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그리운 어머니
<수필> 그리운 어머니
  • 이기성 기자
  • 승인 2020.07.29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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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석 / 성동문인협회 이사
이규석
이규석 / 작가

시장 모퉁이에 좌대도 없는 초라한 곳, 땅 몇 뼘 위에 채소를 놓고 파는 어머니들의 모습이 점점 보기 어려워져 간다. 마트니 뭐니 해서 구매자 가까이에 깨끗한 매장에 잘 다듬은 다양한 채소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몇몇 재래시장 어귀에는 나이 드신 어머니가 도라지, 고구마 줄기를 조금 놓고 팔려고 다듬어 가며 앉아 계신 모습을 볼 수 있다. 
1970~90년대 단독 주택에 살 때였다. 우리 집 인근은 연립주택, 다가구주택이 혼재해 있고 인구 밀도가 꽤 높았다. 

그곳 골목길 입구에는 산나물이 많이 날 때, 상추와 쑥갓 등 노지 채소가 많아질 때는 아주머니들이 보자기를 좌판 삼아 산나물 또는 채소를 펼쳐 놓고 팔았다. 

위생상 문제가 있기도 하고 골목을 혼잡하게 하니 그런 곳에서 물건을 사주면 안 된다고 언론에 이따금 나곤 했다. 
나는 그곳의 아주머니가 마치 내 어머니를 보는 것 같아서 퇴근길에 채소를 사 들고 들어가곤 했다. 처음에는 아내도 의아해했다. 시장 봐오면 되는데……. 아니면 이미 시장을 봐 왔는데 웬일이냐는 것이다. 

6·25가 끝나던 해에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살, 2살짜리 남동생이 있었는데 농사일을 모르는 어머니는 빚을 저가며 살았다. 
그러나 생존을 위해 농사일을 배워가며 지으면서, 몇 해가 지나서부터는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시장 어귀에 가서 온종일 채소를 팔았다.  
일요일이 오일장 장날과 겹치거나 방학이 되면, 초등학교 4학년 시절부터는 내게 맞는 지게를 만들어 짐을 지워서 함께 장에 데리고 갔다.  
세월이 흐르면서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어머니가 이고 가는 것보다 내가 지고 가는 것이 더 많았다. 그때는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좌판도 없는 시장에서 채소를 펼쳐놓고 팔다가 아는 학생이나 동급생이 지나가면 얼른 외면하고는 했었다. 

점심때는 동료랄 수 있는 옆의 아주머니에게 채소를 맡기고 시장 뒷골목에 가서 장국밥 한 그릇을 사주셨다. 
지금 생각해도 그걸 먹을 때만큼 행복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맛있게 먹는 나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에는 자식 사랑이 넘쳐 남을 보는 것 또한 내게는 행복이었다. 

닭을 기르고 돼지를 길러 팔아서 억척같이 살아 빚도 다 갚고 재산이라야 별것 아니지만 우리 것이 쌓여갔다. 
세월이 한참 지나 내가 직장에 다닐 때였다. 떡을 팔려고 사무실에 온 분이 흰 치마저고리를 입은 모습에서 어머니 모습이 떠올라 떡을 꽤 많이 사서 나누어 먹고, 집에 가져간 적이 있었다. 

이 이야기를 어머니께 했더니 당신의 일처럼 좋아하고 다른 사람에게 '떡 팔러 사무실에 온 사람이 제 어미를 닮아서 아들이 그 떡 장사 아주머니로부터 떡을 많이 샀다네요'하고 자랑까지 하는 것을 보았다. 

전쟁으로 장비가 많이 부서진 1953년에 사장인 아버지가 직접 중장비를 다루다가 사고가 나서 갑작스럽게 먼저 저세상에 가시고 6남매를 키워낸 어머니의 이야기는 그 당시를 살아온 모든 사람의 고달팠던 인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세월을 집 안팎에서 함께 하며 어머니의 삶이 어떤지 알면서도 평생 모시지 못하고 나는 서울에서 살고 어머니는 고향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살았다. 
살아 계셨을 때나 20여 년 전 돌아가신 그 이후에도 내가 즐거울 때면 이런 모습을 어머니가 보셨으면 좋아했을 텐데……. 

생각하는 것은 물론이고, 때때로 선택의 기로에 설 때엔 어머니라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했을까 또는 내가 이렇게 한 것을 좋아할까 생각하고 행동했다. 

뒤돌아보면 어머니께서는 아들 며느리 그리고 손주들 거느리고 시골에서 사는 것을 제일로 생각했을 터이었다. 
덩치가 큰 아들이 농업고등학교를 들어가 6남매 중 농사꾼 하나 되게 생겼으니 참 좋다고 내 눈치를 보아가며 이웃사람들에게 말하곤 하셨다. 군청에 서기로 들어가 일하면서 틈틈이 농사일을 하는 건너 마을 선배 이야기를 이따금 하였다. 

그럼에도 농업고등학교에 다니며 어머니 농사일을 도와드리던 내가 농군이 될 것으로 기대한 어머니를 배반하고 고등학교 2학년 4월에 상경함으로써 어머니를 크게 실망시킨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죄송한 마음에 몸 둘 바를 모른다. 

서울이 좋다고 고향을 뒤로 하고 무작정 상경하는 사람이 많던 시절이었는데 나는 공부해서 대학에 가고 싶은 욕망이 있어서 상경한 것이기는 하였다. 그래도 고향에 남아 고생하는 어머니를 뵐 때면 큰 죄를 지은 느낌이 들었고 이것이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동기가 되었다. 

이 이야기는 내 자녀들에게도 자주 이야기했었는데 이제 초등학교에 다니는 손주들이 더 크면 이들에게도 사랑을 듬뿍 담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려 줄 것이다. 

'너희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해라. 그리고 너희 부모님 살아생전에 잘 해드려라.' 
아주 평범한 진리로, 살아계실 때 잘 해 드려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자괴감만 더 커진다. 당신께서는 아들을 서울로 떠나보내고 힘든 생활을 하여도 아들을 원망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잘 했다고 하면서 건강 돌보며 매사 조심하며 살라고 격려까지 했다. 

용돈을 드리면 받기를 어려워했지만 모시고 함께 여행을 가면 그렇게 즐거워했다. 살아계실 때 이런 말씀 하나 제대로 드리지 못했으니 참으로 어리석고 미련했던 것이다. 지금이라도 이렇게 절절하게 말씀을 드린다. 
3.1운동이 일어나던 해 태어났으니 기미년 생으로 내일 모래면 99번째 생일, 100세인 어머니께 애절하게 소리쳐 본다.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랑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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