다렸다.

처음 밥을 지을 때 "자자차사"를 생각했다. 자자차사란, "자기 밥, 자기가 차려 먹을 줄 아는 사람들"의 줄임말이다. "차리는 사람, 먹는 사람, 치우는 사람이 따로 있으면 안된다"는 윤리강령을 공유하고, 밥상을 둘러싼 일에 뭐라도 참여하며 제 몫을 다하는 커뮤니티를 상상했다. 국어사전에 없는 이유는 내가 만든 말이기 때문이다.

차려준 밥만 먹을 줄 알고, 집안 일은 "집 사람"의 몫이라고 여기며 밖에서는 고귀한 가치를 웅변하는 어른이 되지 않기 위해, 처음 밥을 지었던 그 때를 떠올린다. 초심을 생각하며, 자자차사를 상상하며. 조만간 도착할 밥솥 생각에 나는 조금 들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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