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아테네 가는 배(16)
<소설> 아테네 가는 배(16)
  • 이기성 기자
  • 승인 2020.08.26 17: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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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성
정소성

에게 해에서 지중해로,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서구문화는 흐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살라미스해전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쳐부수는 폴리스연합군 함대의 함성이 들리는 듯했다. 

시리아, 이집트, 아라비아, 인도,  중국까지 군대를 파견했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거느린 함대의 모습이 반짝이는 수평선 위에 떠올라 보였다. 앙드로마크가 강가에 앉아 눈물을 흘리는 모습도 보였다. 니케는 탄성을 질렀다. 이굉석 씨도 목을 빼 전망을 살폈다. 주하와 엘리자베드만이 침묵에 잠겨 있었다.

나폴리 앞바다 티레니아해에서 시작하여 아드리아해, 이오니아해, 코린트해를 거쳐 드디어 에게해로 들어선 것이다. 신화와 전설과 실화가 범벅되어 쌓인 곳에 주하는 와 있다. 종식은 주하가 자신보다 훨씬 민감하다고 느꼈다.

이 땅에는 기이하게도 실화의 유적은 그리 남아 있지 않고, 신화와 전설의 흔적만이 무성할 뿐이다. 종식은 이 점올 깨닫고 있으나, 주하는 그러한 사실과 현실을 착각하는 듯한 느낌마저도 주었다. 주하는 테살로니키 행 마이크로버스가 마치 트로이 왕국의 전설적 궁궐을 향해 내달리는 듯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니케가 가지고 있던 잡지를 펼쳐 들고 이굉석 씨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 
두 사람은 잡지를 들여다보며 서툰 불어로 지껄였다. 종식도 고개를 기웃거렸다. 잡지에는 한 남자의 팔에 매달린 여자 사진이 실려 있었다. 
두 남녀의 배경으로 활주로가 있고 은빛 비행기들이 있어서 그곳이 비행장임을 알 수 있었다. 

두 남녀는 비행장에서 만난 것이다. 니케는 손가락으로 사진을 가리키면서 뭐라고 설명을 했다. 이굉석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니케는 잡지를 가지고 종식에게로 왔다. 사진의 두 인물은 중국인 여자와 프랑스인 남자가 북경에서 사랑에 빠져 동거하다가 중공 당국에 적발되어, 여자가 2년간 노동개조교육을 받도록 선고받았는데 돌연 풀려나 오를리공항에서 결국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남자는 북경의 프랑스 외교관이고, 여자는 전위화가 그룹 희원이었다. 그녀가 체포될 때, 그들은 중국인의 출입이 금지된 외국인 아파트촌에서 동거하고 있었다. 

이 두 남녀는 체포된 뒤 그들 행위의 정당함을 덩샤오핑(등소평)에게 호소하고,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도 항의의 의사를 전달했다고 한다.

“사랑에는 국경이 없군!”
운전사가 끼어들었다.
“국경만 없어?”
마라차가 받았다.
“그럼, 또 뭐가 없어?”
“이데올로기도 없지.”
“허, 그렇군!”

졸고 있던 주하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그도 잡지를 받아 읽었다. 그는 눈이 빠져라 사진과 기사를 들여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어둠이 가시고 잠시나마 환희의 빛이 서렸다. 그는 잡지를 마라차에게로 넘겼다. 그러나 엘리자베드는 근심스런 얼굴로 주하의 표정을 살폈다.
버스는 에게해에 들어선 옛 함선들의 함성도 아랑곳하지 않고 돌진했다. 해는 서산으로 기울고, 바다는 용광로에 녹은 윗물을 들어부은 듯 붉게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테나가 빈방으로 님을 하나 모셨군!”
“아테나가? 허허허…….”

마라차와 운전사가 웃어 댔다.
“눈물의 강 시모이 양안으로 죽은 트로이의 왕자 엑또르가 군사를 이끌고 아내를 찾으러 밀려들었어!”
운전사는 신이 나 덧붙였다. 그러고선 혼자 웃어 댔다.

그러나 왠지 분위기는 무거웠다. 운전사의 너스레는 어쩐지 공허하기만 했다. 그 공허감을 뚫고 마이크로버스의 엔진음이 미칠 듯이 파고들었다. 그들이 만일 버스라도 타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 분위기는 어떤 것이 되었을까?  
갑자기 니케가,
“꼬레! 꼬레!”
하면서 환성을 올렸다. 한국에 대한 기사를 발견한 듯했다. 그녀의 신통찮은 불어 발음이었다.

1983년 6월 30일부터 11월 14일까지 진행했던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에는 모두 5만 3천536명이 출연, 그 가운데 1만 1천 87명의 가족을 상봉시킴으로써 이산가족 찾기 운동에 봉화를 올렸다. 

KBS가 이산가족 찾기에 뛰어든 것은 지난 6·25 특집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우연히 전파를 탔던 한 전쟁미망인에게 그 뒤 자신의 아내 같다는 전화가 저마다 다른 목소리로 세 통이나 걸려온 것이다…….

종식은 주하와 마라차를 생각해서 니케에게 그만 읽도록 했다. 주하와 마라차도 종식의 생각으로는 한국전 때문에 어떤 의미로든 내면의 빈방을 지킬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전쟁으로 갈라진 한반도의 두 동강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의 이웃 아닌 이웃이다.
니케가 계속 떠들었다.

“어마, 얼마나 좋겠어! 이렇게들 만나게 되었으니! 남과 북을 갈라놓은 그 경계선이 요란뻑적지근했겠네!”
“무슨 소리야? 여기서 이산가족이란 남한에서만의 이야기야. 전쟁의 북새통 속에서 헤어진 채 못 만난 남한 사람들 이야기야.”
“그럼, 남북으로 갈린 사람들은?”
“니케, 그걸 말이라고 해? 그건 생각해 볼 수도 없는 이야기야.”
“왜 생각해 볼 수도 없어? 실은 나도 이산가족이야. 우린 가족의 결합을 위해 동?서 중 자신이 속한 어느 한쪽을 포기할 자유는 없지만, 편지도 전화도 하고, 국외에서 얼마든지 만날 수 있어.”

종식은 니케의 목소리가 좀 더 낮아서 자동차의 엔진음에 완전히 먹혀들어 갔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했다. 아무 뚜렷한 증거도 없이 주하의 어떤 의도가 점점 뚜렷이 눈앞에 클로즈업되어 왔기 때문이었다.

니케는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 가는 이유는 프랑크푸르트에 사는 조부모가 두 손녀를 보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동베를린에 사는 부모까지 부다페스트의 언니 집에서 합류할 거라고 했다. 종식은 남북으로 헤어진 가족이 영원히 만날 길 없는 우리의 현실이 가슴에 무겁게 느껴져 왔다. 왜 하필이면 니케라는 동독 아가씨를 만나 우리 현실을 더 뼈아프게 느껴야 하는지 괴로움이 앞섰다.

종식의 생각으로는 니케의 이야기가 주하에게 어떤 충격을 줬으리라 여겨졌지만 그는 묵묵부답 어떤 표정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는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주하는 니케의 이야기를 잘 알아듣지 못한지도 몰랐다. 뭔가 긴장하는 종식의 눈치를 알아챈 그녀가 목소리를 많이 낮추었기 때문이다.

에게해는 어느덧 암청색을 띠어 갔다. 도로에도 어둠살이 스며들었다. 차량의 좌측으로 태백산맥을 지나는 중앙선 열차의 선로를 무색케 할 절벽이 임립해 있었다. 발칸반도의 등뼈 핀두스 산맥이 내려와 있었다. 산악에는 어둠이 완연했다.

마라차는 그 큰 머리통을 가슴에 박고 졸고 있었다. 허리가 두 동강나 싸우는 나라에 가서 총질해 대다가 자신의 육신도 두 동강난 사내는 잠시 졸음에 떨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또 다른 의미에서 이산가족이 되었다. 이 세상 어느 여자도 그의 성기를 가리기 위해 길쌈을 하고 수놓을 필요는 없다. 아테나 여신도 그에게 미소를 보낼까. 트럭 운전사는 마라차가 종신연금을 받기 때문에 걱정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 가난뱅이 나라에 무슨 신통스런 연금이 있겠는가. 세계사의 뒷전에서 망각의 세월을 맞고 있는 이 변두리 나라가 마라차에게 베푸는 은전이란 뻔한 게 아닐는지. 그나마도 신화와 전설의 무성한 숲이 있기에 세계인들이 비행기를 타고 날아오고 있는 것이다.

“형님!"
갑자기 주하가 종식을 불렀다. 목소리에 어떤 애원이 담겨 있었다. 그가 잠들어 있다고 믿었던 종식은 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응.”
어정쩡한 대답이었다.
“형님은 역사학자 아닙니까?”
“그래서?”
“역사학자로서 대답하십시오. 신화와 전설이 전혀 현실성 없는 것이라면 이 땅의 수많은 신전은 무엇이며, 인류 최고의 서사시라는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는 뭡니까. 그건 결국 트로이 전설을 다루고 있지 않습니까?”
“…… .”
종식은 대답을 유보했다. 주하가 거듭 신화와 전설의 현실성을 주장하는 데 무슨 이유가 있는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친구가 먼 길을 여행하더니 조금씩 미쳐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 한구석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종식은 그가 이때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주하의 이런 엉뚱한 주장을 면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주하의 애절한 목소리 속에는 종식 자신이 그의 주장에 동조해 줄 것을 요구하는 염원이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신화와 전설의 나라에까지 왔으니 조금 미칠 만도하겠지. 종식은 가볍게 생각하기로 했다.

마라차가 잠들고, 까불어 대던 니케도 잠들었다. 그녀의 짙은 금발 머리숱이 마구 종식의 얼굴에 덮여 왔다. 엘리자베드도 주하의 어깨에 머리를 떨구고 있었다. 이굉석 씨만이 어둠이 짙게 깔려 가는 에게해의 수면으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종식도 결국 잠에 떨어졌다. 트럭 운전사는 잠에 곯아떨어진 모두들에게 눈길을 주면서 콧노래도 흥겹게 핸들을 잡았다. 
시간이 흘렀다. 오랜 여행에 지친 그들이라 쉽사리 잠에서 깨어날 것 같지 않았다.

종식이 눈을 떴을 때 버스는 불야성의 도시를 누비고 있었다. 손목시계를 보았다. 자정이 훨씬 넘었다. 운전사는 엘리자베드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드디어 테살로니키에 도착한 것이다.

비잔틴 시대에 로마와 이스탄불을 연결한 육로의 중간지점으로 크게 융성했던 도시이다. 불가리아인, 알바니아인들이 여태껏 적지 않게 살고 있다. 바다가 길쭉하게 도시 한가운데로 파고들어 와 있었다. 테살로니키만이었다.

버스는 도시의 뒷가장자리쯤을 둘러싼 언덕배기의 어느 나지막한 집 앞에 멈추었다. 엘리자베드의 할머니 친정집이었다. 
초인종을 울리기 무섭게 사람이 나왔다. 엘리자베드는 나온 여자를 이모라고 불렀다. 두 여자는 키스를 하고 얼싸안고 야단이었다. 조금 있으니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할머니는 완전히 오그라붙은 파파였으나 역시 엘리자베드의 용모를 그대로 느끼게 했다. 할아버지는 금발의 콧수염을 멋있게 기르고 있었다. 그는 파이프를 물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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