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수경 성동지역아동센터협의회 대표
<인터뷰> 이수경 성동지역아동센터협의회 대표
  • 원동업
  • 승인 2020.08.26 17: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성수동에 숨었다가, 성수동에 스며버린 사람
노동야학 친구에서 아동복지 최후보루로 남다
이수경 / 성동지역아동센터협의회 대표
이수경 / 성동지역아동센터협의회 대표

성동은 성의 동쪽이다. 성은 한양도성. 성동구는 '진짜 서울-한양' 바깥의 동쪽 마을이었다. 
성수동의 옛이름은 뚝도. '뚝기가 선 섬' 이곳 뚝섬에는 예부터 나루가 있었다. 서해서 배가 올라와 조기나 새우젓을 부려놓거나, 남한강 북한강으로부터 뗏목이 내려와 목재며 땔감도 부렸다. 이 뚝섬나루가 성수동이 마을로 번성하는 뿌리가 됐다.

노동야학 성하던 성수동에 칠곡 처녀가 왔다

성동은 '서울'이 가깝고, 너른 벌이 있었기에 근대화 이전에는 밭으로 활용됐다. 배추와 무도 유명하고, 미나리꽝도 풍부히 났다. 근대화 도시화가 진행되면서는 주거지와 공장지대로 변신했다. 청계천변에도, 지금의 옥수동 금호동도 판자집들이 즐비했다. 왕십리 행당동에는 장인들이 많이 살았고, 너른 땅 성수동엔 제법 큰 공장들도 많았고, 소규모 가내수공업 공장도 꽤 됐다. '서울을 위한 생산지'로 여전했다. 성수동 사람들은 학자나 공무원 같은 이들은 적고, 장사나 생산에 종사하는 집들이 많았다고 <한국의 발견-서울편-성동구편>은 적고 있다. 

1980년대 후반쯤 불어닥친 노동운동의 열기는 성수동에도 뻗쳤다. 금호동 행당동에 밀어닥친 재개발의 열풍으로 세입자들이 운동이 일으킨 것과 같은 이치였다. 이 운동들은 당사자들의, 당사자들에 의한, 당사자들을 위한 운동이었다. 대구서 나고 자라고 학교를 다니고, 그쪽 경북지역서 대학(생물학)을 마친 그녀가 성수동으로 이주한 것은 그 즈음이었다. 81학번인 그도 '사회에 대한 의문'을 떨칠 수 없었고, 당시 대구의 '민중교회'를 중심으로 '사회변혁'의 흐름을 타고 있었다. 그녀를 가로막아선 이는 아버지. 

아버지는 완고한 어른이었다. 체신청에 근무하는 공무원이었다. 수재 소리를 들었지만, 가난에 막혀 고교를 중퇴한 그는 직장서 유리천장을 경험했다. 아이들에게 공부를 위한 모든 자원을 아끼지 않았다. 큰딸과 남아 넷에게 전부 보르네오 책상을 사주었다. 학교서 책을 받아오면 다섯 아이의 책마다 표지를 씌워주었다. 큰딸은 동네서 처음 대학에 입학해 아버지 어머니의 자랑이 되었다. 남동생들도 서울대를 포함해 모두 서울과 경북의 명문대로 입학을 했다. 

아버지는 청바지를 입는 딸을 혼냈다. 언제나 단정한 치마와 블라우스를 입도록 했다. 가방에 따로 옷가지를 챙겨다니다, 청바지는 찢기고, 회초리를 맞았다. 저녁 8시가 집안의 통행금지 시간이었다. 큰 딸은 처음 아버지에게 반항해 가출을 했다. 대구 시내에 숨었지만 곧 발각되고 말았다. 누군가 “서울에 가면 못 찾으실 거야!" 충고했다. 

성수동으로 온 건, 교회 분이 여성 목사님을 소개해주신 때문이었다. 그는 성수동 삼일교회 정태효 목사님과 이곳서 지내기로 한다. 그녀가 이곳서 자취방을 구하고, 사랑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들 낳고 또 평생 자신이 책임질 직업과 일터를 갖게 되리라곤, 그때는 상상하지 못했다. 성덕정길 도깨비방망이 지역아동센터 이수경 센터장님의 이야기다. 

작은도서관, 공부방이 도깨비방망이지역아동센터의 뿌리

- 80년대 후반이었겠군요. 당시 성수동 상황은 어땠나요?
“성수동엔 당시 노동야학이 성한 곳이었어요. 당시 제가 있던 삼일교회나 성수교회에서도 노동야학이 있었죠. 활동가들도 많았고. 저는 집에서 아예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처지였으니까, 공장에 다니며 일을 했죠. 거기서 남편도 만났어요. 선반일을 하는 생산직 노동자.”

- 선생님이 관심을 갖고 계셨던 분야가 있으셨어요?
“그때도 굉장히 진지했죠.(웃음) 민족생활문화연구소 활동을 했어요. 세상을 내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어요. 우리의 부모님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런 게 알고 싶었어요.”

- 성수동에, 말하자면 정착해 뿌리를 내리신 건데, 과정을 듣고 싶습니다. 
“글쎄요. 나는 시골서 자라났고, 여기는 아무 연고도 없었죠. 당시 이곳서 노동활동을 하던 강학(가르치면 배우는 이, 주로 대학생들) 활동가들은 대개 명문대 학생들이었어요. 그들과 조금 결이 달랐어요. 예를 들면, 수천 수만 명이 노동자대회를 하고 나면 단체로 대동놀이 뒤풀이를 하잖아요.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아름답다고 느꼈어요. 그 이야기를 하니까 '관념적 사고'를 한다고 해요. 나는 담배를 견딜 수 없어 안 피웠는데, 그런 점도 공격받았죠. '뿌리가 없어, 언제 어디로 갈지 모르는 애'라고도 했어요. 그런 데에 반항심이 생겼달까?(웃음) 그 활동가 중에 남은 사람은 저뿐이에요.”

- 성수동서 지역아동센터를 오래 하셨죠? 도깨비방망이 지역아동센터를 제가 2004년에도 본 것 같은데요? 시작은?
“이곳서 정착하려니 일단 집을 얻어야 하잖아요. 보증금을 모아야 해서, 재능학습지 교사를 했죠. 아파트에 사는 애들은 엄마가 간식도 준비해 놓고, 방에 애도 데려다 놓으세요. 숙제도 다 했고. 그런데 단독주택 아이들은 가서 책부터 찾아야 해요. 어떤 때는 아이부터 찾아야 돼요.(웃음) 그 아이들을 정성들여 돌봤죠. 고3 아이도 있었는데, 공부를 꽤 잘하는 아이 수학도 봐주고요. 제가 수학을 잘 했잖아요. 엄마들이 큰 호응을 해주셨죠. 그런 경험이 이어졌어요. 2년만 하고 민족문화연구소로 돌아갔는데, 정태효 목사님 요청으로 아이들을 돌보게 된 게 계속 이어졌죠.”

- 처음 시작이 어린이도서관이셨네요?
“아이를 낳고, 처음엔 송파 '함께 크는 우리 어린이도서관'을 다녔어요. 송파시민연대에서 운영했던 곳. 저는 청구아파트 상가 2층서도 '동화 읽는 어른모임'을 백현진 선생님과 함께 했었어요. 그러다 난방도 안 돼 추워서, 오래된 단독주택으로 옮겨가 가정도서관을 열었죠. 행복했는데, 사생활이 없는 거예요. 그러다 성수지서 앞에 공부방을 겸한 공간을 연 거죠.”

'차별없는 단일임금 촉구'는 미래 지키고자 하는 것

탁아방과 공부방은 민간에서 자생적으로 열린 '복지공간'이었다. 맞벌이 때문에 방치되는 이웃의 아이들에게 밥이라도 먹이고, 보호하고, 교육도 시키는 일이었다. 노동통일 운동같은 사회변혁의 요구만으로는 채울 수 없던 문화와 일상을 개선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었다. 

2004년 지역의 공부방은 지역아동센터로 제도권에 들어간다. 자율성을 간섭당하고, 행정업무가 많아지리란 우려가 컸다. 그래도 그걸 받아들인 건, 제도적 안정과 보조금이 아이들의 앞날에는 훨씬 더 큰 이익이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리고 16년여. 아이들과의 자리를 굳게 지키던 이수경 센터장은 요즘 '시위'에 자주 나간다. 

“서울시 지역아동센터의 차별 없는 단일임금이 저희들 요구예요. 서울시는 '사회복지사 처우 개선을 위해 지역과 분야에 상관없이 교사나 공무원처럼 하나의 임금체계, 즉 단일임금체계를 완성하겠다' 약속했었거든요. 그런데 지난 7월 1일부터 시행한 단일임금제는 법인과 개인의 차별해 우리들을 단일호봉제에서 배제했죠. 지역아동센터의 뿌리가 민간에서 시작된 공부방에 있는 게 엄연하고, 우리들은 이미 제도상으로, 자격상으로 동일한 입장이거든요. 이를 방치하면 저희 같은 지역아동센터는 젊은 사회복지사로부터 점차 기피대상이 되겠죠. 분노와 좌절이 있죠. 우리는 미래의 지역아동센터를, 아이들을 지키고 싶은 거예요.”

- 아이들에게 무엇을 주고 싶으세요?
 “행복한 경험이요. 그들을 사랑하는 마을과 다양한 분야 어른들의 관심과 눈길들이요. 세상의 넓고 다양한 경험이 가난한 아이들이 많거든요. 책들을 가득 놓은 이유도 그런 거죠.”

도깨비방망이엔 회랑을 이룬 사잇공간과 벽마다, 책이 꽂혀있었다. 아이들 그림과 작품이 곳곳에 걸려있었다. 지역사회의 어른들과 기관들이 함께 이루어낸 연대의 증거들과 독려의 증거들도 단단히 교육의 터를 이루었다. 임시공휴일이던 지난 8월 17일, 센터에 온 몇 아이들은 동생들의 밥까지 받아 문을 나섰다. 이수경 센터장이 그들을 끝까지 배웅했다.

 

<원동업성수동쓰다 편집장>
3bigpicture@naver.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 특별시 광진구 용마산로128 원방빌딩 501호(중곡동)
  • 대표전화 : 02-2294-7322
  • 팩스 : 02-2294-732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주연
  • 법인명 : 성광미디어(주)
  • 제호 : 성광일보
  • 등록번호 : 서울 아 01336
  • 등록일 : 2010-09-01
  • 창간일 : 2010-10-12
  • 회장 : 조연만
  • 발행인 : 이원주
  • 자매지 : 성동신문·광진투데이·서울로컬뉴스
  • 통신판매 등록 : 제2018-서울광진-1174호
  • 계좌번호 : 우체국 : 012435-02-473036 예금주 이원주
  • 기사제보: sgilbo@naver.com
  • 성광일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성광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sgilbo@naver.com
ND소프트