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아테네 가는 배(13)
<소설> 아테네 가는 배(13)
  • 이기성 기자
  • 승인 2020.08.04 11: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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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성 / 성동문인협회 고문
정소성
정소성

기원전 1700년경 그리스의 제주도와도 같은 크레타 섬에 융성했던 문화가 남긴 유적 중에는 놀랄 만한 궁중목욕탕 시설이 있다. 지금 낡은 창고 한구석으로 찌그러붙은 샤워기 두 대가 남녀 구별을 위해 천 쪼가리를 사이에 두고 물을 흘리고 있다. 크레타문명의 화려한 유적이 믿어지지 않았다.

트럭 운전사가 과연 마이크로버스를 몰고 나타났다. 앞자리에 마라차가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 놓인 휠체어가 두드러져 보였다. 바다에는 벌써 붉은 기운이 돌았다. 바다는 검붉어지다 못해 결국 찬란한 태양을 땅덩이 위로 솟구쳐 올리겠지. 그러나 아직은 침묵에 빠져 있다. 운전사의 말소리가 여운을 띠면서 들리는 것은 바다의 침묵 탓이다. 그는 일찌감치 출발해야 자정께 테살로니키에 이를 수 있다며 채근했다. 엘리자베드는 짐을 챙겨 주하에게로 왔다. 그를 돌보기 위해서였다. 어젯밤보다 그녀는 한결 청순해 보였다. 과연 그녀에게서는 질은 신앙 냄새가 풍겼다. 뭔가 조금은 성스러워 보이는 인상이다.

마라차의 얼굴은 수척했다. 트럭 운전대에서 편히 잤을 턱이 없었다. 그들을 보고 그는 창백한 웃음을 흘렸다. 정적이 여태껏 깨지 않은 항구도시로 마이크로버스는 천천히 굴러들었다. 고요했다. 항구도시의 부산함이며 뭔가 삐걱거리고 고함소리 들리는 분위기는 찾을 길이 없다. 단조롭고 해맑다. 어딘가 잊혀진 유적지의 인상이다. 버스는 항구도시를 빠져나갔다. 그들은 빵 보따리를 풀었다. 브린디지가 아물거렸다. 이탈리아만 해도 여기서 먼먼 나라같이 느껴졌다. 마라차와 운전사는 브린디지의 빵을 맛있게 씹어 넘겼다. 핏빛으로 변해 가는 바다가 토해 내는 태양을 끝내 보지 못하고 그들은 항구도시를 멀리했다. 버스는 넓은 바다를 왼편으로 끼고 달렸다. 그리스의 내해 코린트만이다.
“형님, 그리스 역사 이야기 좀 해 주십시오.”

운전사 뒤에 앉은 주하의 주문이다. 그는 옆자리의 엘리자베드에게 불어로 자신이 한 말을 통역했다. 그녀는 건너편 자리의 종식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주하 뒤에 앉은 이굉석 씨도 눈길을 돌렸다.

“그리스 역사야 그리스인들이 더 잘 알지. 그런데 갑자기 그리스 역사는?”
“엘리자베드가 아는 그리스사란 단조롭고, 터키인들이 때려죽일 놈이라는 이야기뿐입니다. 역사학자의 이야기는 다르겠지요.”
“다르긴? 그리스 역사란 간추리면 간단하지. 기억할 만한 것으로 기원전 750년경 이 그리스인들이 해상으로 뻗은 시기인데, 이 빵 구운 이탈리아의 브린디지도 식민지였으니까. 다음이 기원전 5, 4세기에 해당하는 고전기인데, 2백여 개의 도시국가가 번영을 누렸어. 그런데 동서 대결의 시초라 할 페르시아전쟁에서 도시국가 동맹이 이겼다는 사실은 큰 의미가 있지.”
“그 전쟁은 왜 일어났지요?”
주하의 질문이다. 그의 얼굴에는 붉은 기운이 돌았다. 코린트해의 붉은 색채가 전해져 오기 때문이다.
“터키반도 쪽으로 붙은 그리스 식민지의 반란을 진압하러 출병한 아테네의 기운을 꺾기 위해서야. 다음이 알렉산더 대왕이 지배한 기원전 30년까지의 헬레니즘시대지. 한 3백 년 계속되었어. 기원후로 바뀔 무렵 로마 지배를 받다가 비잔틴제국으로 남는데, 동로마제국이라고도 해. 이 시기에 슬라브?불가리아인들이 많이 이주해 왔어.”
종식의 설명은 그들을 위해 가끔 불어로 통역되곤 했다. 이 부분에서 엘리자베드에게서 무슨 반응이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그녀는 무표정이었다.
“15세기 중엽부터 터키의 가혹한 지배를 최근에까지 받았지. 이게 다야.”
“특징적으로 말하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글쎄……. 뭐랄까, 정치 군사적으로 보면 터키 항쟁사라고 할 수 있을 거야. 문화적으로 보면 세계 최상에서 유럽 최후진으로 전락되어 가는 과정사고…….”

주하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옆에 앉은 엘리자베드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녀를 생각한다는 증거였다. 코린트해는 완전히 핏빛으로 물들었다. 핏빛은 이윽고 불꽃으로 변했다. 수평선에서 붉은 덩어리가 솟았기 때문이었다.
운전사는 말이 없었다. 지난밤 그의 수다가 믿어지지 않았다. 가끔 근심스러운 얼굴로 마라차를 건너다보곤 했다. 마라차의 꾀죄죄한 몰골도 붉게 물들어 갔다.

“그런데 도시국가들이 왜 망했습니까?”
주하는 침묵을 깼다.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싸우다가 망했지. 바로 펠로폰네소스전쟁인데, 스파르타가 아테네를 잡으려고 페르시아를 끌어들였지. 6·25 때 중공이 인해전술로 기어든 거하고 다를 게 없어……."

종식은 아차 했다. 이굉석 씨의 존재가 의식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국어를 모른다. 그래도 두 사람의 얘기가 흥미로운 듯 그는 눈을 껌벅이며 듣고 있었다.

운전사는 가끔 콧노래를 불렀다. 즐거운 모양이었다. 그는 느닷없이
“동두천, 가평, 인제…….” 하면서 한국의 지명들을 읊조렸다.

그들 중 한국인들에게 어떤 친근감을 주기 위해서인 듯했다.
그러나 주하와 종식은 운전사가 뱉어 놓는 한국의 지명들을 듣고도 아무 감흥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들은 제가끔 뭔가 깊은 생각 속에 빠져 있었다.

종식은 주하가 왜 테살로니키로 가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몇 가지 가능성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지만 금방 부정되었다. 현실성이 너무나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의 동행을 집요하게 요구하는 주하의 뜻을 도무지 헤아릴 길이 없었다. 자신의 결정 여하에 따라 아테네에서 그들과 헤어질 수도 있다. 볼 만한 사적 유물이란 대부분 아테네 주변에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루를 아껴서 볼 것을 보고 떠나야 하는 자신의 입장이다. 버스가 아테네에 이르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했다.

이굉석 씨는 두 사람의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를 경청하다가는 차창 너머를 바라보기도 했다. 바다, 붉은색, 이윽고 타오르는 태양광선의 범람이 있을 뿐인 코린트해가 끝없이 누워 있다. 

차체 오른쪽으로는 해안답잖게 청석의 절벽이 시야를 막고 있었다. 삭막한 풍경이었다. 차체도 뒤뚱거렸다. 아스팔트가 깔려 있으나 오래되어 파인 데가 적지 않았다.

이굉석 씨는 종식의 팔을 건드렸다. 자기가 그에게 준 지도책을 잠시 볼 수 없느냐고 물었다. 지도책을 받아 든 그는 붉은 색채의 바다를 배경으로 깊은 생각에 빠져드는 듯했다. 종식은 그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형, 지도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소?”
“생각을 좀 했소이다, 그냥.”
“그냥이라니 무슨 소리요?”
“상해에서 진남포까지 뱃길이 대략 얼마나 걸릴지 생각했습니다.”
“그건 또 왜요?”
“평양에서 의주로 해서 요동반도를 거쳐 북경, 남경, 상해로 온다는 건 사실 너무나 먼 거리입니다.”
“누가 옵니까? 그 길로…….”
“…….”
그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다시 지도를 들여다볼 뿐이다.
정오가 넘어서야 버스는 아테네에 이르렀다. 마라차는 차 안에서 졸더니 좀 멍한 기분이었다. 그는 하품을 했고 울적한 기분을 얼굴에 나타냈다. 운전사는 운전석 옆문을 열고 나가 마라차가 앉은 쪽으로 와서 문을 열었다. 휠체어를 들어냈다. 그리고 마라차를 들어냈다. 과연 하반신이 없었다. 바짓가랑이만 달랑 붙어 있었다. 그들도 따라 내렸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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