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학과 풍수 141. 동 양 오 술. (용대기 11)
동양학과 풍수 141. 동 양 오 술. (용대기 11)
  • 성광일보
  • 승인 2020.08.07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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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老泉) 김흥국/광진투데이편집위원장. 삼오지리학회장역임. 現. 한국현공풍수학회장. 신화씨엠씨(주)대표.
김흥국
김흥국

지난 시간은 중국의 중원천하에서 배달국의 치우천황은 각 지역서 소집한 부대를 거느리고 자신은 중앙에서 용대기를 앞세워 동아시아 대륙을 점령하면서 많은 유적과 유물과 역사를 남겼다.

이러한 추론은 용대기의 위협적인 크기와 기세배란 민속놀이와 현재 남아 있는 농악이나 전통놀이들을 통해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존재의 이유가 없는 사용언어들이나 연희보법들이 그러한 연결성을 가지고 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의 흔적들을 귀납적 방법으로 추적하면 그럴 수밖에 없는 현재의 존재물들을 해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필자의 추론이지만 마치 그물의 끝을 잡고 올라가면 손잡이인 벼리(維)가 나타나는 것처럼 당연한 결론으로 내려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이렇게 추측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이유는 왜정시대에 일제의 악랄한 민족혼 죽이기 작업으로 우리의 상고시대 역사서 약 5000종, 대략 20여만 권이 수탈당하여 불태워 졌기에 우리의 환국역사와 배달국역사는 잿더미 속으로 들어갔으며, 우리의 일만 년 상고사의 흔적은 달빛에 묻혀서 단군조선으로 시작하는 3000년 역사가 신화로 꾸며져 쪽방처럼 초라한 자취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조상의 환국시대와 배달국시대의 찬란한 문화와 유물과 정신문명들의 근거가 교과서에서 사라져 버렸기에 용대기의 출처와 기세배 놀이의 근원을 알 수가 없어 이렇게 현재의 증거를 역 추적하여 귀납적 방법으로 조상의 고유놀이를 더듬어 보는 것이다.

하지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우리의 재야 사학자들은 귀납적 방법으로 중국의 역서 속에서 우리 상고역사의 흔적을 찾아, 잃어버린 조상의 강역을 되짚어 증명하고 있으며, 불행 중 다행으로 환단고기, 부도지, 규원사화 등의 발견으로 상고사의 척주(脊柱)를 짜 맞추듯 이어 붙이고 있다. 더 정확한 기록은 일본의 왕실도서관에 동이족의 상고사를 밝힐 중요한 서책들이 대량으로 보관되어 있다하니 먼 훗날 우리의 후손들이 언젠가 선조들의 발자취를 햇빛처럼 밝힐 것을 기대한다.

각설하고 지난시간에 말했듯이 치우천황의 군대와 황제헌원의 군대가 대치를 했을 때 황제군은 오채기를 앞세워 부대를 식별하였지만 치우군은 각 부락의 상징인 동물 깃발을 부대상징으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중앙에는 거대한 용대기의 그림이 마치 용이 하늘에서 내려오듯 펄럭이며 위엄 있게 그려져 멀리서 보면 용을 앞세운 무수한 짐승들이 맹렬하게 달려오는 형상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화하족(華夏族)인 중국인들은 치우군대를 사람이 아닌 형상으로 기록했다.

동두철액(銅頭鐵額), 구리로 된 머리와 쇳덩이 이마, 인신우수(人身牛首),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 인신우제(人身牛蹄), 사람의 몸에 소 발굽, 그리고 사목육수(四目六手)는 4개의 눈과 6개의 팔이 달린 괴물로 기록하였으며, 이들은 돌과 모래와 쇳가루를 먹으면서 인간의 말을 하고, 머리에 두개의 뿔과 귀 옆에 칼날 같은 빳빳한 털, 입으로 안개를 뿜는 능력을 가진 인간이 아닌 도깨비로 생각했다.

이렇게 화하족은 치우군대를 극도로 무서워했기에 울던 아이도 치우군이나 용대기를 보면 울음을 그쳤을 것이다.

당시의 상황을 상상해 보면 치우군은 지난시간 고증한 연재에 의하면 고조선은 행정조직과 직급명칭과 부락이름 등을 동물의 명칭을 응용하였으며 이는 전시에는 각자 출신지역의 짐승그림을 최대한 무섭게 그려서 다른 부락과 식별하였으니, 전쟁에 임하면 무수한 짐승의 깃발이 장대 높이 그려져 있어 멀리서 보면 인간의 집단이 아닌 짐승이나 도깨비 부대로 보였을 것으로 당연히 추론할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기록에는 실제로 치우군은 호랑이나 무서운 짐승을 전쟁에 응용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니 울던 아이도 치우군이나 용대기를 보면 울음을 그쳤을 것이 당연하다.

그럼 이를 대적하는 화하족은 어떻게 부대를 식별하였는가? 그들은 전통적으로 오행을 바탕으로 한 오채기(五彩旗)를 사용하여 다섯 색상의 깃발로 식별하였다. 동쪽에는 청색(靑旗), 남쪽은 적색(赤旗), 서쪽은 백색(白旗), 그리고 흑색기(黑旗)는 북쪽을 상징하는 깃발로 동서남북을 배치하고 중앙에서 황금색의 황색(黃旗)기를 사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지금도 중국인들이 황금색 옷을 선호하는 것은 중앙 토의 권위를 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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