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아테네 가는 배(15)
<소설> 아테네 가는 배(15)
  • 이기성 기자
  • 승인 2020.08.11 16: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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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성 / 성동문인협회 고문
정소성
정소성

일제하 36년도 무서운데, 잔인하기로 이름난 터키 치하 4백 년은 어떠했겠는가. 아티카 지방의 수호여신 아테나를 모셨던 파르테논신전은 이슬람교 사원으로 변했고, 그리스인들의 독립운동이 치열해지자 화약고로 둔갑했다.

그러나 올림포스산의 열두 신 중 끝까지 정절을 지킨 여신답게 아테나는 결코 아테네를 버리지 않았다. 그리스인들은 아테나가 염소가죽 옷을 입고 있으며, 신묘한 위력을 가진 무기 아이기스를 짚고 다니는 아름다운 처녀로 상상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테네를 수호하기 위해 전차와 무기를 발명했으며, 여성다운 직업인 방직과 수예의 여신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종식은 아크로폴리스미술관에 소장된 '명상에 잠긴 여신 아테나'라는 대리석 조상을 꼭 한 번 보고 싶었다.

아크로폴리스 언덕으로 오르는 길은 완만한 경사였고 차량 통행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들은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트럭 운전사는 마라차의 휠체어를 밀고 엘리자베드와 이굉석 씨는 주하를 부축했다. 아테네인들 민회의 광장이었던 아고라를 지나쳤다. 아레오파고스 언덕을 지나 아크로폴리스박물관에 이르렀다. 여신은 깊은 고뇌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스 신화 속의 신들은 우주를 생성시킨 장본인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과 함께 태어났고, 인간과 더불어 살았다고 믿어졌다. 그들은 다만 무궁무진한 조화를 부릴 수 있었고 암브로이즈라는 영생의 술을 즐겼다고 생각되었다. 일생 독수공방한 그녀의 깊은 고독이 분위기로 잘 내배여 있었다.

주하는 아테나의 대리석 조상 앞에서 움직일 줄 몰랐다. 엘리자베드도 이굉석 씨도 마찬가지였다.
“조각된 이 여자신이 전사한 남편을 그리워하며 눈물의 강을 팠다는 겁니까?”

주하는 종식을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종식은 조금 역정이 났다. 주하가 똑같은 엉터리 질문을 두 번씩이나 했기 때문이다.

“그건 트로이 전설이고, 이것은 그리스 신화 얘기 아니오, 주하!”
그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좀 역겨운 생각도 들었다. 주하와 마라차의 불구에 외면하고 싶은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다.
“전설이고, 신화라……. 그러면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군요.”

밀어닥치는 관람객들이 많아서 여신상 앞에 오래 서 있을 수 없었다. 사람들의 소음에 섞여 주하의 목소리도 또렷하게 들리지 않았다. 박물관을 나와 신전으로 올라갔다. 마라차의 휠체어는 대리석 계단을 오를 수 없어서 그와 트럭 운전사는 언덕 아래에 남기로 했다.
아크로폴리스 언덕에는 햇빛이 가득했다. 저 멀리 피레우스항의 수면이 반짝이고 있었다. 발아래에는 먼지를 뒤집어쓴 듯한 아테네시가 귀신의 거처처럼 을씨년스럽게 누워 있었다.

그들은 신전을 한 바퀴 돌았다. 기원전 400여 년도 더 전에 저런 건조물을 지을 수 있었던 고대 아테네인들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이 도시의 수호신 아테나 여신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떠오르는 듯했다. 하지만 종식은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공의 신화 속 이야기라는 사실을 자신에게 환기했다.

“저 신전 속에 그 여신이 살았다는 겁니까?”
“산 것이 아니라, 산다고 아테네인들은 믿었소.”
“그러니 실제로 산 것은 아니었군요?”
“그렇소, '아테나 파르테노스'라 해서 지금은 파괴되었지만, 이 신전을 건축한 피디아스가 역시 제작한 여신의 본존이 봉납되어 있었다고 하오. 높이 10미터의 거상이라고 하지요.”
“전쟁과 지혜의 여신인 아테나가 또 왜 방직과 수예의 여신으로 떠받쳐졌을까요?”
“글쎄요, 그녀는 어디까지나 아테네의 수호신이었으니까 병기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는 속이 안 찼던 모양이죠. 시민들을 위해 옷을 지어내고도 싶었을 거요.”
“여자가 옷감을 짜고 수놓을 때에는 어떤 사랑의 감정에 빠진다고 하대요…….”
“그럴지도 모르죠. 원시인들은 남편의 성기를 다른 여인에게 보여 주기 싫어 그걸 가리느라 맨 처음 천을 짰다고는 하오……. 참, 주하의 노모도 수예점을 하신다고 했잖소?”
“수예라뇨? 늙으셔서 오늘낼 하시는데…….”
“거 참 안됐소! 그래 한 번도 오시지도, 주하가 가지도 않았소?”
“5년 전인가 삼촌이 한 번 다녀갔습니다.”
“빨리 귀국하시오. 대체 뭘 하고 있으시오? 그러다가 갑자기 돌아가시면 어떡하려고.”
“제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님은 그렇게 쉽게 눈을 감지 못하실 분입니다.”
“그걸 어떻게 임의대로 하오?”

그들은 신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아테네 시가지를 배경으로 또 사진을 찍었다. 피레우스 저 너머 아테네 국제항에서는, 은빛 날개도 선명히 기체들이 뜨고 내렸다. 그리스는 철도, 차도 등 육상교통이 엉망인 대신 항공로 발달이 뛰어난 나라이다. 관광객을 실어 나르기 위해서이다. 신화와 전설의 유적을 보러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온다. 요즘은 급한 세상이라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다. 저 멀리 활주로를 날아 사뿐히 창공으로 치솟는 은빛 기체들은 피레우스항의 푸른 바다를 차고 오르는 한 마리 학 같다.

사진을 위해 포즈를 취하는 그들 앞을 줄지어 지나가던 관광객 들 중에서 누군가가 손을 흔들어 댔다. 금발의 아가씨였다. 엘리자베드를 보고 그러는가 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는 사람이 아니라는 표정이다. 손가락은 정확히 종식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하, 생각이 났다. 나폴리 행 야간열차에서 만났던 동독 아가씨였다. 종식은 반가웠다. 달려가 그녀 손을 잡았다. 그녀는 무슨 십년지기나 만난 듯 그의 목에 마구 매달렸다. 양년들은 가끔 이렇게 분별없이 군다. 어찌 된 영문이냐고 물었더니, 비가 내려 남부 이탈리아 여행을 포기하고 곧장 나폴리로 되돌아와 아테네 행 비행기를 탔다고 했다. 기차 침대칸에서 성경을 뒤적이던 그녀 모습이 뇌리에 스쳤다.

종식은 함께 온 이들을 소개시켰다. 서로 자신을 소개하는 말 가운데서 종식은 그녀 이름이 니케인 것을 알았다. 니케는 아테네 관광을 마치면 옛 마케도니아의 수도 테살로니키를 거쳐,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와 루마니아의 수도 부카레스트를 보고,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 살고 있는 언니 집에서 친척들을 만나 좀 쉬었다가,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를 거쳐 동독의 베를린으로 돌아갈 작정이라고 했다. 그녀는 국제학생 여행카드를 가지고 있어서 한 달간 유럽 대륙 여행은 공짜라고 했다.

“우리도 아크로폴리스 언덕 아래 우리들의 차가 있어서 테살로니키로 간다. 같이 가지 않겠니?”
종식은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대학생들의 대화체인 반말지거리로 말했다. 그녀와의 만남이 재회 탓인 듯했다. 캠퍼스 안에서는 무조건 반말 투인 것이 그네들 습관이다.
“야, 신나는데. 괜지 널 만날 것 같더라니까. 정말 멋있는 여행이야!”

니케는 펄쩍 뛰었다. 그들은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내려왔다. 내리막길에서 쩔쩔매는 주하를 이굉석 씨가 들쳐 업었다. 그의 코밑수염은 자취를 감추었다. 엘리자베드는 주하의 손바닥만 한 엉덩이를 뒤에서 두 손으로 받쳤다.
운전사와 마라차는 이름 모를 술병을 따서 한 모금씩 들이켜고 있었다. 기다리느라 지겨워서 혼났다고 했다. 운전사는 마라차를 휠체어째 다시금 버스 안으로 들어올렸다. 그는 니케의 출현에 괜스레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마라차만은 여전히 울적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마이크로버스는 시가지를 천천히 벗어났다. 그들은 본디대로 자리를 잡았고, 니케는 종식의 옆자리에 앉았다. 니케의 금발과 목덜미에서 저릿한 여체의 항기가 솟구쳤다. 종식은 정신이 들었다. 유학생활 동안 찌들린 삶이었고, 여기 오기 전에는 한결 건조했던 세월이었다.

여체의 냄새를 이렇게 가까이서 맡아 보기도 드문 일이었다. 그녀는 도무지 구김살 없이 굴었다. 그 깨끗한 눈을 곱게 굴리면서 소곤소곤 이야기했다. 

운전사가 급유를 하는 사이 엘리자베드는 빵과 물을 사 가지고 왔다. 버스와 사람들은 나름대로 긴 여정을 준비했다. 이제 그들의 긴긴 여정은 시작되었다. 트럭 운전사는 빨라도 새벽 2시는 되어야 테살로니키에 이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너희들은 왜 테살로니키로 가니? 비잔틴 시대 유물이라도 보러 가는 거냐?”
종식의 반말은 그들을 자연스럽게 반말 투로 이끌었다. 여행은 그들을 서로 가깝게 느끼게 했다.
“물론. 게다가 엘리자베드의 할아버지가 거기 지금 와 계시니까.”
“본디는 어디 사시는 분인데?”
“불가리아 흑해 연안 휴양지에 사신데.”
“그런데 그분이 왜 테살로니키에?”
“부인, 즉 엘리자베드의 할머니 친정이 테살로니키야. 이를테면 손녀를 초대한 셈이지.”
“그런데 너희들은? 저기 중국 사람, 코리언 둘, 그리스인 둘은 또 뭐야?”
“니케 너처럼 여행길에서 우연히들 만났다니까!”
“브라보! 멋진 여행이야.”
“멋지긴!”

종식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들이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올라가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어떡하든 이들과 헤어지려고 했다. 그러나 급한 것을 대강이나마 훑어본 지금 명분이 없었다.

어느덧 해가 설핏 기울고 있었다. 버스는 성난 짐승처럼 마구 북상했다. 운전사는 신나는 듯 콧소리를 불어 댔다.
그는 종식을 돌아보고, 자기가 이렇게 너희들을 그리스 구경시켜 줬으니, 너희는 한국 구경을 꼭 한 번 시켜 달라고 했다. 부산에 가면 한국전에 함께 참전했던 고향친구의 전몰비가 있다고도 했다.

어젯밤 파트라스 해변에서 헤어질 때 운전사가 따이우! 따이우! 하고 부르짖었던 게 뭐냐고 종식이 물었다. 운전사는 큰 소리로 알파벳을 읊조렸다. 디 에이 이 더블유 오우 유. D A E W O U?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하, 대우, 대우실업! 그는 그리스 진출업체인 대우실업을 이야기했던 것 같았다.
“대우실업이 뭐 어떻다는 게냐?”
“대우가 아테네시 요소요소에 버스정류장 입간판을 세워 줬다는 거야. 정부에서 돈이 없어, 명색이 관광국인 주제에 오 년이나 방치해 뒀던 사업이지……. 마라차는 그게 늘 자랑스러웠어…….”
“마라차가…….”
언뜻 터졌다. 기우는 오후의 햇살에 점화되어 불타오르는 조용한 바다가 오른편으로 다가와 있었다. 
에게해가 인사를 하는 듯했다. 서구문화의 역사가 시작된 바다, 에게해가 시선 가득히 담겨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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