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고향 가는 길
<수필> 고향 가는 길
  • 이기성 기자
  • 승인 2020.08.25 15: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홍종이
홍종이
홍종이

오늘따라 날씨가 무척 덥다.
에어컨을 켜놓고 밤 11시가 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거실을 서성거리고 있는 나를 보고, 집사람이 등 뒤에 대고“빨리 자요-에어컨이 전기를 얼마나 많이 쓰는데~이번 달 전기 값은 당신이 다 내요” 불호령이 떨어진다.

매스컴에서 전력요금 산정을 사용량에 따라 연동하느니 어쩌니 하며 연일 떠들어대니 그럴 법도 하다 싶어 못들은 척하며 잠을 못자고 있는 것은 30여년의 직장생활을 마무리하고 그 굴레에서 벗어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고향으로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대략의 계획은 있지만 구체적인 계획 없이 떠나는 터라 이것저것 생각할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좋은 여행 집 걱정 말고 만사 조심해서 잘 다녀오라”는 집 사람의 배웅을 뒤로하고 서울역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KTX는 직장근무 시절 출장으로 많이 타보긴 했어도 이번처럼 가볍고 설레는 마음으로 타보기는 처음이다.
대구까지는 한숨 자고나면 도착한다. 그것도 깊게 잠들어 버리면, 까딱하면 부산까지 가버리는 웃지 못 할 사고가 ~ 옛날에 그런 엄청난 일을 경험 했기에 ~ 또 일어날 수가 있어서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포항까지 직접 갈수도 있지만 시간 맞추려면 꽤나 신경 쓰이고, 동대구역에서 바로 옆에 있는 고속버스로 갈아타고 가면 쉽게 갈수 있어서 나는 줄곧 그렇게 다니고 있다.

옆자리에는 누가 타려나~하고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데 갑자기 시야를 가로 막는 덩치 큰 중년남자가 옆에서 자리 확인을 하더니~나는 제발 이 남자가 아니기를~ 내심 바라고 있는데, 그만 옆자리에 덜 썩! 앉는 게 아닌가.

아연실색 하며 몸을 추스르는데, 아고고~아니나 다를까 쾌쾌한 술 냄새가 진동하며 연신 코를 찔러 댄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을 정도다.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유전적으로 술이 몸에 받지 않는다.

아마도 간에서 알코올 분해 효소가 적게 나와서 그럴 거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두 잔만 먹어도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고,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고, 숨이 가빠온다. 뿐만 아니다.

눈이 벌겋게 충혈 되고, 관자놀이의 맥박도 심하게 들썩 거리는데 세 잔이면, 이내 눈꺼풀이 내려오고 누워 있어야 견딜 정도가 되니 내가 생각해도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허지만 이건 내 의지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순전히 조상 탓이 아닌가. 세상 못난 놈 중의 하나가 조상 탓 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 조상을 원망해 본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직장 생활 할 때 가장 어렵고 걱정되는 것이 윗분들과의 술자리다. 윗사람에게 술을 권할 수가 없고, 잔이 오는 것도 겁이 날 정도이기 때문이다. 

술을 권하기만 하면, 바로 부메랑이 되어 그 잔이 내게 돌아오고, 잔이 오면 눈물을 머금고 마시고는 취해서 안절부절 못하는 나에게, 남자가 술이 그렇게 약해서야 쓰겠느냐며 농담 섞인 핀잔을 주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 였는데, 그럴 때 마다 조상님들을 실컷 원망 하고는, 제삿날이나 명절 때 조상님들께 잔을 올리면서 정성껏 용서를 빌며 면죄(?)를 받아 왔었다.

내 사정이 이러하니, 오늘은 자리 운수가 엄청 없는 날이다.
대구 도착 전에 잠 좀 깨워 달라는 부탁을 하려던 기대는 애초에 강 건너 갔고,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대구까지 가는 내내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돌리고 앉아 있어야 될 뿐만 아니라 운수가 더 나빠 잠이라도 자는 날이면~머리가 나를 향해 서서히 공격해 올 것이고 심지어 육중한 어께까지 나한테 맡기며 날 잡아 잡숴~할 것이 안 봐도 훤히 보이니 고역도 이만한 고역이 없겠다고 생각하니, 그것도 대구까지, 아찔하다.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하고 궁리 하고 있는데, 아뿔싸~
그 사람은 자리에 앉자마자 5분도 안 돼 코를 골기 시작한다.
잠에다 코까지 곤다. 이거야말로 장기로 치면 양수겸장이다.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예상대로 진행되는 시나리오다.

그렇다고 짜증을 낼 수도, 화를 낼 수도 없는, 혼자 부글부글 속을 끓이고 삭여야 하는 한심한 처지가 되어버렸다.
정말로 미칠 지경이다.

아무리 대책을 생각 해봐도 별 묘안이 없어서~절이 싫으면 스님께서 절을 떠나시는 게 맞습니다. 관세음보살~하고는 용기를 내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차안에서 혹시 빈자리가 하나 있나~하고 이리~저리~이쪽 저쪽 살피는데 자리는 없고, 객차 칸 사이 바깥 예비석이 눈에 들어 왔다. 얼른 나가서 살펴보니, 좌석이 하나 있긴 한데, 역방향이다. 

허긴 오늘 같은 복에~그러니 지금 진자리 마른자리 가릴 처지가 아니다. 자리를 잡고 후~하고 그나마 안도의 숨을 쉬며 다리 꼬고 앉아 있는데, 웬걸~여긴 또 무지 덥다...!

여우를 피하니 늑대가 달려드는 겪이 되어 버린 샘이다.
덜커덩 거리는 쇠바퀴 소리가 시끄럽기는 어찌 그리 시끄럽냐.

KTX는 그래도 고급차라 괜찮은 줄 알았는데 과거 타봤던 무궁화호나 새마을호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오늘 내 일진이 그런 걸 어쩌나, 쩝~하며 그래도 가야 하니 자포자기 상태로 눌러앉아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저~멀리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둥실둥실 한가롭게 떠다니며 답답해하는 나를 좋은 말로 나무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좀 있으면 곧 도착 할 텐데 뭘 그러느냐는 듯하다.

그런 나를 위로라도 하듯 열차는 한여름의 짙푸른 녹음을 한 아름씩 창 뒤로 휙휙 내 던지고는 씩씩 거리며 사정없이 미끄러져 내 달리고 있다. 그 속도감에 가슴이 뻥~뚫리는 것 같아 그나마 다소간의  위로가 된 듯 했다.

우여곡절 끝에 동대구역에 막 도착 하려는데, 아뿔싸, 그 남자가 번개처럼 생각났다. 혹여 라도 지나치면 낭패다 싶어 얼른 달려가 흔들어 깨우며 어디까지 가시느냐고 물었더니 몸을 옆으로 비틀어 앉으며 부산까지 간단다. 다행이다 싶었다.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하고 있는 부산 아저씨를 뒤로하고 얼른 내려 고속버스 터미널로 종종 걸음으로 갔는데 표 파는 아가씨가 2분 남았으니 다음 차로 가란다. 친구와의 약속 시간도 있고 해서 지금 표를 달라고 우겨 고속버스로 헐레벌떡 달려 갔는데, 아니나 다를까, 포항행 고속버스가 출발 하려고 뒤로 후진하고 있지 않은가. 

얼른 달려가 버스 차체를 두드리며 계속 태워 달라는 신호를 보냈더니 문을 열어 주는데 고맙다는 인사 꾸벅하고 재빨리 올라탔는데 멋진 라이방 안경을 끼고 얼굴이 펑퍼짐한, 마음 후하게 생긴 기사 양반이 빙긋이 웃고 있다.

자리가 많이 비어있어 가까운 자리에 털썩 앉으며 휴~하고 안도의 긴 숨을 몰아쉬고는~그래도 버스기사 복은 있네. 
어휴, 고향 한 번가기 힘들다~푸념 섞인 말로 혼자 중얼 거리고는 잠간 잠이 들었는데, 다 왔습니다~하고 건너 편 자리의 아저씨가 깨워준다. 깜짝 놀라 일어나 보니 벌써 사람들이 내리고 있다. 아, 도착 했구나.
내가 태어나서 자라고 배우고 온갖 풍상과 추억이 서려있는 내 고향 포항 버스터미널에 우여곡절 끝에 도착 한 것이다.
버스에서 어떨 결에 내린 터라 방향감각을 잃고 어리둥절하여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는데, 저쪽 길 건너편에서 추레한 남자가 대놓고 손을 흔들고 있는 게 보인다. 자세히 보니 친구 같아 보였다. 그래 맞다. 친구 유인식이다.
서울을 떠나기 전에 친구에게 연락하여 조심스럽게 내 계획을 얘기 했더니, 그거 멋진 생각 이라며 마중 나갈 테니 같이 다니자고 하는 게 아닌가,
요즘 같이 복잡한 세상에 저마다 개인 사정도 많고 바쁠 텐데, 사전 약속 없이 이런 얘기를 한다는 게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뿐더러 잘못하면 친구 간에 서로 서먹해져 버리는 경우가 왕왕 있음을 보아왔기 때문에 여간 조심스런 일이 아니었는데 내게, 고향 친구란 이런 것이다. 라는 것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 거침없이 쿨 하게 동의 해준 친구가 너무 고맙고 미안하기도 했었다.

그런 친구가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다가, 멀리서 내가 내리는 걸 보고는 마구 손을 흔들어 댄 것이다.
건널목 신호등을 확인 할 겨를도 없이 달려가, 손을 잡고 어깨를 두드리며 아래위를 훑어보는 등 잠깐 사이에, 지난 10여년 비운 세월동안 그 세월이 주고 간 많은 흔적들을 느끼고, 주고받으며, 그 세월만큼이나 허름한 친구의 차에 올라 대왕골 고향 마을로 향하는데, 갑자기 주위가 캄캄해지더니 투 둑. 투 둑. 앞창 유리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 하는데 이내 사정없이 내리기 시작한다.

여름의 거친 손님, 소나기가 나를 반기듯 쏟아지며 앞을 분간 하기 힘들 정도로 퍼붓는다.
가는 길을 쌓인 먼지와 오물을 깨끗이 씻어내고, 고향 산 푸른 나뭇잎도 깨끗하게 씻어내어 더욱 청아하고 푸르게 해놓을 테니, 너도 어릴 적 친구들을 대하고 바라 볼 때, 세파에 찌들고 시달린 그런 눈과 마음으로 보지 말고, 어릴 적 발가벗고 시냇물에서 물장구치며 물싸움 하던 그 천진하고 맑은 눈과 마음으로 대화 하고 어울리라는 가르침의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아, 차창에 흘러내리는 빗물을 바라보는 마음이 숙연 해지는 것을 느낄 즈음 차는 마을 어귀에 서서히 들어선다.

<홍종이 프로필>

·동국대학교 경영학 석사
·대산상업고등학교  교사
·새마을금고 중앙회 상무 (준법감시인)
·사회정의 실현시민연합 자문위원장
·법무법인 ‘태산’고문
·한맥문학 시부문 등단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 특별시 광진구 용마산로128 원방빌딩 501호(중곡동)
  • 대표전화 : 02-2294-7322
  • 팩스 : 02-2294-732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주연
  • 법인명 : 성광미디어(주)
  • 제호 : 성광일보
  • 등록번호 : 서울 아 01336
  • 등록일 : 2010-09-01
  • 창간일 : 2010-10-12
  • 회장 : 조연만
  • 발행인 : 이원주
  • 자매지 : 성동신문·광진투데이·서울로컬뉴스
  • 통신판매 등록 : 제2018-서울광진-1174호
  • 계좌번호 : 우체국 : 012435-02-473036 예금주 이원주
  • 기사제보: sgilbo@naver.com
  • 성광일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성광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sgilbo@naver.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